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과 원인
정부와 자유당은 일찍부터 부정선거를 통한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 압승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 들어갔지만, 야당 민주당의 대책은 거의 속수무책이었다정치 사회적 배경
1952년 8월로 임기가 만료되는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연장을 위해 1952년 1월 부산에서 집권연장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당시는 간선제) 개헌안을 제출했다가 부결되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5월 25일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헌병대로 연행하는 등 공포분위기 속에 7월 4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고 야당의 개헌안 일부를 포함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부산 정치 파동). 직선제 개헌에 성공한 이승만은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총투표수의 72%, 유효투표수의 74.6%인 5,238,769 득표). 그러나 이 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요식행위였다. 7월 18일 선거일 공고, 7월 26일 후보 등록 마감, 8월 5일 투표로 선거운동 기간이 불과 10일 이었다.
1954년 5월 민의원 선거를 경찰력을 동원한 관권 탄압선거로 국회를 장악한 이승만은 ‘현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폐지하는 것’을 공자로 하는 2차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의 중임을 1차에 한하여 인정한 것을 이 헌법 개정 당시의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또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유당은 개헌안을 11월 20일 국회에 상정하고 11월 27일 표결에 부쳤다. 그런데 결과는 재적 203명 중 가 135표, 부 60표, 기권 7표, 결석 1표로 개헌정족수인 136표에서 1표가 미달, 부결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어제 최 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개헌안 투표가 부결임을 선포함 것은 의사과장의 잘못된 산출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 선포된 것” 이라고 지적하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숫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4사5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11월 29일 가결되었다고 선포하자 야당의원들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최 부의장을 끌어내는 등 난장판이 벌어졌지만 권력을 앞세운 영구집권욕 앞에는 역부족이었다.(4사5입사건)
이 사건은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결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자유당 소장파의원조차 무더기로 당을 이탈하였고 민국당은 무소속의원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야당연합전선에 가까운 호헌동지회를 구성함으로써 민주당과 진보당 창당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민심도 돌이킬 수 없으리만큼 이승만과 자유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급서하면서 진보당 조봉암이 야권 후보로 나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장면(민주당)이 당선되었다. 야당 단일후보였던 진보당 조봉암은 폭력과 부정 난무한 선거에서 216만 표를 얻었고(이승만 504만여 표), 자유당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은 낙선하였다. 부정선거와 야권분열속에서 얻은 조봉암은 이 선거를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진 선거’로 표현했다. 신익희에 대한 추모 표라 할 수 있는 추정되는 무효표도 무려 185만 여 표나 무더기로 나왔다. 표를 합친다면 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시간문제로 인식되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조봉암이 이승만의 최고의 정적으로 떠올랐고, 국부니 민족의 태양이니 하면서 떠 받들어져온 자존심 강한 지도자 이승만의 위신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1956년 9월 28일에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부통령을 향한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4월혁명이후 사건의 배후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재수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사건 당시 자유당 총무부장이었던 임흥순이 총책을 맡아 저격사건을 음모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기붕이 최고 지시자라는 증언도 나왔다. 이 사건은 81세의 고령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의 ‘유고’시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계승하도록 되어 있는 장면 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이기붕의 측근들이 저지른 음모였던 것이다.
수많은 방해공작에도 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당이 창당되자, 이승만과 자유당 그리고 민주당은 1958년 5월에 실시 예정인 제4대 민의원선거에 진보당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어떤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과거 좌익전력을 이용하여 그를 각종 간첩사건과 연계함으로써 국민적 레드콤플렉스를 불러일켜 조봉암의 지지세력들과 국민들과의 연결고리를 단절하고자 하였다. 결국 1958년 조봉암을 간첩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 이듬해 7월 31일 처형하였다.(진보당사건)
1958년 5월 민의원선거에서는 무더기표, 표바꿔치기, 부정개표 등 부정선거가 횡행하였고,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언론과 야당은 2년 후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독재권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강력 반대하였다. 철야농성하는 의원들을 끌어내고 여당 단독으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959년에는 반공청년단을 결성하여 정치깡패,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반정부인사들에 대한 공포 조성, 야당 집회장에서의 폭력 방해행위를 일삼았다. 2월에는 경향신문의 논설과 기사를 문제삼아 고정칼럼인 ‘여적(餘滴)’의 필자인 논설위원 주요한을 내란선동협의로 구속하고, 4월 30일 ‘경향신문’에 대해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하여 폐간명령을 내렸다.
부정선거 획책
1960년 실시 예정인 제4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은 1959년 3월부터 구체적인 선거대책을 세워 나갔다. 먼저 장관을 경질하고,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부 장관에 이승만 수족인 최인규를 임명했다. 최인규는 당신 언론에서 “자유당 내의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다만 경무대와 이 의장에게만 충성을 바쳤다”고 할 만큼 이승만에게는 더없는 충복이었다. 곧 이어서 그는 35세의 서울시경 국장 이강학을 치안국장에 임명하고, 각 도 경찰국장도 바꾸었으며, 이어서 대규모 총경급 경찰 인사를 대폭적으로 단행했다. 5월에는 7개 도지사를 바꿔 선거체제에 돌입했다.
자유당은 일찌감치 1959년 6월 29일 조기전당대회를 열어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했다. 이에 최인규와 이강학은 사전 부정선거 계획을 세우고 자유당 입후자가 당선되도록 독려하였다. 자유당 후보가 80 이상 득표할 수 구체적인 방법으로 4할 사전 투표, 3인조·9이조 공개투표, 자유당 완장 착용, 야당 선거위원과 참관인 매수나 테러 등, 투표함 바꿔치기, 표 바꿔치기 등이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선거자금을 살포하여 유권자를 매수하거나 동원하는 비용에 사용하였다. 자유당의 선거운동은 반도호텔 809호실에 본부를 두고 한희석(당시 자유당 중앙위 부위원장), 박용익(자유당 총무위원장), 최인규(내무부 장관)가 총괄하였는데 공식적으로 조달된 돈만 해도 62억 9천만 환이라고 4월혁명이후 밝혀졌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자유당은 경찰뿐 아니라 외곽단체들과 여러 비공식적인 폭력조직도 동원했다. 그 중에서도 4월혁명 과정에서 민중들의 일차적인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대한반공청년단이었다. 이들은 정부와 자유당의 비호를 받으며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공포분위기 조성과 야당 집회에 대한 폭력 파괴 활동을 벌였다. 1959년 8월경부터는 말단 자유당의 기본조직인 9인조 세포조직을 전국적으로 만들었다. 문화예술계도 동원되었다. 1959년 3월 정치깡패 임화수가 반공예술인단을 만들어 선거운동에 나섰는데, 배우와 대중 음악가들을 끌어들여 만든 이 단체가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라는 이승만 홍보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적으로 돌렸다.
정부와 자유당은 일찍부터 부정선거를 통한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 압승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 들어갔지만, 야당 민주당의 대책은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민주당은 정부통령후보 선출문제를 둘러싸고 신구파 갈등이 계속되어 1959년 11월 26일에마 비로소 후보지명대회를 가졌다. 조병옥을 대통령후보에, 장면을 부통령후보에 지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9년 12월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해에 치를 정부통령선거를 농번기를 피해 조기에 하겠다고 발표했다. 통산 5월에 있었던 선거를 조기에 치루겠다는 것이었다. 후보지명의 휴유증으로 인한 민주당내 불신과 갈등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선거를 앞당겨 실시하려는 이승만의 속내가 있었다.
2월 3일 정부는 3월 15일에 선거를 치른다고 공고했다. 2월 5일 이승만과 이기붕이 각각 자유당의 대통령후보, 부통령후보로 등록했다. 민주당의 정부통령후보는 2월 7일 등록했다.
선거전이 본격화되자 경찰과 반공청년단 단원에 의한 야당 및 반독재세력에 대한 테러가 빈번히 발생했다. 경찰은 각종 집회의 사전신고 ․사전허가제를 악용하여 야당에 의한 선거 집회를 전면 봉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료 중이던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2월 15일 사망했다. 이미 정부통령후보등록을 마친 민주당으로서는 정부통령후보를 새로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요청했지만 정부는 듣지 않았다. 민주당은 전의를 상실했다. 자연히 대통령후보는 이승만 한 사람으로 좁혀졌다.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했다. 그런데도 자유당과 경찰은 이기붕의 확실한 부통령당선을 위해 부정선거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960년 2월 28일 재야 각계 인사를 중심으로 공명선거추진위원회(위원장 장리욱)를 발족하여 “일체의 반민주 세력을 제외한 초당파적 전 국민 세력을 총집결하여, 부정선거를 철저히 분쇄하고 공명선거실현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우리의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한사(限死)투쟁할 것이다”라고 각오를 밝혔지만 자유당의 공개적인 부정선거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