개념과 정의
4월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예정인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정권과 자유당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맞서 1960년 대구의 2·28의거에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까지 기간에 일어난 민주항쟁을 일컫는다개념 정의
'4월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예정인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정권과 자유당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맞서 1960년 대구의 2·28의거에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까지 기간에 일어난 민주항쟁을 일컫는다.
시기 구분
시기구분에 있어서 직접적인 항쟁을 이어간 기간(1960. 2. 28~4.6)을 중심으로 보지만, 반면에 4월혁명의 전후를 연계하여 선거준비 기간을 포함한 1959년 말에서 혁명이후 제2공화국을 수립한 시기까지(1950. 7.29총선), 넓게는 1958년 5월 총선에서 5·16군사정변 이전까지를 4월혁명 기간으로 구분한다.
헌법 전문과 법률
처음 헌법 전문에 등장한 것은 1962년 5차 개정 헌법때 '4·19의거'로 등장한다. 이후 신군부의 쿠데타 이후 1980년 8차 개헌 때는 이 용어가 헌법전문에서 사라졌다가 1987년 9차 개헌 때 헌법 전문에 '4·19민주이념'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등장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에서 '4‧19민주이념'를 사용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률」과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도 '4·19혁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중고등학교 역사관련 교과서에서는 4월혁명을 '4·19혁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의거
1960년 4월 19일 또는 그해 3·4월에 있었던 일련의 시위와 그로 말미암은 사태의 진전이나 변화에 대해서 4월혁명 또는 4·19혁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다른 말로도 많이 불려졌다. 4·19 당시에는 4·19를 4·19사건으로도 불렀다. 특히 의거란 호칭은 꽤 많이 사용되었다. 4·19의거란 호칭은 5·16군부쿠데타 이전에도 사용되었지만 주로 그 이후에 사용되었다. 박정희 등 5·16쿠데타 주동자들은 쿠데타 초기에는 4·19혁명이라는 말을 즐겨 썼고, 또 “두 번 혁명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다”라는 말도 썼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들은 자신들의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부르고, 4·19를 의거로 낮춰 불렀다. 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나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사용하도록 했다.
의거나 학생의거라는 말 속에는 민족사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는 역사적 대사건이라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일순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는 인식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박태순이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4·19의거라는 말 속에는 독재를 한 이승만정권이 붕괴됨으로써 그 이전의 행위가 원인 무효가 되어 그 이후의 문제들은 ‘정치인’이 잘 알아서 하면 되고,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 본연의 업무인 수업에 충실하면 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4·19이후에도 그렇지만, 군부 쿠데타 이후 학생운동이 전개될 때 언론에서는 4·19를 의거 또는 학생의거라고 부르면서 학생들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박태순 1983,「4·19의 민중과 문학」『4월혁명론』, 한길사)
항쟁
항쟁으로 부르는 사람으로는 4월혁명기 진보세력의 대표적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이종율이 있다. 그는 1960년 3․4월에 있었던 데모 또는 4·19는 결코 혁명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혁명이란 방법과 모습이 어떠하던간에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주된 안목으로 한 사회적 경제의 영유권이 갑의 사회적 성원(成員)세력으로부터 을의 세력으로 이동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3․4월민족항쟁은 이 땅의 혁명 전도를 거룩하게 한 단계 높인 것이지만, 위와 같은 혁명을 성취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민주항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민족항쟁이라는 말을 쓴 것이 주목된다. 민주항쟁이라면 반(反)전제투쟁이 주된 내용으로 되고, 민족항쟁이라면 반전제는 물론이요, 그중에서도 반제국주의 등 민족자주를 더욱 강조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처럼 사용한 것이다. 이종율이 ‘항쟁’이라는 말을 쓴 것은 4·19로 이승만의 '근본적 체제'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일구(이종율의 필명) 1960,『현순간 정치문제 소사전』 부산 국제신문사).
혁명
1960년대부터 한동안은 4·19혁명이라는 말이 널리 시용되었지만, 근래에 들어와 4월 혁명이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 연구자이건 정치가이건 언론인이건 대부분 3․4월 시위 또는 4·19를 4·19혁명 또는 4월 혁명으로 부른다.
전문 연구자들이 4월혁명 또는 4·19혁명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이 이승만정권이나 이승만체제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만정권이나 이승만체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혁명의 개념이 차이가 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4·19 또는 4·26은 혁명이 일단락된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펴면서 사용하는 경우이다. 신상초는 일찍이 『사상계』1960년 6월호에 “4 ․ 26은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 시발점이다”라는 부제가 붙은 글을 쓴 바가 있다. 박태순은 혁명으로서의 4·19는 4·19가 일어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이 된 것이라고 보아야 그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 점을 박태순은 의거로서의 4·19는 역사적 소임을 완수한 것이 되고, 혁명으로서의 4·19는 그로부터 새롭게 그리고 끈질기게 진행되어 나가야 했던 하나의 원점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백낙청교수가 4·19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미완의 혁명’이라는 호칭을 택하고 싶다고 말한 것도 넓게 보면 같은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이해된다.
차기벽교수는 4월혁명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4·19를 학생층을 비롯한 지식층이 취약한 중산계급에 대신해서 궐기하여 신(新)절대주의를 타도한 시민․ 민주혁명으로 인식했다. 신절대주의라는 용어가 눈길을 끄는데, 차교수는 신절대주의를 지주층 출신의 관료 및 자본가와 결탁한 보수적인 정치세력, 행정부의 강화형태를 취한 국가권력의 강화, 이승만의 1인지배, 독재정치라기보다는 부패한 전제정치 내지 동맥경화증에 걸린 정치 등과 연결시켜 설명했다(차기벽, 1983 「4・19 과도정부 장면정권의 의의」 「4월혁명론」, 한길사).
혁명의 외연을 부정축재로 넓혀서 4월혁명을 평가하는 주장도 주목된다. 이기백교수는 그의 명저 『한국사신론』 맨끝 부분의 절 제목을 '4월혁명'으로 붙이고, 그것의 맨끝 서술에서 “4월혁명은 맨 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한국의 최초의 혁명이었다.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학생이었다. 기성세대나 기성권위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학생들이 4월혁명의 선두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라고 기술했다. 이러한 서술은 4월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교수는 그것에 이어 “4월혁명은 독재정치와 부정축재에 반항하는 국민의 힘이 학생들의 젊은 의기(意氣)를 통하여 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민주주의의 발전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었다”라고 기술해 부정축재에 대한 반항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이미 민석홍교수는 『사상계』 1960년 6월호에 수록된「현대사와 자유민주주의」, 『세계』1960년 6월호에 수록된「4월혁명의 사관」에서 '4월혁명'을 혁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독재정권 타도와 함께 그것과 결합되어 있던 특권적인 재벌이나 기업가층의 몰락의 바탕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라고 설파한 바 있었다.
서중석 교수는 최근 발간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4월혁명, 독재자와 맞선 피의 항쟁」에서 '4·19시위'와 100여 명의 희생은 이승만 정권을 부리부터 흔들었다’라고 하면서 '4·19혁명'의 사용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우리가 4월혁명 정신이라고 부르는 또는 4월혁명의 의미를 살린 연러가지 활동은 4월 26일 이후에 많이 나타나므로’ 4월혁명‘으로 부르는게 좋겠다고 얘기한다.
용어정리
이상 살펴본 '1960년 4월' 관련 용어를 살펴보면, 4‧19, 4‧19의거, 4․19학생의거, 4월혁명, 4월민주혁명, 4.19혁명, 4․19민주혁명, 4·19민주항쟁 등의 다양하게 용되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조현연 교수는 「민주화운동 명칭 – 용례 조사 및 표준화 탐색 조사·연구 보고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7)에서 ‘4월혁명’을 대표어로 ‘4‧19혁명, 4월민주혁명, 4․19민주혁명’을 동의어, 유사어로 '4·19민주항쟁, 4‧19', 관련어로 '4‧19의거, 4․19학생의거, 1960년 봄 혁명'로 분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