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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로 보는 4월혁명

1960

  • 2.28
    • 시위 상황 개요
      일요일인 28일 오후 대구 시내 곳곳에서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학교·경북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경북여자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등의 학생 1,200여명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대구에는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학생들의 민주당 강연회 참석을 막기 위해 대구시내 대부분의 학교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를 지시했는데 명목은 각양각색이었다. 대구여고는 졸업생 송별회와 무용발표회, 경북고는 영화관람, 경상중학교는 졸업식 연습, 대구상업고등학교는 졸업생 송별회와 원서제출 등을 이유로 들었다. 또 제일여자중학교는 임시수업을,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시험, 대구공업고등학교는 학교 자체행사, 각 국민학교는 보충수업 등의 이유로 학생을 등교하게 했다. 학생 뿐 아니라 이날 대구시내 공장과 회사도 직원들을 출근시켰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68-69쪽)

      그러나 학생들은 오후 1시 경부터 “학원의 자유를 달라” 고 외치면서 대구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했고 경찰과 충돌해 약 200명이 연행되었다. 대구 경찰은 오후 2시 경 부터 비상경계를 실시하여 도청 경찰국 주위 일대에 새끼줄을 치고 교통을 차단했다. 또한 소집된 정복 무장경찰관과 사복경찰관들을 시내 각 요소에 배치하여 시위 학생들을 발견하는 대로 연행했다. 오후 1시 30분 경부터 연행되기 시작한 학생들은 경찰국에 120여 명, 대구경찰서에 약 50명, 남대구경찰서에 80명(여학생 30명 포함)이었다. 경찰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오후 5시 30분부터 6시 사이에 주모자로 알려진 학생 수명만을 제외하고 모두 학교 당국에 인계, 석방했다. 경북도지사는 학생시위사건 수습은 될 수 있는대로 학원 당국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후 밤 늦은 시각에 도지사 관사 앞에서 연행된 경북사대부고 학생 4명과 시위 주도자로 알려진 경북고 이대우 외 수 명의 학생도 밤 10시 경 훈계·방면하였다. (『대구일보』1960. 2. 29 ; 『동아일보』1960. 2. 29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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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 800여 명, 학원의 자유 주장하며 시위]
      2월 25일, 경북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원래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던 학기말 시험을 28일에 일부를 실시하고 나머지는 3월 3일부터 계속한다고 발표하였다. 학교 측의 시험일자 변경발표에 학생들은 “준비관계로 곤란하다”, “무슨이유로 변경하느냐”, “그날이 민주당 강연회가 아니냐” 등의 발언을 하며 즉시 학생위원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26일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2학년)는 ‘2월 28일 하오 1시의 등교에 관한 건’ 으로 지도위원 선생에게 학생위원회 소집을 요구하였으나 지도위원은 결재를 학생과장에게 미루었다. 학생과장은 학생위원회 소집을 거부하며 학생들에게 이유는 “뻔하지 않느냐” 라고 하였다. 교감 또한 소집이유가 없다고 불허하였다. 그러나 26일 오후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학생위원회를 소집하고 학교 당국에 항의하였다.

      1. 일단 3월 3일로 결정 발표된 시험 일자를 변경한다는 것은 관례상 부당하다.
      2. 시험 준비 기간의 단축으로 응시에 지장 있다.
      3. 하필이면 학생들에게 휴양의 자유를 박탈하여 일요일에 실시코자 하는가.
      4. 민주당의 강연회건 어디 강연회건 정치관계 때문에 피해입고 싶지 않다.
      5. 어떤 정당의 강연회를 듣건 학생자신의 자유가 아니냐. (남욱, 「2·28대구학생데모사건의 진상」,『새벽』1960월 4월호, 새벽사, 94-99쪽))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 “등교한다는 전제 밑에 등교조건을 변경한다든가 하는 점 같은 것은 토론이 될 수 있으되 등교여부를 토론하는 것은 안된다” 고 응답했다. 이에 학생 대의원들은 학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요일에 시험은 보지 않으나 월요일 수업을 당겨 일요일에 등교하고 월요일은 휴식할 것을 요구했고, 학교 측에서도 승낙하였다.

      그러나 학교 측은 27일 갑자기 절충안을 폐기하고 일요일 시험을 재발표했다. (경북고등학교 교지는 학교 당국이 28일에 다시 시험을 실시한다고 발표한 때가 26일 종례시간이었다고 밝혔다「( 2·28 경과상보」, 『경맥』7호, 경북고등학교,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화운동사』자료집 Ⅱ, 2000, 231쪽 재인용)).)

      일부 교사는 도 당국에서 일요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의 명단을 가져오라고 하였지만 사제의 정을 생각해 등교 거부 학생이 한 명도 없다고 보고하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2·28경과상보」,『경맥』7호, 경북고등학교,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32-233쪽 재인용))

      2월 27일 학생부위원장 이대우는 하교 후 지도급 학생들과 만나 시위를 계획하는 한편 공납금 미불로 퇴교한 하청일(3학년)에게 결의문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대우는 27일 갑작스레 일요일 등교를 발표한 대구고등학교·경북사대부속 고등학교의 대표들과 자신의 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시위 결행 여부를 토의하였다.

      이들은 “①2월 28일 하오 1시를 기해 일제히 궐기하여 자유를 전취하기 위한 피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한다, ②데모한 학생을 구속하거나 선생님들에 대한 인사적 조치가 있을 때는 우리는 데모를 계속할 것이며 사태가 악화될 경우에는 한국의 전 백만 학도에게 호소한다” 라고 결의하였다.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정음사, 1960, 19쪽. 동아일보도 이대우가 27일 대구고등학교 학생 간부들을 만나 28일 오후 1시 반월당 앞에서 시위를 할 것을 대구고교·경북고교와 완전 합의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1960. 3. 7 조3면). 그러나 또 다른 기록은 학생들이 사후처리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전원 시위 단념상태로 취침했으며 구체적인 확약없이 다음날인 28일 서로 등교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남욱, 96쪽). 한편『서울신문』은 이대우가 25일 민주당 경북도당 간부로부터 민주당 강연회가 열리는 28일 오후 2시 경을 기해서 데모를 일으키라는 사주를 받았으며 이대우 또한 이같은 사실을 자백했다고 보도하였다『( 서울신문』1960. 3. 1 조1면).)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연설이 예정되었던 28일 일요일, 영화 관람을 이유로 등교지시를 받은 경북고 학생들은 12시 50분 학교교정에 모였다. 이대우는 시위를 하더라도 운영위원회를 소집하고 결의한 다음 결의문을 정식으로 채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구고 학생위원회 위원장이 경북고를 찾아와 “우리는 이미 교문을 나섰다” 라고 함으로써 경북고 학생들 사이에 시위에 대한 기운을 복돋았다. 이에 경북고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기 시작하며 “학생위원장은 뭣하는 놈이고!” 를 부르짖었다.

      이대우가 선두가 된 학생운영위원들은 두터운 두루마리 결의문을 갖고 조회단에 올라 “일요일날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폐습을 시정시키고 학원 내의 자유를 찾기 위해 학원 내의 여론을 사회에 반영시키자” 고 결의문을 낭독했다. 교사들의 제지와 시간이 없다는 학생들의 외침에 결의문은 1/3정도 건너뛴 채 낭독되었다. 누군가가 단상에 뛰어 올라 “우리의 뜻을 사회에 알리자. (중략) 코스는 반월당 역전! 구호는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라고 외쳤다. 그러자 경북고 1, 2학년생 약 800명은 교사들의 제지를 무릅쓰고 교문을 나와 거리로 나갔다.(『동아일보』와『대구신문』등의 신문 매체는 8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했다고 보도했고, 남욱은 700명이 교문을 나선 것으로 기술했다(남욱, 97쪽).)

      시위를 시작한 경북고 학생들은 삼덕동우체국 앞에서 수성교서의 선거 강연장으로 가던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택시와 만나기도 했다. (언론 중『대구일보』만이 학생들이 장면과 조우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대구일보』1960. 2. 29). 또한 장면은 후일 경북고등학교 교지에 쓴 글에서 강연장인 수성천변으로 향하던 중 경북고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학생들이 환영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알고 기뻐하며 손을 흔들어 응답했다고 밝혔다(장면, 「2·28은 정의의 본」, 『경맥』7호,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08쪽 재인용)).)

      이후 학생들은 모두 모자를 벗고 “역으로 가자” 는 구호와 함께 도청 정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정·사복경찰들은 문을 닫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문을 박차고 나오는 학생들로 인해 문이 열리고 아수라장이 되어 학생들의 책과 노트 등이 정문 앞 길바닥에 뒹굴었다. 좁은 도청 정문에서 학생 30-40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65쪽)

      한편 이날 밤 9시 경에는 백차에 실린 학생 두 명이 시내를 돌면서 마이크로 “경북고등학교 학생 시위에 참가했어도 당국에서 관대히 처분하니 안심하고 내일 등교하라” 는 가두 선무 방송을 하였다. (『 대구일보』1960. 2. 29 ; 『동아일보』1960. 2. 29 조3면)

      [경북고등학교 결의문]

      인류 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오늘은 바야흐로 주위에 공장연기를 날리지 않고 6일 동안 갖가지 삶에 허덕이다 모이고 모인 피로를 풀 날이요, 내일의 삶을 위해, 투쟁을 위해, 그 정리를 하는 신성한 휴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루의 휴일마저 빼앗길 운명에 처해있다. 우리는 1주일 동안 하루의 휴일을 쉴 권리가 있다. 이것은 억지의 말도 아니고 꾸민 말도 아니고 인간의 근세 몇 천년 동안 쭉 계속해서 내려온 관습이요, 인간이 생존해 나가기 위한 현명한 조치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기 위해 만든 휴일을 빼앗기고 피로에 쓰러져 죽어야만 하나,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東亞)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골의 시(詩)를 잊지 않고 있다. ‘그 촛불 다시한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큰 꿈을 안고 자라나는 우리가 현 성인사회의 정치놀음에 일절 관계할 리도 만무하고 학문습득에 시달려 그런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그러나 이번 일은 정치에 관계없이 주위에 자극받지 않은 책냄새, 땀냄새, 촛불 꺼멓게 앉은 순결한 이성으로서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밑바탕으로 하여 일장의 궐기를 하려 한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이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이며, 이러한 행위는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릴 학도요, 조국을 괴뢰가 짓밟으려 하면 조국의 수호신으로 가버릴 학도이다.

      이 민족애의 조국애의 피가 끓는 학도의 외침을 들어 주려는가?

      우리는 끝까지 이번 처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싸우련다.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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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대구고등학교 학생, 학원의 정치도구화에 반발하여 시위]
      대구고등학교 당국은 27일 아침에 학생들에게 토끼사냥(혹은 운동시합)을 이유로 일요일인 28일 등교할 것을 지시했다. (대구고등학교에서 경북고등학교보다 먼저 학생들의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는 서술이 있다(지헌모 편,『마산의 혼』, 한국국사연구회, 1961, 24쪽).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과 수기는 경북고등학교에 서 25일, 대구고등학교에서 27일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고 밝힌다.)

      28일, 대구고 학생위원장 손진홍은 등교길에 경북고 학생들이 교문을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 상태로 학교에 도착했다. 손진홍은 운동장에서 교장의 훈시를 듣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가자! 가자! 우리도 민주 대열에 합류하자” 고 외쳤다. 이에 대구고 1·2학년생 800여 명이 교문 밖으로 나오려 시도했으나 교사들의 제지로 약 100명 정도의 학생들만이 학교를 나올 수 있었고 나머지는 교정에 머물렀다. (시위에 나온 대구고등학교 학생이 700명이라는 주장도 있다(4월혁명청사편찬회, 『민주한국 4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478쪽 ; 조화영 편, 18쪽).)

      한편 학교에서 탈출하지 못한 나머지 학생들은 교장의 훈화 도중 제2차 시위를 시도하여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들 중 일부는 경찰의 제지를 피해 전동 골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막다른 골목에 갇힌 수 십 명의 학생을 경찰이 곤봉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대문을 열어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했는데 대구고 시위는 골목에서 완전히 진압되었다. (『대구일보』1960. 2. 29 ; 『동아일보』1960. 3. 1 조3면 ; 손진홍, 「부정에 항거하는 젊음들」, 『達丘』창간호, 대구고등학교,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57-268쪽). 일부 기록은 시위에 참여한 대구고등학교 학생 총수를 약 700명으로 보고 있다(남욱,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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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경북여자고등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 일요일 수업 폐지 요구하며 시위]
      경북여자고등학교 당국은 27일 오후 연극발표를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28일 등교를 지시했다. 대구여자고등학교 또한 졸업생 송별회와 무용발표회 참석을 이유로 일요일 등교를 명령하였다.

      28일 당일 경북여고 당국은 연달아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오후 3시30분 경 전체 교사들이 정문에 나와 학생들의 외출을 막고 학생들을 강당으로 모았다. 이 기회를 틈타 학생회 간부들은 시위 단행을 결정하였다. 저녁 때가 되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하교시켰으나 학생들은 제일여자중학교 앞에서 모여 시위를 시작하였다. 약 100여 명의 학생들은 덕산동을 거쳐 반월당을 지나 대구여고 학생들과 함께 민주당 강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수성교를 향해 대열을 짓고 가던 중 낙동강 다방 앞에서 “일요일 수업을 폐지해 달라” 고 외치면서 시위를 하였다. 하지만 경찰과 충돌해 삼덕우체국 앞에서 대열은 해산되고 약 30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대구일보』1960. 2. 29 ; 『동아일보』1960. 3. 1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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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경북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학원의 자유 외치며 시위]
      경북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는 28일 이전에 이미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사건으로 교내외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경북사대부고 2학년 학생 오석수, 이영길, 유효길은 2월 16일 당시 유행하던 ‘유정천리(有情千里)’ 노래에 그 전날 서거한 조병옥 박사를 애도하는 내용을 담은 가사를 달아 칠판에 적어 놓았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학교 안은 물론 대구 시내로 번져나갔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102쪽)

      경북사대부고 학교 당국은 2월 27일 졸업식이 끝난 후 종례시간에 게임을 할 것이라면서 다음 날인 일요일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할 것을 지시하였다. 27일 밤 경북고·대구고 학생들과 시위를 논의한 경북사대부고 학생 간부는 28일 새벽 일찍 학교에 나와 긴급회의를 열고 행동계획을 논의했다. 오전 11시 경 학생 간부들은 시위를 하면서도 도지사를 직접 항의 방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교무주임이 “젓가락 하나로 태평양 물을 휘저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희들이 커서 실력을 길러 깨끗하고 바른 사회를 만들도록 해라. 지금은 공부를 해야할 때이지, 데모를 해서는 안된다” 라고 학생들을 달랬다.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은 경북고와 대구고가 시위를 시작한 시각(오후 1시 30분 경)에 시위에 참가하려 했으나 교직원의 감시로 교문을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학생들 240여 명은 오후2시경부터 “일요등교를 해명하라”, “일요등교 명령자 엄벌하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감금당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교 본관 2층에서 농성을 시작해 오후 7시에도 집에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일부 기록은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이 오후 3시부터 농성에 돌입했다고 기술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68쪽).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은 사복경찰과 교직원들, 학부모들에 의해 운동장까지 끌려나왔으나 완전히 어두워진 오후 8시 경 200여 명이 교문을 빠져나와 삼덕우체국 앞 로터리와 법원 앞 통로를 거쳐 대구매일신문사 앞까지 달려왔다. (300명이 학교를 빠져나왔다는 주장도 있다(조화영 편, 19쪽).)

      한편 이날 대구상업고등학교 학생들도 학내에서 동요를 일으켰으며, 대구중학교에서는 시위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학생들을 교실에 몰아넣고 밖에서 열쇠를 채워 학생들을 감금했다. 대구중 학생들은 유리창을 깨고 나오려 시도했으나 학교 측의 제지로 무마되었다. (대구중학교 학생관련 보도는 조선일보가 유일하다『( 조선일보』1960. 3. 1).)

      [노래]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海公)선생 뒤 따라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
      춘 3월 15일 조기선거 웬말이냐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구비냐
      천리만리 타국땅 벽사 죽음 웬말인가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설움어린 신문들고 백성들이 울고있네
      (안동일·홍기범 공저,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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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9
    • 대구 [대구상업고등학교, 40여 명 시위]
      29일 오전 9시 경, 대구상업고등학교 1·2학년 학생대표들은 전날 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경북고와 대구고 학생들의 석방을 호소하기 위한 시위를 협의하였다. 첫째 수업 시간이 끝나면 전원 운동장으로 나와 삼덕로터리 부근에서 집합하기로 결의했으나 교직원과 경찰의 제지로 10시 30분 경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은 40여 명에 불과했다. (동아일보는 학교를 나온 학생이 40명『(동아일보』1960. 3. 1 조3면), 대구매일은 20명, 잡지 새벽은 20명 정도로 밝히고 있다(남욱, 「2·28대구학생데모사건의 진상」,『 새벽』1960월 4월호, 98쪽).)

      한편 남대구경찰서는 사건 발생 직후 경찰 전원을 비상소집해 대구상고로 몰려갔다. 시위 진압 후 각기 교실에 수용된 학생들은“경관은 물러가라”는 등의 소리를 질렀다. 또한 학생대표 7명은 경찰에서 경북고와 대구고 학생들을 석방치 않는 한 시위를 하겠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은 경찰과 함께 남대구경찰서까지 동행해 형사실을 둘러본 후 구속된 학생이 없음을 확인했다. 양재휘 대구상고 교장은 “학부형은 공부만 열심히 하도록 학생들에게 타일러야 한다” 라고 강조하였다. (『대구일보』1960. 2. 29 ; 『동아일보』1960. 3. 1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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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대구학생시위 다음 날 각 학교 동향]
      시위 이튿날인 29일, 대구 지역 고등학교엔 전날의 어수선한 공기가 여전히 감돌았다. 경북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는 일요일 등교를 대신해 29일에 휴교하기로 되어 있어 수업을 하지 않았다. 전날 저녁 시위로 경찰에 연행됐던 14명의 학생들은 교사들의 주선으로 밤 12시 이전에 귀가했다. 한편 3-4명씩 떼를 지어 구석진 곳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대의원들이 주동이 되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움직인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측에선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 학생운영회 부위원장 박재철(2학년) 등 대의원 전원을 아침부터 선도실에 붙들어 놓았다.

      경북고등학교 시위 주동자로 연행됐던 이대우 외 전원은 29일 평상시대로 등교해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학교 구내에는 정·사복 경찰이 배치되어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으며 학생과에서는 전날 시위의 주동자를 불러 경위를 조사했다. 경북고 김영준 교장은 이번 학생들의 행동을 단순한 망동으로 본다고 하면서 주동자 처벌문제는 아직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경북여자고등학교 학생 중 경찰에 연행되었던 22명의 학생들은 28일 저녁 5시 30분경 석방되어 29일엔 전원 등교하였다. 교장, 교감, 학생과 선생들은 대의원들을 교장실에 소집하여 사건발단의 경위를 청취하였다. 경북여고 교장은 시위 학생에 대해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연행된 학생들은 그 학생의 집이 수성교 방면에 있었을 뿐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대구고등학교는 29일 오전 9시부터 수업을 했다. 정진기 대구고 교장은 864명의 재학생 중 이날 결석자는 50명 정도라고 밝히고, 평소에도 40명에서 60명의 결석자가 나온다고 덧붙였다. 오전 11시 경엔 교장실에서 학생대표들에게 학생들의 동태를 책임지도록 당부하고 도 당국에 출석을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내에는 경찰관이 없었고 평온했다. 한편 일부 학부모들은 이번 사건의 발단이 학교 측의 잘못된 처사때문이라 지적하고 학교 측의 해명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대구일보』1960.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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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 서울 [공명선거추진전국학생위원회 등,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공명선거 촉구 삐라 살포]
      1일,‘ 공명선거추진전국대학생투쟁회’ 와 ‘공명선거추진전국학생위원회’ 두 학생단체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종료 직전 만세삼창을 부르는 틈을 타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삐라를 살포하였다. 이들은 “3·1정신으로 공명선거를 추진하자!” 고 외쳤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은 삐라 살포자가 고려대학교 학생 3명이라고 밝혔다.
      (『동아일보』1960. 3. 2 조3면, 1960. 3.3 조3면)

      [3·1절 기념식에서 뿌려진 삐라 내용]

      ●3월 15일의 선거는 우리 조국이 민주주의를 살리느냐 매장하느냐가 증명되는 날이다. 어느 누가 선거에 이기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오직 이 땅에서 국민의 주권행사가 공명정대하게 이루어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선거가 공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곧 선열 앞에 죄 짓는 것이요 민주우방을 배신하는 결과가 된다.
      ●우리 학도는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교수, 우리의 총장들이 어떤 정파의 앞잡이가 되었을망정 공명정대한 선거를 추진하려는 우리 동지자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를 갈고 가슴 속에 불을 태우고 있을 줄 안다.
      ●어느 누가 사수하여야 할 것인가. 어느 누구의 강연을 듣고 할 것인가. 한 사람이라도 두 사람이라도 자기 소신이 명하는 대로 가두에 나와 공명선거를 외치자. 무지한 국민들에게 눈물로 호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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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대구시, 3·1절 기념행사에 학생들 불참시켜 일부 학생들 침묵시위 전개]
      3월 1일, 28일 학생시위사건이 있었던 대구에서 대구시 주최로 3·1절 기념행사가 오전 10시 10분부터 경북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행사에는 반공청년단원과 공무원, 정당·사회단체 대표 및 일반시민 약 1만 명이 참석하였다. 통상 3·1절 기념식에는 대구시내 학생들이 모두 동원되었지만, 이 날은 제각기 학교단위로 따로 기념식을 올렸다. 학생시위를 일으킨 경북고등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 경북사대부고, 경북여자고등학교 당국은 전체 학생의 결집을 피하고 일부 학생만으로 교실, 강당, 혹은 운동장에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대구여자고등학교는 장학생시험을 이유로 기념식을 열지 않았다.

      대구 시내 각 학교가 학교별로 3·1절 기념식을 치르게 된 것은 2월 29일 오후 5시부터 도학무과장실에서 진행된 각 공립중·고등학교 교장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도 당국은 각 학교의 학생 동향을 파악하고 3·1절 행사에서 동요가 재발될 것을 염려해 시가행진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3·1절 기념행사 때 각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제지시키고자 경산, 청도 등으로부터 100여 명의 경찰을 지원받아 시내 요소 요소에 배치하였다.

      대구시청 주변에도 학생들이 모여들 것을 예상해 경찰과 교사들이 배치되었다. 미리 배치된 이들은 대구공업고등학교 학생과 제일여자중학교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시청 주변의 경계가 가장 삼엄했는데 이는 일부 학생들이 시청 앞에 모여들어 “왜 학생들을 3·1절 기념행사에 불참시키느냐” 고 항의 하고 다시 시위를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날 경북고를 비롯한 대구 시내 고등학교 주변에도 경찰이 배치되었다. (『동아일보』1960. 3. 2 조3면 ;『 대구일보』1960. 3. 1 ; 『대구매일신문』1960. 3. 2)

      이날 대구 지역 중·고등학생들은 3·1절 행사에 맞춰 시위를 계획했으나 결국 실행에는 실패했다. 학생들은 1일 오전에 경북여고 앞, 반월당, 시청광장, 역전광장 등 시내 4개소에서 28일에 이어 두 번째 집단 시위를 계획했으나 증원된 경찰과 도 장학사, 교사들의 저지로 오후 1시 전원 해산되었다. 예정 집결 장소에서 학생들은 증원된 경찰에 의해 일정한 지점에 모이지 못하고 삼삼오오 이동했을 따름이다. (『대구일보』1960.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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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대구지역 각 학교 학생대표와 경찰, 2·28시위 사후수습책 논의]
      1일 오후 12시 30분, 28일 시위에 참가했던 학교(경북고·대구고·경북사대부고·대구상고) 학생대표 약 50명은 남대구경찰서에 모여 경찰과 사후수습책을 논의하였다. (『대구매일신문』은 이날 참석한 학생대표가 20명『( 대구일보』는 50명)이라고 보도했다『( 대구매일신문』1960.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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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
    • 서울 [서울 시내 학생 1천여 명, 민주당 정견발표회 직후 시위]
      5일 오후 5시 30분 경 서울 인사동 어귀부터 종로1가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 앞 사거리에서 학생 약 1천 명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조선일보는 시위대가 수백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1960. 3. 6 조3면).)

      곧이어 정·사복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시도하였으나 학생들은 계속 광화문 네거리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증파된 경찰봉과 기마경관대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으며, 엄상섭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원 5명과 약 20-30명의 학생이 종로경찰 서로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화여대 학생 1명과 여고생 1명이 시위 광경을 바라보다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따귀를 맞는 등 폭행을 당했다. 여학생의 어머니는 “걸어가는 자유도 없단 말이요? ”하며 경찰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다. 한편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 중엔 6-7명 정도가 정식으로 취조를 당했고 나머지는 도중에 방면되었다. 오후 6시 30분 경 함께 연행된 민주당 엄상섭 의원은 밤 11시 30분 경 방면되었다.

      서울시경에서는 이날 밤 학생시위사건에 대비하여 관하 직원 전원을 비상소집하고 특별 경비를 실시하였다. 종로경찰서에는 수 백 명의 무장경관들이 동원되었고 신문기자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이강학 치안국장, 유충렬 서울시경찰국장 등도 종로경찰서에서 수사를 직접 지휘하였다. 또한 민주당의 한근조, 조재천, 윤명운, 김원만 의원등은 사건 진상 파악을 위해 종로경찰서를 방문하고 장시간 머물렀다. (『조선일보』1960. 3. 6 조3면 ;『동아일보』1960. 3. 6 조3면,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69-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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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
    • 부산 [부산지역 고등학교 학생들, 시위 모의 중 경찰에 연행]
      7일 부산에서 동아고등학교, 경남고등학교 등 시내 학생대표 16명은 회합을 갖고 시위를 모의하였다. 하지만 도중 경찰에 탐지되어 오후 7시 경 동부산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다음날 새벽 귀가하였다. 경찰은 서울에서 파견된 학생들의 선동으로 부산 지역 일부 학생들이 가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한편 부산 영도에서는 학생 2명이 공명선거호소위원회 명의의 삐라를 인쇄하는 도중 경찰에 발각되어 삐라 300매를 압수당했다. 이에 대해 경남경찰국은 민주당의 조종과 서울 학생시위사건에 자극된 일부학생들이 부산에서도 시위를 모의하는 도중 사전에 탐지되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학생들이 정치에 가담하여 시위를 모의한 행위에 대해 학교와 학부형들이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학생들이 작성한 삐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1960. 3. 9 조3면 ;『조선일보』1960. 3. 8 석3면 ; 조화영 편,『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11쪽. 한편 일부 기록은 부산 시내 시위 모의가 서울에서 시위가 있었던 5일 저녁 7시라고 밝히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72쪽). 그러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이 모두 7일 오후에 학생들이 시위를 모의했다고 밝히고 있어 이 기록이 7일을 오후 7시로 오기한 듯이 보인다.)

      [부산학생들이 제작한 삐라]

      一. 학원에 자유를 달라!
      一. 부정선거는 학생의 피를 보게 한다
      一. 공명선거 사수하여 민주주의 수호하자!
      ※ 우기(右記)의 호소문을 각 학교 학생들이 발기 중에 경찰에 연행되었다. 공명선거 호소가 불법이냐 그들을 즉시 석방하라.

      공명선거 호소 학생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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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
    • 대전 [대전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 학원의 자유 외치며 시위]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선거 강연회가 대전공설운동장(현 한밭운동장)에서 열린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은 오후 4시 경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동아일보』는 1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했다고 하였으나『조선일보』는 약 400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보도하였다.『한국일보』는 1천여 명 중 700명이 담을 넘어 시위를 시도했으나 교사 등의 제지로 350명만이 시위에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일보』1960. 3. 9 조3면 ;『동아일보』1960. 3. 9 조3면『; 한국일보』1960. 3. 9 조3면).『대전일보』는 시위가 3시 30분에 시작되었다고 보도하였으나 시위에 가담한 학생 숫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시위 시작 1시간 뒤에 약 10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고 밝혔다( 『대전일보』1960. 3. 9 조3면).『중도일보』는 약 300명이 시위에 가담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중도일보』1960. 3. 9 조3면). 여당지인 서울신문은 가장 적은 숫자인 200명의 학생이 충청도의 소극성을 없애고 명성을 얻기 위해 시위를 전개했으며 모 당이 이를 사주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서울신문』1960. 3. 9 조3면). 또 다른 기록은 약 1천여 명의 전교생이 학교를 빠져나와 시위에 가담하였다고 밝혔다(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77쪽). 대전고등학교 측 자료는 8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장 관사 앞에 운집했다고 하였다(대전고등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대전고 60년사』, 1977, 182-187쪽). 충청남도 측 자료도 800여 명이 시위를 감행했다고 하였다(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충청남도지』상, 1979, 446-449쪽).)

      전날인 7일 오전 대전고 교장은 학생 간부들을 교장 관사로 불러 다음날 예정된 장면 민주당 부통령후보 강연회에 참석치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방과 후 모임을 갖고 지난 2월 28일 대구에서의 시위를 상기하며 대전 지역에서도 전체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오후 8시 경 대전고 학생들은 타 학교의 동정을 살핀 후, 대전고 단독으로라도 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73-75쪽 ; 3·8 민주의거기념사업회·대전·충남4·19혁명동지회,『3·8민주의거』, 2005, 26-27쪽)

      대전고 학도호국단 대대장 박제구(2학년)와 운영위원장 박선영(2학년) 등은 학생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시위 날짜를 민주당 강연일인 8일로 정하였다. (『한국일보』1960. 3. 9 조3면)

      8일 오전 시위 계획을 미리 탐지한 교장은 1·2학년 대표 19명을 교장 관사로 불러 시위의 부당성에 대해 설교하고 학생대표들을 감금하였다. (이날 감금된 학생 대표가 11명이었다는 보도도 있다( 『한국일보』1960. 3. 9 조3면).)

      결의문 낭독과 동시에 전교생은 교실에서 나와 교문으로 혹은 담을 넘어 학교를 빠져나와 행진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①학생들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②학원의 자유를 달라, ③학원에서의 선거운동을 배격한다, ④우리의 말을 억제하지 말라, ⑤『서울신문』 구독을 강요하지 말라”는 5개 구호를 외쳤다. (당시 대전고 교내에서는 선거운동 기미가 짙어지고 있었다. 수업을 중단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과거 미국에서 했던 방송을 트는가 하면 이기붕의 뉴스 영화를 강제로 관람케 하였다. 가정방문을 명목으로 자유당 선거운동이 활발했으며 학교 내에서도 사복경찰이 학생들을 감시하였다. 서울신문 강제구독에 대해서는 학교 자치회에서 여러번 구독하지 않기로 결의했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갔다(안동일·홍기범 공저, 73-81쪽).)

      약 1천여 명의 학생들은 당초 ‘학교→공설운동장→인동시장→대전 전신전화국(현원동네거리 KT 대전지점)→대전역→도청→학교’ 로 코스를 잡았으나 얼마 못 가 공설운동장 앞에서 무장경찰과 충돌해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장면이 연설 중인 공설운동장 앞 약 200미터 거리까지 몰려온 학생 300여 명은, 기마경찰에 의해 장총 개머리판으로 머리와 허리를 강타당하는 등 유혈 진압을 당하며 백차에 강제로 태워져 연행되었다. 소방차도 동원되었는데 소방차는 학생들에게 까만 페인트와 물세례를 퍼 부었다. 학생들은 “민주경찰이 학생을 왜 구타하는가”라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근처 논길에 뿌려진 똥물에 빠져 악취를 풍기면서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문창동 75번지 판자 울타리는 경찰과 학생의 육박전으로 모조리 부서졌다.

      대흥동 로터리 앞에서도 2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발생을 미리 탐지하고 대전 시내 각 학교를 포위 경계하고 있던 경찰과 충돌하였다. (경찰은 3월 7일 학생들의 시위 계획 정보를 입수하고 대전 시내에서 경비를 강화하고 7일 밤부터 불량 학생 등을 단속하였다( 『대전일보』1960. 3. 9 조3면).)

      대전역에 이르러 학생들은 또 다시 경찰과 충돌하였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경찰에 대항하였지만 경찰은 백차는 물론 기마순경과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을 제지하였다. 이때부터 학생들의 스크럼은 무너지고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대전천을 따라 중앙시장을 거쳐 중교(中橋)를 건너 대전서여고 앞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버스 합동주차장에서 경찰과 잠시 충돌하였지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줄 것을 요구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다른 한 무리는 돌을 던지며 경찰에 저항하다가 목척교(木斥橋) 맞은편 신도극장 사잇길(현 목척교를 중심으로 중동방면의 천변도로)로 빠져 다른 학교와 합세할 목적으로 보문고등학교로 달려갔다. 그러나 보문고 교문은 이미 닫혀있어 선화교(현 영교)를 건너 시청(현 중앙로 네거리 동양백화점(갤러리아) 맞은편 삼성건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칠대로 지친 학생들 주위로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왔다. 학생들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는데 경찰관의 구타에 “주먹으로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항한다”고 외치며 “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평화적 시위에 경찰이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자진해서 질서있는 시위를 약속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로서 오후 4시 경부터 일어난 대규모 대전고 학생 시위는 약 40분 후에 경찰의 총부리에 의해 해산되었다. (조선일보는 이날의 시위가 1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조선일보』1960. 3. 9 조3면).)

      시위가 모두 진압된 뒤에도 대전 시내 전 경찰은 삼엄한 경계를 펴는 한편 시위학생을 색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경찰은 오후 7시 30분 경 시위 주모자를 제외한 학생을 모두 석방했다며 사건을 표면상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주모학생 5명은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데모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 “어느 당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닌가”, “공산당 스파이의 조종을 받았는지”등의 취조를 당하며 배후에 대해 추궁을 받았다. (대전고등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182-187쪽)

      한편 이날 오후 전장한 충남경찰국장은 형사상으로 학생들을 처벌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전고 학생 시위가 서울 모 계통의 지령 하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배후관계를 계속 추궁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신문』도 충남경찰국장의 말을 인용해, 중앙의 모 계통에서 수 일 전 학생을 가장한 불량배 50여 명을 시내 각 학교에 잠입시켜 시위를 선동, 조종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서울신문』1960. 3. 9 조3면)

      하지만 학생 측이 밝힌 시위 동기는 순전히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독자적인 운동에 불과하며 어떠한 배후관계도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부당하게 구속되면 9일부터 동맹휴학을 감행하겠다고 언명하였다. (『조선일보』1960. 3. 9 조3면 ;『동아일보』1960. 3. 9 조3면,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73-81쪽 ; 조화영 편, 『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81-286쪽)

      [결의문]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들 대고(大高) 건아는 최근 일어나는 여러가지 우리의 뜻에 배치되는 도당국과 학교의 처사에 대하여 그 잘못을 깨닫고 조속히 학원의 자유보장과 대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강력한 시정책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며, 이로써 대고의 명예와 우리의 앞날을 더럽히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一.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한다.
      二. 자유로운 학생동태를 감시 말라.
      三. 서울신문 강제구독을 단호히 배격한다.
      四. 진리를 탐구하는 신성한 학원에서 여하한 사회적 세력의 침투를 용납할 수 없다.
      五. 우리의 거사는 오로지 정의감과 자발적 의사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六. 오늘을 기하여 거행함은 다만 학생들의 사기가 왕성한 때문이다.
      七. 우리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동맹 휴학도 불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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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0
    • 시위 상황 개요
      선거를 닷새 앞둔 10일 대전에서는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이 시위계획 탄로로 경찰에 연행된 친구들을 석방하라며 시위를 일으켰다. 이들은 3월 8일 대규모로 발생한 대전고등학교 학생시위에 이어 또 다시 대전에서 시위를 일으켜 주목을 받았다. 충주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과 수원농업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도 학원의자유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대구에서는 ‘백만학도여 일어나라’ 는 삐라가 시내에 나붙었고, 부산에서는 민권수호전국학생투쟁위원회 이름으로 교직원의 선거간섭을 비난하는 삐라가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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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 시위]
      8일의 대전고등학교 시위에 이어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약 300명이 오전 9시 30분 경 학교 조회를 마친 직후 대열을 형성하여 교문을 나섰다.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달라”, “친구를 빨리 내 놓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전경찰서를 향해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는 10일 새벽 경찰이 대전 지역 일부 학생들을 연행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3월9일, 대전고교생 4명과 8일 시위에 가담하지 못한 대전공고생 9명 및 대전상고생 12명이 회합을 갖고 시위를 모의했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10일 새벽 4시 이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연행된 대전상고생이 11명이었다는 보도도 있다『( 한국일보』1960. 3. 10 석3면).)

      대전상고는 도청소재지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학생들은 조회가 끝난 9시 30분 대열을 지어 대전경찰서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학교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시청 근처에 이르렀을 때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대열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쪽은 중앙시장 쪽으로 한 쪽은 역전 쪽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약 15분간 경찰과 학생들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돌을 던졌고 경찰은 학생들을 곤봉으로 구타했다. 시위는 시작 30분만에 저지되고 학생들은 다시 학교에 갇혔다. 약 50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5-6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었다.

      (일부 기록은 학생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고 하였다(조화영 편, 『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79-291쪽).)

      시위 도중에 자유당 선전차가 학생들을 제지하려 하다가 자유당 선전원이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정오쯤 대전 시내는 다시 평온해졌다.

      (『동아일보』는 시위 가담 학생이 약 300명이라고 보도하였고, 『조선일보』는 300-400명이라고 하였으며, 『대전일보』약 500명, 『중도일보』는 약 600명이라고 보도하였다. 『한국일보』는 약 200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하였다고 하였다.『 서울신문』은 약 60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했으며 민주당의 정략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전일보』1960. 3. 11 조3면 ; 『중도일보』1960. 3. 11 조3면 ;『한국일보』1960. 3. 10 석3면 ; 『서울신문』1960. 3. 10 석3면 ; 『조선일보』1960. 3. 10 석3면 ; 『동아일보』1960. 3. 11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82-83쪽).)

      그러나 대전상고 교장과 이동립 문사국장은 이 사건에 대해 “데모가 아니다”라고 하며 경찰서를 향해 오던 학생들과 교장이 만나 함께 학교로 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동립 문사국장은 8일의 대전고등학교 시위에 대해서는 배후 관계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라고 한 반면 10일의 대전상고 시위에 대해서는 정치적이지도 않고 직접적인 배후도 없다고 밝혔다. (『중도일보』1960. 3. 11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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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대전고등학교 학도호국단 간부, 시위 반성하는 석명서(釋明書) 발표]
      8일에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던 대전고등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명의로 10일 오전 석명서가 발표되었다. 이들은 시위를 미수사건이라고 하는 등 시위자체를 부정하고 시위 계획이 자신들의 무모한 소행이었다고 밝혔다. 시위 도모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말할 수도 없거니와 묻지도 말아주기 바란다”고 하며 시위 미수 사건으로 인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사과하였다. 석명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석명서(釋明書)]

      거(去) 3월 8일 하오에 거행된 학교데모 미수사건에 대하여는 시대의 조류와 환경에 대한 그릇된 판단에서 야기된 무모한 소행으로 여기에 그 원인과 근본에 대하여는 우리가 말할 수도 없거니와 묻지도 말아주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끼고 자랑하는 대고(大高)의 명예를 훼손하였고 학부형 및 사회에 본의 아닌 그릇된 영향을 끼쳐 심기(深甚) 사과하는 동시에 앞으로 참된 역군으로서 대고의 명예와 국가사회를 위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 노력할 것을 이에 성명 하나이다.

      단기 4293년 3월 10일
      대전고등학교 학도호국단 간부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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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추 [충주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 학원의 자유 외치며 시위]
      10일 오후 1시 30분 경 충주고등학교는 오전에 시험을 치른 1, 2학년 학생 500명을 강당에 집결시키고 충주 출신 자유당 홍병각 의원의 선거강연을 듣게 하였다. 강연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소란을 일으켰고, 학교를 나온 약 300명의 학생은 학교 교문 앞에서부터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민주당 충주시당부 앞까지 몰려가 “민주주의 만세”,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로 삼지 말라”고 외치고 한일양조장 앞까지 약 1.5킬로미터를 시가행진하였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로 인해 시위대는 즉시 해산되고 2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연행된 학생들은 주모자 4명만을 남기고 당일 석방되었다. (『동아일보』1960. 3. 11 조3면, 1960. 3. 12 조3면 ; 『조선일보』1960. 3. 11 조3 면, 석3면)

      오후 8시에 또 다시 시위가 발생했다. 충주 지역 남녀 학생으로 구성된 약 200명의 시위대는 충주시 교현동에 집결하여“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학생들은 중앙시장 앞 로터리 부근에서 경찰의 제지로 해산되고 그 중 1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8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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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 [수원농업고등학교 학생 약 200명, 학원의 자유와 부정선거 배격 외치며 시위]
      투표일을 닷새 남겨놓은 10일 오후 1시,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마지막 유세지인 수원에서 학생들의 집단시위가 일어났다. 수원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이날 오전 10시에 예정된 시험이 장면 강연 시간인 오후 1시 경으로 변경되자 학원에서의 정치 간섭에 반대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수원농업고학생약200명은 “학원에대한정치적인간섭을배격한다”, “학원내에서의 간접적인 선거운동을 배격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당 강연장소로 행진하였다. 학생들은 5개 요구사항을 등사한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장 박사를 환영함’ 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강연장소로 향하였으나 소방서 앞에서 경찰과 충돌해 해산되었다. 시위 학생 중 7명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곧 학교에 인계되었다. (『조선일보』1960. 3. 10 석3면, 1960. 3. 11 조3면 ;『 동아일보』1960. 3. 11 석1면, 1960. 3. 13 석4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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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대구에 ‘백만 학도 일어나자’ 는 삐라 발견]
      10일 오전 7시 경 대구시 태평로1가에 있는 외자청 대구 사무소 앞길에 “한국은 패망한다. 백만 학도 일어나자. 강제선거 하지 말고 공명선거 다시 하자”는 내용의 삐라 1매가 붙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날 오후 4시 50분 경 대구시 대안동에 있는 벽돌담에도 같은 필적과 같은 내용의 삐라 1매가 붙어있었다. (『동아일보』1960. 3. 11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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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민권수호전국학생투쟁위원회, 부산 곳곳에 교직원 정치참여 비난 삐라 살포]
      10일 밤 부산 동구와 진구 곳곳에 민권수호전국학생투쟁위원회 명의의 삐라가 뿌려졌다. 삐라 내용은 “교직원은 정치에 관여말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학도들이여, 피로서 민주주의를 사수하자”, “민권수호의 선봉에 서라”, “우리 세대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현실의 부정과 항쟁하라”등이었다. (『조선일보』1960. 3. 11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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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1
    • 부산 [부산에서 민권수호전국학생투쟁회 이름의 삐라 살포]
      부산 동래에서 11일 오전 6시경 전날인 5일 밤 뿌려진 삐라와 동일한 내용의 삐라가 뿌려졌다. 민권수호전국학생투쟁회 이름으로 뿌려진 삐라 내용은 “학원의 자유를 달라”, “교직원은 정치에 관여 말라”, “학도들이여, 피로써 민주주의를 사수하자”, “우리 세대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현실의 부정에 항쟁하자”, “민권수호의 선봉에 서라” 등이다. (『동아일보』1960. 3. 12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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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충북 청주 학생 약 150명, “민주당은 학생을 정치에 이용 말라”며 관제시위]
      11일 청주에서 오후 6시부터 약 40분간 학생 약 150명이 시위를 벌였다. 청주에서의 학생시위는 기존 시위의 구호와는 대비되게 “민주당은 학생의 정치이용을 즉시 중지하라”, “학도는 민주당의 앞잡이가 아니다” 등이었다.

      시위는 청주역전, 청주극장 앞, 청주약국 앞 등 세 곳에서 일제히 일어났으며 학생들은 “학교는 민주당의 앞잡이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애국학도동지회 명의로 된 삐라 약 1만 3천 매를 뿌리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경찰 약 100명은 학생들을 해산하고 주모자를 연행했지만 곧 석방하였다. 이같은 시위는 기존의 학생시위와 정반대의 성격을 띠는 것이어서 시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서울신문』1960. 3. 12 석3면 ;『 조선일보』1960. 3. 12 석3면 ; 『동아일보』1960. 3. 13 조3면. 12일에 시위가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으나(김재희 편, 『청춘의혈』, 호남출판사, 1960, 67쪽) 대표적 일간지인『동아일보』와『조선일보』, 『서울신문』은 모두 11일에 시위가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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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2
    • 부산 [해동고등학교 학생 약 150명, 부산 광복동에서 시위]
      12일 오후 1시, 부산 해동고등학교 2학년 학생 약 150명은 광복동 제일은행 부산지점 앞에 집결하여 부산 공설운동장 쪽으로 300미터를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사복경찰은 시위 10분 만에 학생들을 동아극장 앞에서 제지하고 주모자 5명을 연행하였다. 이날 시위로 부산 시내 최고 번화가인 광복동 거리는 약 30분간 교통이 완전 차단되었다.

      해동고 학생 150여 명은 이날 오전 12시 30분경 수업이 끝나고 헤어지는 척하면서 오후 1시 정각 광복동 입구 제일은행 부산지점 앞에 집결하여 대열을 형성하고 동아극장을 향해 학도호국단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이때까지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으나 창선동파출소 앞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하지만 선발대는 이미 동아극장 앞을 지나 제일극장 앞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경찰과 시위대는 곧 충돌하여 이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 2명과 학생 2명이 부상을 입었고 학생들은 오후 1시 25분경 해산되었다. 학생들이 시위 중 외친 구호는 알려지지 않았다. 경찰은 학생 12명을 연행하여 조사하였다. 경찰은 이날 중·고등학교는 물론 국민학교에까지 사복경찰관을 배치하여 감시를 강화하였다. (『조선일보』1960. 3. 13 조3면 ;『 동아일보』1960. 3. 13 조3면,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85-86쪽 ; 조화영 편, 『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11-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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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부산 시내 고등학생 시위 모의, 경찰 감시로 실패]
      해동고등학교의 시위로 부산 시내 각 학교에는 경찰이 배치되어 긴장감이 높아졌다. 실제 이날 오후 해동고등학교 시위에 이어 오후 3시경에는 동래고등학교·동성고등학교·항도고등학교·혜화여자고등학교 학생 약 300명이 시내 범천동 조선방직회사 앞에 모여 시위를 하려 했으나 미리 출동한 경찰과 학교 교직원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들의 시위 계획을 미리 탐지한 경찰은 정오부터 학생들이 거점으로 삼은 광무교 일대에 정사복 경찰과 교직원을 출동시켜 짝을 지어 모이는 학생들의 접근을 차단했으며, 차비를 주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기도 하였다. (『조선일보』1960. 3. 13 조3면 ; 『동아일보』1960. 3. 13 조3면,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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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부산에 “선거를 파괴하라”는 삐라 살포]
      12일 새벽 부산시 서부산경찰서 관할 지역에 “선거를 파괴하라”는 문구가 쓰여진 삐라가 뿌려졌다. (조선일보는“XX잃은 당, 공명선거하여 다시 찾자”는 등의 내용을 가진 삐라가 살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조선일보』1960. 3. 12 석3면).)

      서부산경찰서는 이를 좌익계열의 소행으로 보고 범인색출에 전력을 다하였다. 검찰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으로 본다고 발표하고 12일 오전 부산지검 선거담당 검사 2명을 서부산경찰서로 보내 직접 삐라의 내용을 검토한 다음 중대사건이라는 소견을 발표하였다. (『동아일보』1960. 3. 13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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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3
    • 서울 [서울에서 두 번째 학생 시위 발생]
      투표일을 이틀 앞둔 13일 일요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공명선거를 외치는 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를 파악한 경찰과 교직원들의 제지로 시위 규모는 크지 않았다.

      학생들은 일요일인 이날 시청 앞, 미도파백화점(현 명동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앞, 미국 대사관(현 서울시청 을지로 청사) 앞, 반도호텔(현 명동롯데호텔) 앞, 국제극장(현 광화문 동하면세점 위치) 앞 등 도심지에서 삐라를 뿌리고 구호를 외쳤다. 3월 5일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이날의 학생시위는 전날인 12일 이강학 치안국장이 “학생은 민주당의 사주에 움직이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12일 저녁부터 비상대기 하고 있던 경찰이 즉시 기마경찰과 백차 등을 동원해 시위를 제지하였다. 하지만 시위학생 다수는 현장을 지켰다.

      시위를 계획한 학생들은 정오 사이렌을 신호로 각처에서 일제히 궐기할 예정이었지만 정보가 미리 누설되어 사이렌이 울리지 않자 계획에 차질이 빚어져 산발적인 시위만 일어나게 되었다.

      13일 12시 정각 서울시 공관 3층에서 민주당 서울시당 확대 대회가 열리던 틈을 타 한 학생이 공명선거를 호소하는 띠를 한쪽 어깨에 메고 로프를 타고 2층 발코니로 뛰어내렸다. 그는 “백가지 공약보다 한가지 공명선거”라고 쓴 100여 장의 삐라를 뿌리고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쓴 플래카드를 펼쳐 발코니 끝에 걸쳐놓았다. 경찰과 시공관 직원은 학생을 쫓았고 약 5분간 발코니 위에서는 학생을 쫓으려는 경찰과 추격전이 벌어져 수 백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특히 오후 12시 30분에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이라는 영화 상영이 예정되어 있어 시공관 앞은 평상시보다 혼잡한 상황이었다. 삐라를 뿌린 학생은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 사이 삐라와 플래카드는 경찰과 교사들이 모두 수거해 갔으며 경찰들이 즉시 출동해 모여있던 군중들을 강제 해산하였다.

      12시 10분경엔 학생 약 100명이 중앙우체국 앞에 집결하였다. 이들 학생들은 교모를 손에 들고 명찰도 떼고 “학생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미도파백화점까지 행진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명동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증파된 경찰들은 학생들을 2-3명씩 시발택시에 실어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시위와 거의 동시에 ‘전국학생구국총연맹’의 깃발을 단 차가 나타나 “학생은 정치운동에 참가지 말자!”고 마이크로 선전하였는데, ‘유석 학생동지회 발기준비위원회’라고 자처하는 지프차도 나타나서 “민주당 신파는 학생을 선거에 이용물로 하고 있다”고 외쳤다. ‘아주(亞洲)청년동지회’라고 표시한 차도 등장해 “정권 야욕의 도구로 학생을 선동 이용치 말라”고 외쳤다. 경찰은 이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12시 25분경엔 을지로 입구에서부터 미 대사관을 향해 학생 50여 명이 산발적인 시위를 시도했지만 반도호텔 정문 앞에서 대기 중인 사복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수 명의 학생을 연행하였다. 그리고 약 20분 후엔 시청 건너편에서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려 했으나 역시 경찰에 의해 즉시 해산되었고 7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자유당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플래카드를 두른 ‘국정연구회 청년부’의 차가 “학생은 학원으로 돌아가라”며 학생의 정치참여를 욕하면서 지나쳤다. 이 광경을 본 5- 6명의 고등학생이 그 차를 덮쳐 마이크를 쥔 청년과 격투를 벌였다. 주변에는 학생 여러 명이 서성대고 있었으나 경찰 약 50명이 출동하여 학생들을 강제해산하였다. 이날 시청 앞에서는 오전 11시부터 정·사복경찰관들과 서울시 교육위원회 장학사들까지 동원되어 삼엄한 경계를 폈으며 덕수궁은 임시 휴관하는 등 학생들의 시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밖에 국제극장 앞에도 오전 11시 50분경부터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지만 정오 사이렌이 울리지 않고 경찰의 감시가 삼엄해 오후 1시경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연세대학교 입구 굴다리 앞에는 “학도들이여 일어나자!”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격문이 나붙어 학생들의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날 시위로 서울 곳곳에서는 경찰이 통행하는 학생들까지 붙들어 신분증을 조사하는 등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13일 하루 동안 남대문경찰서와 중부경찰서에 41명의 학생이 연행되었으나 같은 날 모두 석방되었다. (『조선일보』1960. 3. 13 석3면, 1960. 3. 14 석3면 ; 『동아일보』1960. 3. 14 조3면, 1960. 3. 15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87-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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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산 [오산고등학교 학생 100여 명, 학원의 자유 외치며 시위]
      13일 오전 11시 30분경, 오산고등학교 학생 100여 명은 장날을 이용해 장터 근처에서 “학원의 자유를 달라”, “우리는 좌시할 수 없다”, “우리가 앞서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바로잡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급히 출동한 경찰에 의해 시위대는 30분 만에 해산되었고 시위에 참가한 학생 수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91, 106쪽 ;『 동아일보』1960. 3. 15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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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 [문경고등학교, 시위 모의 실패]
      13일 오후 7시경 경북 문경 점촌읍 흥덕리 문경고등학교 학생들은 33명의 발기로 삐라 1천 매와 플래카드 10매를 만들어 시위를 계획하였지만 사전에 발각되었다. 경찰은 삐라와 플래카드를 모두 압수하고 주모자를 연행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은 “선량한 동민들이여, 협잡선거에 속지 말라”, “공정선거 이룩하여 민주국가 이룩하자”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만들고 지방 유지들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작성하기도 하였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91쪽 ;『 동아일보』1960. 3. 15 석3면)

      학생들이 밝힌 시위 도모 원인은 문경 지역 3·1절 기념식에서 국회의원들과 기관장들이 자유당을 선전하는 축사를 계속하며 3·1정신을 모독하고, 강연을 빙자하여 자유당 선전을 자주 열어 학생들을 정치도구화 했다는 것이었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107-117쪽)

      [문경고등학교학생이 지방 유지들에게 보내는 결의문]

      <지방유지 여러분에게 드림>
      세기의 대기를 호흡하며 맥맥(驀驀)히 약진하는 이 땅에서 오늘도 내 고장 ‘문경’을 좀 더 훌륭히 만들이 보겠다는 일념으로 분망하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나날이 세계의 변조에 그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에 언젠지 그 한 모서리에 불의의 싹이 엄청나게 자라고 있으니 이 무슨 불행한 일이며, 세계의 전모는 민주주의 최대 이상을 실현코자 지양하고 있는 이때에, 어째서 우리의 조국 대한에서는 백성들의 비가(悲歌)가 높습니까?

      민주주의의 두드러진 ‘심벌’이요 국민 참정권의 가장 존귀한 것이 선거인데도, 지금 닥쳐온 3·15정·부통령선거에 생각조차 못할 부정들이 속속들이 밝히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며 한심한 일입니까. 이제 우리 문경고등학교 400학도는 하나같이 단결하여 민주주의의 성스러운 표제에 좀먹고 있는 악의 씨에 아니 그들의 위선적 온갖 정치행각에 굳센 항의를 하려는 것입니다.

      이론과 실제가 틀린다는 것은 잘 압니다. 허나 이렇게 학교와 실사회가 저어되는데 대하여 경악해 마지않습니다.

      여러분으로부터 저희들의 이번 행동이 부당하다고 비난이 있을 것이요, 또는 어떤 불순분자가 있어 우리들을 배후조종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만,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양심의 진지한 명령과 정의에 입각한 정도를 쫓아 어떤 정당에 편재된다거나 도시 학생들을 무의하게 모방한다는 의미는 추호도 없으며 비록 시골에 치우쳐있는 저희들이나 국가를 사랑하고 민주주의 선봉이 되어야 한다는 굳은 결의로서 이 고장 순진한 농민에게 이런 수단을 써서라도 계몽해야겠습니다.

      다만 저희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꺼려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시나마 사회질서를 소란케 한다는 것이 미안할 뿐입니다.

      저희들 이 어린 양들의 순진한 아우성을 들으시어 십분 이해 계시기를 기다리면서 향토 발전에 보다 큰 심혈을 기울여 주시기를 빌겠습니다.

      단기 4293년 3월 14일
      문경고등학교 전교생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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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4
    • 시위 상황 개요
      선거를 하루 앞둔 14일 서울, 부산, 포항, 인천, 원주 등지에서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서울에서는 밤 9시를 전후하여 1천여 명의 학생들이 공명선거를 외치며 인사동, 종로, 광화문, 서대문 등지에서 삐라를 뿌리며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한사코 이들을 막는 경찰과 충돌하여 유혈사태를 빚고 약 300명의 학생들을 연행하였다.

      부산에서도 오후 6시 고등학생 600여 명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부정선거를 배격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포항에서는 학원의 자유를 외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으며, 원주에서도 공명선거를 외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밤 10시 30분경엔 인천에서 30여 명의 고등학생이 공명선거를 주장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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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서울 시내 고등학생 1천여 명, 공명선거 외치며 시위 전개]
      중동고등학교, 대동고등학교, 균명고등학교, 경문고등학교 등 10여 개의 야간 고등학교 학생이 주동한 시위가 14일 밤 9시를 전후하여 인사동 입구·화신백화점 앞·광화문 네거리·서대문 로터리 등 서울시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른 저녁부터 경찰과 교원들은 길거리에서 학생들의 귀가를 종용했으나 저녁 8시를 전후하여 삽시간에 모여든 학생들은 100명씩, 50명씩 떼를 지어 삐라를 뿌리고 구호를 외쳤다. 횃불을 들고 스크럼을 짜서 거리를 행진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날 밤 시위는 횡적 연락없이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류시경 국장 진두지휘 아래 미리 배치되어 있던 경찰 300여 명은 방망이와 백차로 시위대를 강제해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밤 9시, 종로 화신백화점 앞 거리에 대동상업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이 책가방을 옆에 끼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를 쓴 삐라를 뿌리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리 배치된 경찰은 학생들을 즉시 해산시켰다. 화신백화점 앞 시위에 참가해 경찰봉으로 머리를 맞아 파열상을 입은 한 야간 고등학교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은 등교해서 즉흥적으로 시위를 하기로 했고, 약 300매의 삐라를 써서 종로 입구로 나왔으나 경찰들이 너무 많아 광화문 네거리까지 뛰어나와 구호를 외친 학생은 4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이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기 위해 시위를 했다고 밝혔다.

      밤 9시 20분경엔 세종로 네거리에서 균명고 학생 약 200명이 “공명선거”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역시 경찰에 의해 5분 만에 강제 해산되었다. 경찰은 약 30명의 학생을 연행하였다.

      이날 약 2시간 동안 경찰에 연행된 학생은 300명이며 시위에 참가한 학생은 총 1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한편 밤 10시경 서울시경은 서울지검에 사건 개요와 다음과 같은 학교별 검거인원을 보고하였다.

      ●균명= 50명 ●경문=28명 ●중동=37명 ●대동=52명 ●배재=1명 ●수송=1명 ●선린=3명 ●경기=2명 ●보인=2명 ●조양=1명 ●중앙=1명 ●대신=1명 ●경동=1명 ●합계180명, 현재 주모자 11명 취조 중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92-94쪽 ; 『동아일보』1960. 3. 15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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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부산시 진구에서 고등학생 600여 명 시위]
      선거 하루 전날인 14일 부산 시내 고등학교는 갑자기 학생들에게 등교 중지를 지시하였다. 학교 당국과 도 학무당국은 16일까지 신입생 시험기의 혼잡을 피하기 위해 내린 조치라고 변명했으나 학생들의 시위를 방지하기 위한 방책임이 분명하였다. 또한 이날 아침 교통순경들은 헌병들로 대체되었으며 경찰은 최루탄을 준비하였다.

      이같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오후 6시 부산의 동래고등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항도고등학교, 북부산고등학교, 영남상업고등학교, 데레사여자고등학교 등의 학생 약 600여 명이 부산시 진구 범천동 로터리에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시작했다. (약 100명의 학생이 참가했다는 기술도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94쪽).)

      학생들은 “공산당식의 테러를 우리는 배격한다”, “우리 선배는 썩었다”, “우리가 민주제단 지키자”, “학도여 일어나라, 우리의 피를 보이자”, “학도는 살아있다, 민주국가 세우자”, “학원에 강제선거운동을 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삐라 수 백 매를 살포했다. 경찰은 이들을 강제해산하고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 5명을 포함한 16명을 부산진구경찰서로 연행했다. 시위를 제지하던 경찰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또한 해동고등학교 학생 약 20명은 밤 9시 20분쯤 시내 동성동 현대극장 뒷골목에서 “학도여 일어나라”, “민주주의 수호하자”라는 삐라를 뿌렸으며 이들 중 2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또한 부산상고 학생 7-8명과 동아고등학교 학생 3명, 건국고등학교 학생 1명 등은 14일 아침 대신동 운동장 부근에서 시위를 모의했으나 사전 탄로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조선일보』1960. 3. 15 조3면 ; 『동아일보』1960. 3. 15 조3면,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94-95쪽 ; 조화영 편, 『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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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 [포항고등학교, 학원 자유 외치며 시위]
      14일, 포항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은 오후 6시경 수도산에 집결해 덕산동을 거쳐 중앙로터리에 이르는 30분 동안 “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외치며 시위했다. 경찰은 이들을 해산하고 시위에 가담한 학생 40여 명을 연행하였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96쪽 ; 『동아일보』1960. 3. 15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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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 [원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 공명선거 요구 시위]
      14일 오후 4시경 원주시내 원성군청 앞에서는 약 100명의 원주농업고등학교 1,2학년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하였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원주 군인극장 앞까지 약 30분 동안 “수호하자 인권”, “취소하자 3인조”, “실시하자 공명선거” 등의 구호를 외치고 삐라를 뿌렸으나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되었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96쪽 ; 『조선일보』1960. 3. 15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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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송도고등학교 학생들, “학도여 일어나라”]
      13일 밤 10시 30분경, 인천 송도고등학교 학생 약 50명이 성산교회 앞에서 “학도여 일어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공명선거를 시행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원래 정오 경 시위를 계획하였는데 경찰에 의해 좌절되고 오후 7시에 재차 시위를 도모하였지만 이마저도 좌절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끈질기게 시위를 계획하고 이날 밤 드디어 시위를 감행했다. 송도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하자 시위대 주변으로 다른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약 200명 가량이 되었고 약 10분간 시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며 송도고 학생을 연행했다. 이날 경찰은 시위가 더 있을 것이란 정보에 따라 수 백 명의 경찰관과 각 학교 교사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통행하는 학생들을 검문하였다. (『동아일보』1960. 3. 15 석3면. 시위가 오후 9시 30분에 발생하였고 참가 학생도 50명이라는 기술도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95쪽). 조선일보 는 인천지역 시위는 사전에 탄로되어 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지 못했다고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3. 15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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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5
    • 시위 상황 개요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선거부정 속에서 치러졌다. 선거일 이전부터 민주당 추천 선거위원과 참관인들에 대한 납치와 폭행, 매수가 자행되었다. 선거 당일 투표소에서도 민주당 참관인들은 입장을 거부당하거나 폭행 또는 축출 당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자유당 완장부대와 반공청년단원 및 신원을 알 수 없는 괴한들이 경찰의 묵인 하에 유권자와 취재기자까지 폭행하였다.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 시간제 투표, 대리투표, 무더기 투표가 곳곳에서 자행되었고, 많은 기표소가 안에서 보이거나 가림막이 찢어져 비밀투표가 보장되지 않았다.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 방장이나 동사무소로 몰려와 항의하는 유권자들도 있었다. 부정행위에 대한 시정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참관인을 비롯하여 민주당원에 대한 테러로 계속해서 부상자가 발생하자 민주당 지방당에서는 독자적으로 선거포기를 발표했다. 결국 민주당 중앙당은 선거 종료 30분을 앞둔 오후 4시 30분 ‘3·15선거 불법·무효’를 선언했다. 이에 대해 정부·여당은 민주당의 선거 불법·무효선언은 법적인 효력이 없으며, 국민의 주권행사에 대한 심판결과를 거부하는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한편 마산에서는 오후 2시 무렵 민주당원들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감행했다. 평화적인 시위행진에 수 천 명의 군중들이 호응했다. 경찰은 민주당 간부진을 강제로 연행했고, 시민들은 오후 6시 무렵에야 해산했다. 밤이 되자 학생과 시민들이 마산시청과 파출소 등지로 모여들었다. 시위는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물을 뿌렸고 이에 대항하여 시위대는 돌을 던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를 발사하다가 오후 8시 무렵 실탄을 발사했다.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내는 정전상태였고, 북마산파출소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무학국민학교 앞길로 모였다.

      밤 10시가 넘어서자 도경 진압부대가 도착했다. 경찰은 다시 공격태세로 전환하여 최루탄과 실탄을 발사했다. 시위대는 돌, 막대기, 유리병 등을 던지며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밤 11시 무렵 시위는 진압되었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일부 시위대도 새벽 2시 30분경에는 경찰에 의해 체포되거나 도망쳤다. 경찰은 시위대 이외에도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연행했다. 연행된 이들은 감금된 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마산 이외에 광주와 진주, 부산, 포항, 서울 인사동 등에서도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발생했다. 광주에서는 민주당원들의 ‘민주주의 장송’ 시가행진이 있었으며, 진주에서는 민주당원들의 침묵 시위행진이 있었다. 서울과 부산에서는 민주당 사무실 앞에 모여든 군중들을 경찰이 무력을 동원해 강제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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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민주당 마산시당 선거포기 선언]
      민주당 마산시당에서는 15일 오전 10시 30분 선거포기를 선언하였다. 민주당 마산시당 부위원장 강경술은 “합법선거 수행이 불가능함으로 눈물로써 선거를 부인한다”며 선거포기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산일보』에 실린 선거포기 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거포기는 중앙당이나 경남도당에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마산시당에서 독자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마산시당 본부에서는 민주당 정·부통령선거 마산시대책위원회의 이름으로 ‘선거부인공고’ 벽보를 붙였다. 마산시당은 선거포기 선언과 함께 마산시 전 투표구에 배치되어있는 민주당 참관인을 일제히 철수시켜 당 본부로 소집하였다. (『마산일보』1960. 3. 16 2면 ; 『동아일보』1960. 3. 16 조3면 ; 조화영 편, 『사월혁명 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9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23-124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289-293쪽)

      [성명서]

      민주당 마산시당의 선거 포기>
      3월 15일 개시된 정·부통령선거에 있어서 민주당 마산시 선거대책위원회는 자유당의 갖은 불법·무법·암흑선거 자행에 대하여 이 이상 합법적 선거를 수행할 수 없는 절망적 사태에 처함에 3월 15일 상오 10시 30분을 기하여 만부득이 선거를 포기함을 엄숙히 성명한다.

      [선거 부인 사유]

      1. 민주당 선거구 선거위원 및 참관인의 강제축출
      2. 민주당 추천 투표구 선거위원 및 참관인의 기능발휘 불능
      3. 투표소 내 선거공무원의 노골적인 투표간섭
      4. 친야계의 대부분 선거인에 선거권(번호표) 불 배분
      5. 투표소 구내 자유당 완장부대가 난립하여 자유분위기가 파괴
      6. 3인조 공개투표
      7. 완장 미착용자의 투표소 출입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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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민주당원들 시위행진]
      오후 1시경 민주당 출신 정남규 도의원과 동아대학생 안종성은 당사 앞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민주당 마산시당의 선거포기 경위와 부정선거의 실상을 밝히는 방송을 했다. 그 후 1시 30분경 민주당 경남도당에서 “불법 폭행이 지배하는 선거를 이 이상 지속하여 국민 유권자들의 희생을 더 내게 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중앙당에서는 끝까지 선거를 포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경남도당은 참관인을 비롯한 민주당원들에 대한 테러가 계속돼 부상자가 발생하자 결국 선거를 포기하고, 투표소에서 참관인 전원을 철수시켰다.

      오후 2시 무렵, 마산시당 앞에서부터 불종거리에 모여 있던 시민들 사이로 민주당 창원 을지구당 선거부장 등이 앞장서서 “3·15는 부정선거다!”, “협잡선거 다시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그러자 더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와! 와!” 함성을 지르며 모였다. 이러한 시민들의 호응에 시당에서는 선전용 지프를 앞세워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당사 앞에서 좌절되었다. 마산경찰서장 손석래는 지프 위에 올라가 시민들의 귀가를 호소했다. 이때 한 학생이 서장이 쥐고 있던 마이크를 빼앗으려 달려들었고, 경찰은 그 학생을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했다. 이를 목격한 군중들이 흥분하자 경찰들은 철수하였다.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3-294쪽)

      오후 3시 40분경 (『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 『마산일보』1960. 3. 17 2면 ; 대한변호사협회, 「마산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대한변협 오십년사』, 2002, 819쪽 ; 김재희 편, 『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71쪽. 일부 기록은 오후 3시 45분 경으로(조화영 편, 29쪽), 일부 기록은 오후 3시 반 경으로『( 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안동일·홍기범 공저, 124쪽), 일부 기록은 오후 4시 경으로『( 조선일보』1960. 3. 16 조1면), 일부 기록은 오후 3시 경으로(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51쪽), 반면 일부 기록에는 오후 2시 30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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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시위대의 돌팔매질과 경찰의 진압]
      민주당 사무실 앞으로 몰려드는 시민들은 더욱 늘어났다. 이들은 스리쿼터가 달린 방향인 남성동파출소 쪽으로 밀려갔다. 시위 대열이 남성동파출소 앞에 이르렀을 때, 대기하고 있던 소방차가 시위대 선두에 선 학생들을 향해 소방호스로 물을 뿌렸다. (시위 대열에 참가한 군중들의 80%가량은 11세부터 20세가량의 학생 및 청소년들이었다고 한다『( 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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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남성동파출소 앞에서 경찰 발포로 사상자 발생]
      해산된 것으로 보이던 시위대는 오후 7시경 다시 오동동 민주당사 앞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청년 학생들과 일부 시민들은 삽시간에 동보극장에서 민주당 시당부에 이르는 길을 메웠다. 번화가인 이곳은 시위군중보다도 구경나온 사람이 더 많았다. 7시 30분경이 되자 400-500명에 달하던 군중은 곧 1천여 명이 되었다. 몇몇 청년들이 “파출소로 가자!”고 외쳤다. 군중은 움직이기 시작하여 불종거리를 거쳐 남성동파출소 쪽으로 행진하였다. 청년들이 맨 앞에 서고 수많은 학생들이 뒤따르면서 대규모 행렬이 되었다. 시위대가 남성동파출소에 이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소방차가 물을 뿌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부정선거를 즉시 중지하라!”고 외치면서 남성동파출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졌다. 여학생들은 근방에서 돌을 나르고 주로 남학생들이 그것을 받아서 던졌다. 그러던 중 전기가 꺼져 시내는 암흑으로 뒤덮였다. 소방차는 물론이고 남성동파출소의 창문과 기물 등이 시위대의 돌팔매에 파손되었다.

      경찰은 오후 8시 무렵 돌을 던지는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어진 경찰의 실탄 사격으로 앞에 섰던 고등학생 한 명이 쓰러졌다. 경찰의 발포에 극도로 흥분한 군중은 더욱 격분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수 차례 외쳤다. 더욱이 파출소를 비롯하여 자유당 시당부도 습격하여 사무실 집기, 비품 등을 때려 부수고 공문서 서류 등을 찢었다. 경찰의 발포와 시위대의 투석은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 했다. 전면에 있던 많은 학생들이 총상을 입었다. 실탄사격이 계속되자 시위대의 일부는 북마산 방면으로, 다른 일부는 개표장소인 시청으로 밀려갔다. (『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 대한변호사협회, 820쪽 ; 이강현 편, 51-52쪽 ; 김재희 편, 71-72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25-126쪽 ; 마산일보사, 『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1960, 30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52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6-297쪽)

      그 시각 남성동파출소 앞에서 나온 사상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망자 : 오성원
      ●총상자 : 강윤경, 강형준, 구본수, 김경춘, 김기철, 김동섭, 김라자, 김생종, 김이철, 김정수, 김종근, 문채영, 박정명, 박판규, 서동호, 이동섭, 이신자, 정갑주, 조승래, 진병열, 최명준, 한 압, 황 청 등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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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마산시청 앞 투석전에서 여학생들 돌 날라]
      개표장소인 시청입구는 경찰병력이 겹겹이 에워싸고 엄중경계 중이었다. 오후 7시에 시청 옥상 스피커를 통해 개표 시작 방송이 나왔다. 이미 경찰들은 아스팔트 길 양편으로 곤봉을 들고 늘어서 있었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시청 주위를 맴돌자 경찰은 “학생들은 돌아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학생 중 한 명은 “왜 돌아가라는 거요? 시민이 의무를 당당하게 치렀으니 그 대가인 권리가 엄연히 부여되어 있는데 왜 개표 결과를 들을 수 없단 말입니까?”하고 반문하였다.

      오후 6시 40분경부터 무학국민학교 앞에 집결해있던 학생들은 7시가 넘어서자 “부정선거 다시 하라!”, “협잡선거 물리치자!”, “내 표를 내놔라!”, “우리의 주권을 찾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남성동에서 시청 방면으로 올라오던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청을 향해 전진했다. 시위행렬이 시청 쪽으로 다가오자 일렬로 늘어선 5대의 소방차에서 헤드라이트가 강렬하게 비추더니 곧 물이 살포되었다. 이에 시민들도 소방차를 향해 투석을 하기 시작했다. 부녀자, 특히 많은 여학생들이 마진선 철길에 깔려있는 자갈을 치맛자락에 담아 운반해왔다. 그 돌로 남학생들과 시민들은 돌팔매질을 하였다. 경찰과 시위대의 간격은 50미터에서 150미터까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이라는 가사의 ‘해방의 노래’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는 가사의 ‘전우가’를 부르기도 했다. 시위대의 일방적인 투석세례에 몇몇 경찰들도 시위대 쪽으로 돌을 던졌다. 그러던 중 소방차 한 대가 헤드 라이트를 켜고 호스로 세찬 물을 살포하면서 군중을 헤치며 지산동 철교 앞길을 향해 속력을 내어 돌진했다. 시민들은 길을 비키면서도 소방차를 향해 투석을 멈추지 않았다. 운전수가 돌에 맞아 차에서 뛰어내리자 소방차는 무학국민학교 정문 앞 전주를 들이받았다. 그때 폭음과 함께 시내 일대가 일시 정전되었다.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8-300쪽 ; 마산일보사,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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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경찰, 시청 앞 정전으로 암흑 속에서 무차별 사격 감행]
      오후 7시 30분경 전 시내가 암흑으로 뒤덮이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날 풍향이 반대방향이어서 별 효과가 없었다. 8시 무렵에는 실탄 사격이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소방차가 들이받아 넘어진 전주를 이용해 판자 등으로 방어벽을 만들었다. 경찰은 전주 뒤쪽에 숨은 시위대의 투석을 피하면서 30미터 거리에서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다. 총성이 울리는 밤하늘은 수 십 발의 조명탄으로 환했다. 총상을 입은 사상자는 거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긴박한 순간에도 시체를 수습하겠다고 나선 학생들이 있었으며, 부상당한 동료를 업고 도립마산병원으로 운반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도립마산병원 옆 골목, 남전 옆 골목, 장군동, 자산동, 신포동 등지로 흩어져 피신했다. 경찰은 골목길로 달아나는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개머리판으로 때렸으며, 학생을 찾으러 나온 가족까지 구타하고 연행하였다. (『마산일보』1960. 3. 17 2면 ; 대한변호사협회, 820-821쪽 ; 조화영 편, 33-34쪽 ; 김재희 편, 72-73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27-128쪽 ; 마산일보사, 28-30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00-302쪽)

      이 당시 시청 부근에서의 발포로 인한 사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망자 : 김영준, 김영호, 김주열, 김효덕
      ●총상자 : 김안윤, 김흥대, 문동근, 박철영, 변승기, 송정명, 이원자, 장용식, 정달수, 조명제, 조삼용 등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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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북마산파출소, 화재로 전소]
      남성동에서 북마산 방면으로 후퇴한 군중은 북마산파출소로 향하던 중에 도로 주변에 있는 점포와 사무실 등에 불을 끄라고 경고했다. 이에 불응하면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쉈다. 경찰에 얼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등화관제를 요구한 것이었다.
      큰 도로를 따라오던 시위대와 상남천 옆 양측 좁은 도로로 오던 시위대는 북마산파출소 옆 상남교(현 성남교)에서 합류하였다. 북마산파출소는 이들로 인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시위대는 경찰대에 의해 다리에서 행진이 제지되었다. 파출소 내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집총자세를 취한 경찰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위대는 경찰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파출소로 뛰어들었고 경찰의 총격에 쓰러졌다. 이와 동시에 시위대의 투석과 경찰의 실탄사격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실탄사격에 파출소 뒤 후면도로에서 시위를 벌이던 일부는 골목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경찰의 사기는 한풀 꺾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경찰 2명이 뒷담을 통해 도주했다. 시위대는 파출소에 돌을 던졌고 한 무리는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즈음 북마산파출소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발생의 원인으로 대한변호사협회는 정전 후에 파출소에서 석유램프를 켜 놓았던 것이 시위대의 투석에 의해 넘어지는 바람에 실내 기물에 점화되어 발생했다는 것이 가장 근거 있다고 판단했다(대한변호사협회, 820쪽). 일부 기록은 시위대가 북마산파출소를 습격할 당시 구마산 일대에 전기가 나갔고, 경찰이 불 꺼진 지서에서 호롱불을 켜고 시위대와 대결하다 후퇴할 무렵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또한 일부 기록은 시위대의 한 무리가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 난로에 비품 등을 던지다가 화재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반면 일부 기록은 파출소 내 한 가운데 있던 난로가 왈칵 밀려드는 시민들의 발길에 채여 넘어졌고 이 바람에 바짝 마른 목조건물의 파출소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3·15 의거사 편찬위원회, 305쪽).)

      북마산파출소 부근의 충돌로 인한 사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망자 : 김삼웅, 김용실, 전의규
      ●총상자 : 김정세, 김정희, 남우익, 유경옥, 전이태, 조현대, 하병렬, 한순국 등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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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시위대의 도심 유혈전과 허윤수 집 습격]
      창동 사거리는 남성동파출소의 총격으로 후퇴한 시위대와 불종거리에서 밀려오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남성동파출소 10여 미터 전방에는 무장경찰들이 집총자세로 대오를 지어 서 있었다. 그래도 시민들은 “나가 싸우자”고 외치며 남성동파출소로 접근해 들어갔다. 전조등을 밝게 켠 지프가 전진해오면 물러섰다가, 다시 전진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던 중 지프가 속력을 내어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무장경찰들이 발포를 했다. 시위대는 골목으로 도망치거나 담벼락에 붙어 총을 피했다. 시민극장 부근에서는 또 한 명의 사망자와 수 명의 총상자가 발생했다. 시위군중이 쫓겨 간 뒤에도 가장 많이 총이 발사된 곳이 시민극장 부근이라는 증언도 있었다. 오후 9시가 훨씬 넘어서까지 총성은 계속됐다. 총성이 그치자 경찰들은 시민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증원된 병력으로 카빈총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며 청년과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하였다. (마산일보사, 3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02-303쪽)

      신마산 쪽에서는 자유당 마산시위원장 허윤수 집과 마산시장 박영두 집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가족들이 피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특히 허윤수의 집은 기둥이 쓰러져 기와지붕이 내려앉았고 가구 등도 파괴되었으며 방과 마루에 분뇨가 끼얹어졌다. 허윤수는 1958년 5월 2일 실시되었던 제4대 민의원총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자유당 김종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0년 1월 6일 민주당을 탈당해 22일 자유당으로 입당하여 마산 시민들에게 변절자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시청 안에서 시위 소식을 듣고 경찰 책임자에게 군의 출동을 요청하고 모두 사살하라고 발언했다하여 더 거친 습격을 받았다.

      한편 북마산파출소에서 오동동파출소로 향하던 시위대는 도중에 서울신문 마산지국과 국민회 사무실을 습격하여 창문과 비품 등을 파손하였다. 또한 구(舊)마산 일대의 정전이 남선전기 주식회사의 고의적인 처사라고 생각하여 남전을 습격, 유리창을 남김없이 파괴하였다. 오동동파출소에 다다른 약 200여 명의 시위대는 파출소 앞 약 80미터 지점에 있는 다리에서 경찰의 사격으로 저지당하여 흩어졌다. (『동아일보』1958. 5. 4 석1면, 1960. 1. 7 석1면, 1960. 1. 23 석1면, 1960. 3. 16 석3면, 1960. 3. 17 조3면 ; 김재희 편, 73쪽 ; 마산일보사, 32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28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53쪽 ; 대한변호사협회, 82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81. 297. 302-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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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마산시청 앞 격전과 시위대의 해산]
      시청 앞에서 밀려난 청년과 학생들을 비롯해 창원군청, 남성동파출소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던 시민들은 무학국민학교 앞길로 서서히 모였다. 이들은 넘어진 전주에 시멘트로 된 방화수용 물통과 드럼통 등을 이용해 방어벽을 만들었다. 200여 명의 여학생들은 마진선 철길에서 돌멩이를 치마에 담아 운반하였다. 인근 신포동에 사는 부녀자들은 시위 군중에게 식수를 나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BBS (Big Brothers and Sisters movement. 불우 청소년, 문제·비행청소년과 결연하여 이들을 선도하고자 하는 청년운동. 1904년 미국 뉴욕에서 BBS 운동이 처음 시작된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펼쳐졌다.)

      시위대는 “이것이 공명선거인가?”하고,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경찰은 이미 시위대의 동태를 파악하고 경비망을 폈다. 창원, 진해, 함안, 김해, 고성 등 인근 경찰서로부터 지원병력이 속속 모여들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는 도경 진압부대 150~200여 명도 도착했다. 경찰은 공격태세로 전환하여 소방차로 물을 뿌리는 한편 최루탄을 발사하고 소총도 쏘았다. 시위대는 돌, 막대기, 쇠조각, 유리병 등으로 맞섰으나 경찰의 실탄 난사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찰이 무학국민학교 정문 앞에까지 다가와 총격을 가하던 중 무장경찰을 태운 지프 한 대가 시위대가 만든 방어벽을 뚫고 돌진해 왔다. 지프가 장애물에 걸려 멈칫하는 사이 시위대가 달려가 카빈총 1정을 탈취하였다. 이에 당황한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남은 청년과 학생들은 무학국민학교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기고 돌을 던졌다. 경찰은 학교 담장과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서 실탄 사격을 계속했다. 밤 11시경 시위는 진압되었다. (『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 이강현 편, 53쪽. 일부 기록은 밤 12시 3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마산일보』1960. 3. 17 2면).)

      무학국민학교 담 뒤에서 투석전을 벌이다 추산공원으로 도주한 청년과 학생들 70여 명은 화장막 고개에서 창원군청과 허윤수 집을 습격하고 오는 시위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새벽 1시 무렵 용마산 마루에 재집결하였다. 남은 이들은 거의가 청년·학생·빈민층 소년들이었다. 시위대는 무학국민학교 앞에서 탈취한 카빈총을 앞세우고 고려모직회사 쪽을 향해 내려왔다. 경찰은 이들의 동향을 이미 파악하고 무술경관 10여 명을 대동하여 잠복해있었다. 새벽 2시 30분 무렵, 마지막까지 버티던 시위대 200여 명은 경찰과 맞닥뜨리면서 결국 도망가거나 체포되었다.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7. 308-309쪽. 일부 기록에서는 용마산에 집결한 약 200명의 시위대가 성호동 교회의 의자를 모아 불을 질러 경찰의 포위에서 벗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조화영 편,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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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연행자들에 대한 경찰 고문]
      경찰에 체포된 시위자들은 남성동파출소로 끌려가거나, 마산시청 지하실에 임시로 구금되었다. 연행된 사람들 가운데는 가족을 찾으러 나왔거나 귀가 중이었던,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도 많았다. 이들은 감금된 채 고문에 시달렸다. 경찰 외에 폭력배들도 고문에 가담하였다. 이미 경찰봉에 맞고 차에 치어 골절상을 입었거나 총상 등으로 호흡이 곤란하고 실신상태에 있는 연행자들에게까지 고문이 이루어졌다. 고문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대와 곤봉, 야전침대 막대기로 구타하고 군화발로 밟았다. 두부를 난타하여 두개골이 터져 뇌장이 흘러내리기도 했고, 대퇴부가 부러진 이들도 있었다.
      ●다리 사이에 나무막대기를 끼우고 무릎을 꿇리고 발로 밟고 올라서서 구타하였다.
      ●수갑이 채워진 손을 졸라매고 혈맥이 통하지 않도록 하여 손등을 곤봉으로 때렸다. 수갑을 채운 부분에 혈관이 끊어진 이들도 있었다.
      ●수갑을 채워 책상에 묶어놓고 수갑에 줄을 매어 맞은 편에서 끌어당기고 줄과 책상 사이에 주판을 세워 끼우고 막대기로 줄을 두드리면서, 거문고(혹은 기타)로 곡조를 맞춰 탈 테니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면 노래를 부르라고 하고 곤봉으로 장단을 맞추면서 구타하였다.
      ●입에 휴지를 말아 재갈을 물리고 어깨는 줄로 매어서 수갑을 채운 채 천장에 매달았다.
      ●쇠고랑을 채운 채로 담뱃불로 혹은 쇠붙이를 달궈 정강이를 지졌다.
      ●코로 물을 먹였다.
      ●10여 시간에서 다섯 끼까지 음식물을 지급하지 않았다. 배고픔과 갈증을 참다 못해 이를 요구하면 빨갱이라는 등의 폭언과 함께 구타하였다. 사식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이를 경찰이 가로채 먹었다. (『한국일보』1960. 3. 18 석3면 ;『 동아일보』1960. 3. 27 조3면 ; 마산일보 사, 36-38쪽 ; 대한변호사협회, 822. 828-829쪽 ; 조화영 편, 40-4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08. 330-335쪽)

      환자나 피검자를 면회하기 위해, 혹은 행방불명된 자녀를 찾으려고 가족들이 병원 또는 경찰서에 찾아와 문의하면 경비하는 경찰관이 “너도 빨갱이냐”라는 등의 폭언과 함께 구타하였다. 남성동파출소에서는 경찰이 취재차 달려온 『국제신보』, 『민주신보』 기자들을 “여기까지 데모를 선동하러 왔느냐”며 3시간여 동안 감금시키고 구타하여 전치 2~3주의 부상을 입혔다. 경찰은 폭력적인 진압과 고문으로 심한 부상을 입은 자들을 바닥에 쓰러져있는 채로 방치하다가, 시청에 연행되었던 시위대원과 가족 중에 3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을 알자 16일 새벽 4시경에야 비로소 시체와 중상자를 도립병원에 수용하였다. (『마산일보』1960. 3. 17 2면 ;『 한국일보』1960 3. 16 석3면 ; 『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1960. 3. 19 조3면 ; 대한변호사협회, 828쪽 ; 조화영 편, 36-41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34쪽 ; 지현모 편, 『마산의 혼』, 한국국사 연구회, 1961, 58-60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08쪽)

      3·15고문 피해자 명단

      ●강문순 ●구판주 ●김규식 ●김동강 ●김동하 ●김상주 ●김수년 ●김수영 ●김은진 ●김재용 ●김정열 ●박계진 ●박동주 ●박만호 ●박복현 ●박세현 ●박우재 ●성수한 ●신말순 ●이복생 ●이성재 ●이양수 ●이용문 ●이일봉 ●이재열 ●이학우 ●정경운 ●정상숙 ●정순자 ●정종선 ●정현팔 ●제수종 ●조상봉 ●천봉화 ●천은순 ●천인중 ●최병찬 ●최익순 ●최종현 ●홍인표 ●황금은 ●황은수 ●해군문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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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인민공화국 만세” 쪽지사건]
      15일 밤 마산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 노장현 경위 등의 경찰들은 시위가 공산당의 선동에 의해 발생한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도립병원으로 향했다. 마산경찰서장 손석래 총경과 사찰계장 강상봉 경감의 지시로 노 경위 등은 “인민공화국 만세”, “이승만을 죽여라” 등을 적은 쪽지와 돌 부스러기를 시위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여 도립병원 시체실로 옮겨진 김영호, 김용실, 김효덕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노 경위는 12일 밤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영어시험 답안지 뒷면에 “백만학도여! 궐기하라”, “자유당을 때려 부숴라”라고 적은 삐라 100여 장을 뿌려 검거한 사실이 있었다. 압수 보관 중이던 이 삐라에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한 줄 더 적어 ‘불온쪽지’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경찰은 이 쪽지가 마산상고 2학년 김용실의 시체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경찰은 도립병원장 박정석에게 그 쪽지가 시체 호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요지의 시체검안서를 작성해달라고 요청했다. 박 원장은 검안서에는 사인만을 기입하는 것이고, 그 외의 사항은 기재하지 못한다며 거절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쪽지에 묻어있던 피와 김용실의 피가 일치하는지 검사하려 했으나 이미 경찰이 김용실의 시체를 화장한 후여서 확증을 잡지 못했다. 이후 5월 28일 부산지검은 쪽지사건에 가담하였던 경찰 윤광석, 김준석, 성낙서 3명을 무고혐의로 구속하고 노장현 경위를 지명수배 하였다. (『경향신문』1960. 5. 29 조3면 ;『 동아일보』1960. 5. 30 조3면, 1960. 6. 1 조3면, 1960. 6. 11 조3면 ; 조화영 편, 38쪽 ; 마산일보사, 113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13. 332-333. 374쪽 ; 지현모 편, 190-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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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광주시 민주당원들의 ‘민주주의 장송’ 시가행진]
      선거수행의 참관을 포기한 민주당 광주시당부는 15일 낮 12시 50분경 (안동일·홍기범 공저, 119쪽. 일부 기록은 낮 11시 45분으로(『 동아일보』1960. 3. 16 조1면), 일부 기록은 12시 45분으로『( 동아일보』1960. 3. 16 조3면), 『조선일보』는 12시 55분 경으로『( 조선일보』1960. 3. 15 석3면), 반면『서울신문』은 오후 1시로 기록하고 있다『( 서울신문』1960. 3. 16 조3면).)

      이 시위를 지휘하고 경찰에 연행되었던 민의원 의원은 “이번 선거는 경찰과 반공청년단으로 하여금 투표구를 포위하고 참관인을 구타 축출하고, 무더기표를 투입했으며 이의 신청을 요구해도 경찰이 선거위원장 명령 없이 참관인을 축출한 사실이 있다. 국민의 기본권 행사를 강도적 행위로 박탈하니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오늘로 살상 당했다. 본 당부는 민주주의 장례식을 평화적으로 거행하는데 경찰과 소방대를 동원하여 구타 부상케 했으니 치안책임자를 추궁하겠거니와 국회가 개회되면 생명을 걸고 투쟁하겠다”고 호소하였다.

      민주당 전남도당부에서는 이날 오후 5시 다음과 같은 ‘민주주의 장송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신문』1960. 3. 16 조3면 ;『 조선일보』1960. 3. 15 석3면, 1960. 3. 16 조1·3면 ; 『동아일보』1960. 3. 16 조1·3면 ; 『경향신문』1960. 12. 23 석1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19-120쪽)

      일련의 충돌사태가 있었던 광주거리는 투표가 끝난 뒤에도 무장경관의 삼엄한 경비에 놓였다. 오후 2시 장송시위 뒤부터 민주당 광주시당부 부근에는 수 백 명의 시민들이 저녁 늦게까지 떠나지 않았다. 정·사복경관들은 시민의 통행을 제한하고 특별감시를 계속하였다. 이날 밤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서석국민학교 주위와 경찰서 근방에도 첩첩이 둘러싼 정사복 무장경찰대가 감시하고 있었다. 특히 개표장 옆에는 낮에 장송시위에 동원되었던 2대의 소방차가 다시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심야에 이르기까지 광주 시내 거리의 순찰이 계속되었다. (『동아일보』1960. 3. 16 석2면. 동아일보는 민주당 시당부를 비롯한 광주 시내의 무장경비 강화를 3월 15일 마산 사태에 따른 중앙으로부터의 특별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보도했다.)

      [민주주의 장송 성명서]

      역사적인 3·15정·부통령선거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절명케 한 날이다. 자유당과 자유당 정부는 선거운동을 가지각색으로 방해하였으며 선거기간 중 본 도내에서 사람이 두 명이나 피살되었고 4할은 사전투표, 4할은 공개투표 그것도 부족해서 각 투표소에서 참관인을 강제 추출하는 등 민주주의는 완전히 도살 절명되고 말았다.
      우리는 울분을 품고 절명된 민주주의를 통곡하며 장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초당적인 애국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무장경관과 소방차를 동원하여 폭력, 물벼락으로 해산 저지하고 심지어 장송 행렬원을 구타 부상케 한 것은 천인공노의 준행인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시체 위에서 민주주의 소생을 위하여 불퇴전의 투쟁을 과감히 계속할 것을 이에 성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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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인사동 민주당 중앙당부 앞 시위]
      민주당은 15일 오후 3시 30분경 긴급 소집된 최고위원과 중요 간부들이 모인 확대간부회의에서 ‘3·15선거 불법·무효 선언’을 결정하고, 오후 4시 30분 ‘3·15선거 불법·무효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오후 4시 30분이 조금 지나 서울 시내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민주당 중앙당부 앞에 선거무효선언의 벽보가 붙자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후 6시 30분경 민주당에서 미리 설치되어있던 마이크를 통해 “3·15선거가 불법·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민주당 확대간부회의의 결과를 방송했다. 약 50명 정도였던 군중은 300명가량으로 늘어났다. 선언문 낭독이 잠시 중단되자 시민들은 “낭독을 계속하라!”며 만세와 고함을 지르면서 대통령 선거를 다시하자고 외쳤다. 민주당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나와 이를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후 6시 50분경 갑자기 경찰 백차 4대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들이닥치더니 경찰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경찰은 인사동으로 통하는 길에 차량통행을 차단시키고, 30여 명의 시민을 택시와 시발차로 연행해갔다. 이 와중에 7시 15분경 청년 2명이 시발택시 위에 올라가 “3분지 1 주지 말고 한국의 민주운명을 사수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곧바로 이들을 연행했다. 이 시위로 민주당 중앙당부 주변은 골목마다 정·사복경관들이 배치되었고 기마경찰대까지 동원되었다. (『서울신문』1960. 3. 16 조1면 ;『 조선일보』1960. 3. 16 조3면 ; 『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22-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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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민주당원들, 침묵 시위행진]
      15일 오전 9시 민주당 진주시당에서는 시내 각 투표소에서 민주당 추천 선거위원 및 참관인이 총 퇴장했음을 발표했다. 오후 1시경 김용하 외 9명의 민주당원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침묵 시위행진을 벌였다. (9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대권, 강명용, 이상술, 권무현, 홍수창, 송호숙, 임동규, 박영근, 김광철『( 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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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민주당 경남도당도 선거포기]
      민주당 경남도당은 15일 오후 1시 30분경 선거포기 성명서를 발표하고 마이크로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이에 자극된 부산시민들이 도 당부 청사에 모여들었다. 경찰은 기마경찰대를 파견하여 강제해산하려 했으나 군중들이 응하지 않자 구타하고 연행하였다. (『조선일보』1960. 3. 16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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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 [포항시민 경찰과 충동]
      15일 포항에서 300여 명의 시민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하였다. (『조선일보』1960. 3. 16 조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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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6
    • 서울 [민주당 중앙당부 앞에서 300-500여 명 시민들 돌발시위 벌여]
      인사동 민주당 중앙당부 앞에는 16일 오전부터 차량이 겨우 일방통행 할 정도로 시민들이 길을 메웠다. 약 300-500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민주당 사무실 쪽을 바라보며 동정을 살폈다. 오전 11시 20분경 20대 청년이 붉은 잉크로 쓰인 삐라 수 십 매를 뿌리며 “동포여, 이대로 어찌 살랍니까? 총궐기 합시다”라고 연설했다. 시민들은 박수갈채와 함께 “옳소!”를 외쳤다. 11시 25분경 연설에 자극받은 시민들은 큰 돌을 든 한 청년이 “모두 데모합시다!”라고 소리치며 종로 큰 길로 달리자 그 뒤를 따르며 돌발적으로 시위를 감행했다. “독재정치 배격한다!”, “마산동포 구출하자”는 구호를 외치던 시민들은 10미터도 행진하지 못하고 즉시 출동한 정·사복경찰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경찰은 현장 부근에 있는 시민들을 곤봉으로 구타하며 20여 명을 연행해갔다. 시위를 주동했던 두 청년은 택시로 연행당하면서 “민주당 만세”를 외쳤다.

      (『조선일보』1960. 3. 16 석3면 ;『 조선일보』1960. 3. 17 조3면 ; 『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41-142쪽 ; 사월혁명청사편찬회 편, 『민주한국 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481쪽. 16일 민주당사 앞 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시민들은 고문을 당했다. 그 중 3명은 3월 25일 오전 민권수호국민총연맹 회의실에서 고문당한 내용을 증언했다. 한 학생은 종로경찰서 사찰계 분실로 연행되어 다음날 오전까지 식사를 제공받지 못했으며, 수갑이 채워진 채 손을 의자에 매어놓고 경찰봉 3개가 부러질 때 까지 맞았다. 그 후 어머니가 경찰서에 왔을 때 경찰이“공산당 새끼를 낳았느냐”는 등의 폭언을 하였다. 이 학생이 경찰서 앞에서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법치국가에서 왜 구타하느냐?”고 항의했던 한 여성은 종로경찰서 회의실에 강제 연행되었다. 경찰관은 마구 때리면서“공산당 족속이냐”, “양갈보냐”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동아일보』1960. 3. 26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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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 [진해여자고등학교·충무중학교 여학생 30여 명 시위]
      16일 오후 1시 30분경 진해여자고등학교 학생과 충무중학교 여학생 약 30명이 충무공 동상이 있는 북단 로터리에서 “부패된 사회에도 학생은 살아있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했다. 시위를 벌인 여학생들은 교사들의 제지로 일단 해산하였다. 학생들은 오후 3시 30분경 시내 중심가의 진해극장과 해양극장 앞 노상에서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다시 시위를 시도했다. 그러나 약 5분 후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고, 주동자로 추정되는 여학생 4명은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곧 훈방조치 받았다. 밤에도 남녀 각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곳곳에 모여 시위할 것을 계획했으나 경찰관과 각 학교 훈육담당 교직원들의 사전 예방 때문에 시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마산일보』1960. 3. 1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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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영남상업고등학교·해동고등학교·건국상업고등학교 학생들, 삐라 뿌리며 시위 전개]
      16일 오후 6시 부산 영남상업고등학교, 해동고등학교, 건국상업고등학교 등의 일부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계획했다. 시내 보수동 헌책방 뒷골목에 집결한 학생들은 8시부터 “협잡선거 다시 하라”는 등의 삐라를 수 천 매 뿌렸다. 학생들은 국제시장을 거쳐 광복동 거리로 이동 중에 부산시경찰국 및 중부산경찰서 경찰들의 제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경찰은 학생 수 명을 연행하여 구속하였다. (사월혁명청사편찬회 편, 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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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7
    • 서울 [성남고등학교 학생 400여 명 시위]
      17일 오후 1시경 (『서울신문』1960. 3. 17 석3면 ;『 조선일보』1960. 3. 17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42쪽. 일부 기록은 오후 1시 5분으로『( 조선일보』1960. 3. 18 조3면), 반면 일부 기록은 오후 1시 1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1960. 3. 18 조3면).)

      학생들은 “우리는 정치에는 관여치 않으나 공명선거를 외치다가 체포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한다”, “정의를 주장하는 학생을 구타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였다. 시위를 시작한지 약 30분 후 경찰은 백차와 소방차를 동원하여 출동하였다.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한 무리는 수원 쪽으로, 한 무리는 인천 쪽으로 향하였다. 학생들 중 일부는 돌을 던지기도 했고, 경찰에게 맞는 학생도 있었다. 경전 영업소 앞에 이르러 경찰이 공포 1발을 발포하자 일부 학생들은 해산하였다.

      시위를 벌인 학생들 중 100여 명은 자진하여 경찰에 연행된 간부 학생 3명과 함께 책임을 나누기 위해 20여 명씩 대오를 지어서 경찰서로 연행되어갔다. 그러나 경찰은 골목으로 피한 학생들까지 잡아 연행하였다. 오후 2시 20분경 성남고등학교 교사 9명은 영등포경찰서로 찾아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청했다. 4시경에는 영등포 출신의 유홍, 윤명운 두 의원이 경찰서장을 방문하여, 학생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연행학생을 즉시 방면하라고 요구했다. 영등포경찰서 근방은 학생들의 신변을 걱정하여 나선 학부형들이 운집하여 혼란을 빚었다. 학부형들은 학생들의 석방을 기다리면서 ‘무언의 시위’를 하였다.

      오후 7시경 (『조선일보』1960. 3. 18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42쪽. 동아일보는 오후 5시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1960. 3. 18 석3면).) 성남고등학교의 시위가 있었던 17일 밤 시내 거리에는 학생의 명의로 된 “마산학생의 뒤를 따르자”, “국민의 주권은 땅에 떨어졌다”, “자유당의 무더기 덕분으로 국민주권 잃어버렸다”, “다시 찾자 국민주권”, “국민이여 궐기합시다” 등의 벽보가 곳곳에 붙었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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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 [진해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 시위 전개]
      17일 오전 11시 40분경 진해고등학교 남학생 200여 명이 시위를 전개했다. (『조선일보』1960. 3. 18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44쪽. 동아일보에는 300여 명으로『( 동아일보』1960. 3. 19 조3면 ; 김재희 편, 76쪽), 마산일보에는 1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산일보』1960. 3. 19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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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
    • 서울 [민주당 의원, 침묵 시위 행진]
      18일 민주당의원 50여 명은 국회에서 3·15정·부통령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총퇴장했다. 거리에 나선 민주당 의원들은 이철승 의원을 선두로 오전 10시 18분부터 10시 28분까지 약 10분간, 의사당 앞(현 시청 앞의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서린동에 있는 민주당 의원부연락처에 이르는 약 400미터 거리를 도보로 행진하면서 침묵시위를 하였다.

      오전 10시 18분 의사당 앞에 나온 의원들은 김훈 의원의 선창에 따라 “민주주의 만세”를 불렀다. 박충모 의원은 “살인도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후 의원들은 말없이 외무부와 아카데미 극장 앞을 지나 의원부연락처를 향해 행진하였다. 무언의 대열에는 일반 시민과 신문기자, 사복형사 등 300-400명이 뒤를 따랐다. 대열의 선두에 선 이철승 의원은 의원부연락처 약 100미터 앞 지점에서 이 대통령 4선 경축을 위한 3군(軍)분열식 사열대 마련을 위해 길을 가로막은 줄을 끊으면서 분개했다. 잠시 동안 경찰백차와 기마대가 동원되었고, 경찰의 교통정리가 삼엄했다. 민주당 용산 갑구 선전부장 안일평은 중부서 사찰주임을 향해 “왜 우리를 따라다니느냐? 표 도둑은 잡지 않고”라고 외쳐서 한때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 (『서울신문』1960. 3. 18 석1면 ;『 조선일보』1960. 3. 18 석1·3면 ; 『동아일보』1960. 3. 19 조1·3면 ; 김재희 편, 『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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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
    • 목포 [민주당 목포시당원, 시위 시도]
      19일 오후 4시 30분경 민주당 목포시당원들은 남교동 공설시장 정문 앞에서 시위를 감행했다. 이들은 “3·15선거는 강탈선거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3·15정·부통령선거는 불법이며 무효”라는 구호가 적힌 삐라 약 50매 가량을 살포했다. 그러나 시위는 경비 중인 경찰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민주당원들은 시당 사무소로 되돌아가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 가운데는 통일당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찰은 민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외 11명을 연행하였다. (『전남일보』1960.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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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4
    • 부산 [부산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이 시위 감행]
      오전 8시 50분 경 시위를 준비해 온 부산고등학교 학생 대표들은 조회시간을 이용하여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 과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호소문과 결의문은 부산고등학교 이의남이 작성하고, 3월 20일 부산 시내 고등학교 대표자 모임에서 채택했다( 「특집 잔인한 4월 - 데모의 전말」, 76쪽. 당시 부산고등학교에서 발행하던 교지『청조』에 실린 글로 추정되나 출처와 날짜가 분명하지 않다(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70-71, 73-74쪽).)

      교문을 잠그자 부산고 학생들은 담장을 뛰어 넘거나 뒷문을 부수고 오전 9시 10분 경 학교를 벗어났다.

      (『마산일보』1960. 3. 25 3면 ;『 동아일보』1960. 3. 25 조3면, 1960. 3. 26 석4면『( 소년동아』) ; 김재희 편,『 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76쪽. 부산일보는 오전 9시 경으로『( 부산일보』1960. 3. 24 석3면), 조선일보는 오전 9시 15분으로『( 조선일보』1960. 3. 24 석3면), 반면 일부 기록은 오전 9시 3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이강현 편, 64쪽).)

      시위는 세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뒷문을 부수고 제일 먼저 나간 제 1진 약 300명, 정문으로 나온 약 700명 중 부산진역 앞에서 서면으로 향한 제2진, 그길로 경남여고 쪽으로 향한 제3진이었다. 제1진은 부산진역 앞에서 동부산경찰서 경찰의 제지를 받아 초량으로 방향을 틀어 부산역 광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부산역 광장으로 가는 길에 조흥은행 부산남지점 앞에서 100여 명의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은 2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학생들은 부산역 행을 포기하고 오전 11시 경 학교로 돌아갔다. 제2진과 제3진 700여 명은 부산진역 광장에 도착하기 전 동아중학교 앞길에서 경찰 백차의 호위를 받으며 고급택시로 이곳을 통과하던 국회 마산사건조사단 일행과 마주쳤다. 국회조사단은 동래 숙소로부터 도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학생들은 차를 향해 투석하는 한편 삐라를 뿌리면서 차를 제지시켰다. 황성수, 윤명운 의원 외 2명이 탄 고급택시 2대와 백차는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유리가 파손되었다.

      (부산고등학교 학생들은 국회조사단 차에 투석하였지만 그것이 국회의원 일행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말하였다. 다만 시위대 속을 억지로 밀고나가려는 고급차를 보고 분개한 나머지 약간의 투석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시위에 가담했던 학생은“만약 민의원 조사단일행의 차인 줄 알았더라면 환영과 당부를 했을 터”라면서, 깊이 사과하며 후회하고 있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동아일보』1960. 3. 26 조3면).)

      시위대는 부산진역을 지나 동부산 경찰서를 통과하려 했다. 이 때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려 했다. 학생들도 이에 대항하여 경찰의 곤봉을 빼앗아 던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제2진인 약 300명의 학생들은 목적지인 서면으로 향했고, 제3진 300여 명의 학생은 경찰을 피해 경남여고 쪽으로 향했다. 경남여고생들의 호응을 구하기 위해 교문 앞에 이르렀을 때, 경남여고 교사들은 여학생들을 강당에 집합시키고 문을 잠갔다. 서면 쪽으로 향한 제2진은 문현동에 있는 부산공고와 전포동에 있는 경남공고 정문 앞에 머물러 “마산사살 사건에 경찰관이 책임을 지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짓밟힌 민주주의를 바로잡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 합류를 호소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의 저지로 타교생의 합세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위대는 서면일대를 돌고 시내로 향했다. 삼일극장 앞을 지날 무렵 출동한 경찰들이 곤봉으로 시위대 진압했다. 학생들은 근처 데레사여자고등학교 교정으로 들어가 경찰과 대치하다 오전 11시 10분 경 결국 학교로 돌아갔다. (『부산일보』1960. 3. 24 석3면 ; 『마산일보』1960. 3. 25 3면 ; 『동아일보』1960. 3. 25 조3면 ; 「특집 잔인한 4월 - 데모의 전말」, 78쪽 ; 이강현 편, 66-68쪽 ; 김재희 편, 77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48쪽)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

      동포여, 잠을 깨라! 일어나라! 짓밟힌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나라. 내일의 조국 운명을 위해 일어나라. 하늘에 부끄럽고, 광복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선열들에 부끄럽고, 공산적수(共産敵讐)로부터 강토를 구해준 민주 우방에 부끄러운 이 추태를 보고만 있겠는가?
      바로 지금 온 겨레가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할, 비참하고도 하늘 밑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변을 겪은 우리는, 아직도 억울한 가슴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엎드려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학도들은 일어섰다. 우리가 단군의 자손인 이상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우리에게도 눈, 코, 귀, 입이 있다. 우리더러 눈을 감으라 한다. 귀를 막고, 입을 봉하라고 한다. 공부나 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가슴 속에 한 조각 남은 애국심이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상관 말라고 한다. 왜 상관이 없느냐? 내일의 조국 운명을 어깨에 멜 우리들이다. 썩힐 대로 썩힌 후에야 우리에게 물려주려느냐?
      우리더러 배우라고 한다. 그러나 무엇을 배우랴. 국민을 기만하고 민주주의를 오용하고 권모술수 부리기와 정당 싸움만 일삼는 그 추태를 배우란 말인가?
      국민이여, 잠을 깨라!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다. 주인이 가져야 할 열쇠들을, 우리에게 고용당한 하인에게 하나하나 빼앗기고 있다. 피 흘려 돌아가신 선열들의 혼을 위로하자. 왜놈과 공산도배와 싸울 때 흘렸던 학도들의 고귀한 피다. 나라 찾은 오늘, 우리는 왜 민주경찰의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려야 하느냐. 구속된 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라! 그들을 구속하려거든 백만 학도를 모두 구속하라. 삼천만 겨레를 모두 구속하라. 백만 시민이여, 잠을 깨라! 동포여 잠을 깨라! 선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전 부산 학생 일동

      [결의문]

      1. 동포여 잠을 깨라.
      2. 공명선거 다시 하자.
      3. 경찰은 마산 학생 사살사건을 책임지라.
      4. 평화적인 시위는 우리의 권리다.
      5. 비겁한 자여, 너의 이름은 방관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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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경찰의 진압과 부산고 시위대의 자진 해산]
      경찰은 진압과정에서 소방차를 비롯하여 거리에서 징발한 트럭 등을 이용해 학생들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또한 시위를 해산시키면서 20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수정동 파출소에는 2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그러자 일부 시위대는 수정동 파출소를 포위하고 “학생들을 석방하지 않는 한 시위대는 해산할 수 없다”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귀교하는 조건으로 학생들을 석방했다. 영주동파출소에 연행되었던 20여 명의 학생들도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석방되었다. (『부산일보』1960. 3. 24 석3면 ;『 조선일보』1960. 3. 24 석3면 ; 『동아일보』1960. 3. 25 조3면, 1960. 3. 26 석4면『( 소년동아』) ; 김재희 편, 77쪽 ; 이강현 편, 67쪽 ; 조화영 편, 216쪽)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수 십 명의 정·사복경찰관과 마주쳤다. 경찰은 경찰차 마이크로 “학생들 조용히 돌아가시오, 잘못하면 후회한다”는 경고방송을 했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에게 수갑을 채우려는 경찰과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는교사사이에 말다툼이 있었다. 학생들은 “경찰관은 학교에서 물러가라”, “민주학원에 경찰관 출입이 웬말이냐”고 외쳤다. 학생들이 경찰이 학교에서 나갈 때까지 운동장에서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하자 경찰은 철수했다.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가고 시위의 주모자들은 자진해서 교장실로 갔다. 교장실에는 20여 명의 형사도 있었다. 각 경찰서로 연행되었던 학생들은 교장실에서 벌인 교섭에 따라 훈방되었다. (『부산일보』1960. 3. 24 석3면 ;『 국제신보』1960. 3. 24 석3면 ; 『동아일보』1960. 3. 25 조3면 ; 「특집 잔인한 4월 - 데모의 전말」, 78쪽 ; 이강현 편, 68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48쪽 ; 조화영 편, 216쪽)

      오후에도 서면 일부 지역에서 경찰의 비상경계가 계속되었다. 오후 2시 경 (『부산일보』1960. 3. 25 조3면. 일부 기록은 오후 1시 1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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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
    • 부산 [동성중·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 부정선거 규탄시위]
      오전 9시 20분 경 (『부산일보』1960. 3. 25 석3면 ; 『마산일보』1960. 3. 26 2면 ; 『조선일보』1960. 3. 25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50쪽. 일부 기록은 오전 9시 10분 경으로(조화영 편,『 사월혁명 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17쪽), 반면 동아일보는 오전 9시 4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1960. 3. 26 조3면).)

      경남공업고등학교 정문 앞에 다다른 시위대는 함께 시위에 나서자고 함성을 외치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오전 9시 35분 경에는 교통부 옆 범일동 구름다리를 지나 동구 시내를 향해 달렸다. 학생들은 좌천동 파출소 근처에서 정·사복경찰관이 제지하자 대부분 해산되어 골목길로 피했다. 그러나 경찰의 경계망을 뚫은 약 100명의 학생들은 다시 삼일극장으로 향해갔다. 삼일극장 앞에서 또다시 경찰의 제지를 받은 학생들은 30여 명만이 남아 동부산 경찰서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백차와 구급차에 의해 시위대는 완전히 해산되었고, 5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부산일보』1960. 3. 25 석3면 ;『 국제신보』1960. 3. 25 석3면 ; 『마산일보』1960. 3. 26 2면 ; 『조선일보』1960. 3. 25 석3면 ; 『동아일보』1960. 3. 26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50-151쪽 ; 김재희 편, 77-78쪽 ; 조화영 편, 217쪽. 연행학생의 숫자에 대해 일부 기록은 1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51쪽).)

      한편 오전 10시 경 데레사여자고등학교 학생 약 100여 명이 부산진경찰서 범일동 파출소 앞에서 시위를 했다. 여고생들은 “이유 없이 연행해 간 동창생 2명을 즉시 석방하라”고 외쳤다. 데레사여고 학생 2명은 동성중·고생들의 시위 현장에 있다가, 시위에 참가할 우려가 있다는 혐의를 받아 경찰에 연행되었다. (『조선일보』1960. 3. 25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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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고등학생 100여 명, 폭우 속에서 또 다시 시위 감행]
      오후 7시 30분 경 (『국제신보』1960. 3. 26 조3면 ;『 동아일보』1960. 3. 26 석3면. 일부 기록은 밤 8시 3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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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
    • 전주 [전북대학교 학생, 교내 시위 감행]
      개강일인 4일 오전 10시 10분 경 전북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감행했다.

      (「덕진원두의 민주봉화」,『 전북대학교 교보』77호, 1960. 4. 13.『전북일보』는 오전 9시 3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북일보』1960. 4. 5). 4월 13일자『전북대학교 교보』와 관련 전북대 측은“기사내용 중 4·19, 4·20이 나오는 것과 군데군데 삭제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4·4시위 이후 학보를 발행하지 못하다가 4월 13일자로 발간됐는데 실제로는 4월 20일 이후에 완전히 인쇄돼 배포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전라일보』1995.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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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 [해병대 훈련병 약 200여 명 시위 감행]
      4일 밤 11시 경 (『동아일보』1960. 4. 6 석3면. 일부 기록은 밤 11시 20분 경으로『( 조선일보』1960. 4. 5 석3면), 반면 일부 기록은 밤 12시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1960. 4. 6 조3면, 1960. 4. 7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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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
    • 서울 [민주당·민권수호연맹·공명선거추진위 간부 50여 명, 철야농성 결행]
      민주당·민권수호연맹·공명선거추진위 간부 50여 명은 5일 밤 10시 50분 경부터 민주당 의원부연락처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6일 오전 11시 시청 앞 광장에서 헌법이 허락한 집회의 자유에 입각하여 이번 불법 폭력선거의 불법성을 규탄하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시위를 행하기로 결의하고 이 시위의 감행이 경찰의 총칼에 의해 방해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철야농성에 돌입한다”고 선언하였다.

      민주당 구파 의원들은 이날 밤 농성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오후 2시에 열린 중앙상위에서 구파 유진산 의원은 “이번 데모는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며 눈감고 아웅하는 것이다. 좀 더 신국면적인 데모를 해야 한다”며 시위에 반대했다. 민주당 의원부연락처에서 농성 중인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1960. 4. 5 석1면, 1960. 4. 6 조1·3면 ; 『동아일보』1960. 4. 6 석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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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6
    • 서울 [민주당·민권수호국민총연맹·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 주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거행]
      민주당·민권수호국민총연맹·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는 6일 오전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를 감행했다. 3개 정당단체의 간부 및 당원 100-200여 명은 서린동의 민주당 의원부연락처에서 농성으로 밤을 세웠다. 오전 10시 경 민주당 김의택 원내총무의 사회로 시위의식을 거행했다. 애국가 제창 후 3·15선거 당시 순사(殉死)한 희생자들에 대한 묵념을 올렸다. 박순천 의원은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선언문낭독후 김의택의원 선창으로 “3·15선거는 불법이다, 무효다!”, “이승만정부는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전 10시 15분 경, 곽상훈 의원의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한 후 시위에 돌입하였다. (『서울신문』1960. 4. 6 석3면 ;『 동아일보』1960. 4. 7 조1·3면 ; 『조선일보』1960. 4. 6 석1·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54-155쪽 ; 사월혁명청사편찬회 편, 『민주한국 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481쪽)

      시위대의 맨 앞줄은 젊은 청년들이 7-8명씩 스크럼을 짜고 있었고 그 다음 줄은 “3·15선거불법이다”, “정·부통령선거 다시하자”는 플래카드를 나누어들었다. 그 뒷줄에는 휴대용 스피커를 등에 멘 선전대원이 있었다. 이들은 부정선거와 정부의 부패를 폭로하는 삐라를 뿌리고 시청을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가 중부소방서 옆을 돌아갈 무렵 수 백 명의 시민들이 호응하자 교통경찰들은 인도의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시위대를 둘러쌌다. 국회의사당 앞을 지날 무렵 시위대는 행진을 잠시 멈추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했다. 시청 앞 광장에 이르러서는 민주당 소속 서울시의회의원 6명과 오위영 의원의 부인을 비롯한 민주당 부녀부원들이 시위에 합류하였다. (『한국일보』1960. 4. 6 석3면 ;『동아일보』1960. 4. 7 조1·3면 ; 『조선일보』1960. 4. 6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55-156쪽)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선언문]

      이승만 정부는 집정 12년간에 거듭한 악정의 결과 민심이 완전 이반되어 자유선거로서는 도저히 정권을 연장할 수 없게 되자 이번 3·15선거에 있어 최후 발악으로 모든 불법과 극악 수단을 무소불위로 구사하여 민주주의의 초석인 선거제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이번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바로 국민주권의 강탈행위이다. 그러므로 3·15선거는 전적으로 불법이고 무효임을 거듭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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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청 앞 광장 ‘3·15선거 불법·무효선언문’ 낭독과 시민들의 호응]
      오전 10시 25분 경 시위대가 시청 앞 광장에 도착하자 윤보선 의원은 다시 ‘3·15선거 불법·무효선언문’ 을 낭독했다. 이어 조한백 의원이 시민들을 상대로 시위 구호를 외쳤고, 곽상훈, 정준, 유진산, 박순천 의원이 지프차 위에 올라가 약 5분간 연설을 했다. 곽상훈 의원은 “모든 자유와 국민의 주권을 도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찾기 위해 국민들의 협조를 호소하였다. 정준 의원은 “3·15선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면 자손만대까지 저지른 죄를 씻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유진산 의원은 “정부가 3·15선거를 치밀한 계획 하에 불법으로 감행하여 국민을 노예 이하로 취급하였다”고 규탄하며, “금수 이하의 현 사회로부터 국민들이 탈출해야 된다”고 외쳤다. 박순천 의원은 “이승만 정권을 쳐부수지 않고는 이 땅에서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시청 광장에 둘러선 시민들은 이러한 연설에 박수를 치고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오전 10시 50분 경 박순천 의원의 만세 삼창 후 시위대는 애국가와 구호를 외치며 을지로를 향해 행진했다. 인도를 메운 시민들은 곳곳에서 시위대에 합류하려 했다. 시청 뒷마당에 집결해 있던 수 백 명의 정·사복경찰관, 기마순경 및 교통 백차 등은 일제히 몰려나와 시위대를 양쪽에서 에워싸고 시민들의 합류를 제지했다. 경찰은 시위 대원이 아닌 사람은 인도로 올라서라고 외쳤으나, 시위대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시위대의 행진이 계속됨에 따라 경찰의 방해를 무릅쓰고 시민들은 시위대열에 속속 참가하여, 2천~-3천 명의 인파가 도로를 뒤덮었다. (『동아일보』1960. 4. 7 조1·3면. 일부 기록은 1천여 명으로『(조선일보』1960. 4. 6 석1면), 반면 일부 기록은 4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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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시청 앞 광장으로 돌아와 자진 해산]
      시위대는 을지로 입구를 거쳐 을지로4가에서 종로거리로 들어섰다. 반도호텔을 지나 미 대사관 앞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는 영문으로 된 “꽃다운 피로써 선거를 다시 찾자”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 을지로3가에서는 시위대 본진과 맞은편에서 온 시위대가 합류하였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는 양쪽 인도에서 바라보는 수많은 시민들의 호응박수와 만세 함성으로 최고조에 달하였다. 시위대에 가담한 학생들은 애국가와 학도호국단가를 불렀다. 시위대 뒤쪽에는 2대의 경찰전용버스와 특무대 지프가 뒤따랐다. 종로거리를 경유하여 세종로에 도달한 시위대는 한 무리는 시청 앞으로 되돌아갔고, 젊은 청년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400여 명 (『동아일보』1960. 4. 7 조3면. 일부 기록은 100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1960. 4. 6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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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규탄시위 정식해산에도 일부 학생들 시위 계속]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정식해산한 후에도 일부 학생들은 계속해서 시위를 감행했다. 학생들은 다시 스크럼을 짜고 함성을 지르며 재집결 했다. 시경국장의 진두지휘 아래 경찰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사적인 제지를 시도했다. 시위대가 미 대사관 앞에 이르자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쏘아 죽이라!”고 외치며 내무부 앞까지 밀려갔다. 강제로 학생들을 버스에 실어 나르는 경찰에 의해 시위대의 수는 급격히 줄었으나 반면 경찰은 증원되었다. 시위대는 일단 후퇴하여 덕수궁 앞으로 되돌아와 소공동 조선호텔 쪽으로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기마경찰의 강력한 제지를 받았다. 시위대는 “마산사건의 원흉을 처단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다시 남대문을 거쳐 시경 쪽으로 행진 방향을 바꾸었다.

      시위대는 시경 앞에 이르러 “연행된 학생을 내 놓으라!”고 외쳤다. 오후 1시 30분경 미도파 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영프라자) 앞에 집결해있던 수많은 경찰이 시위대를 구타하며 연행했다. 경찰 백차는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군중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경찰 백차에 투석했다. 시위 군중의 투석에 경찰차 앞 유리가 파손되었다. 이러한 광경을 취재하기 위해 각 보도기관의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동아일보』이명동, 『세계일보』오덕선 사진부기자가 정복경찰관들에게 폭행당했다. 기자들은 폭행을 가한 경찰관들을 붙잡아 치안국장에게 가려고 했으나 정·사복경찰관 30여 명이 몰려와 경찰관들을 빼앗아 버스에 실어갔다. 1시간가량 지속되었던 학생들의 시위는 오후 1시 35분 경 해산되었다. (『한국일보』1960. 4. 6 석3면 ;『서울신문』1960. 4. 6 석3면 ; 『동아일보』1960. 4. 7 조3면, 석3면 ; 『조선일보』1960. 4. 6 석1·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57-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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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9
    • 부산 [민주당 경남도당, 3·15불법선거 규탄시위 감행]
      민주당 경남도당원 100-200여 명은 9일 오전 10시 40분 경 3·15불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했다. 8일 밤부터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민주당원들은 오전 9시 정각에 시위를 시작하기로 예정하였으나, 그 시각 도 경찰국장이 당사를 방문하여 시위 중지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당원들은 계속해서 시위 강행을 주장했고, 이에 10시가 넘어서야 시위에 돌입하게 되었다. 민주당원들은 출발에 앞서 당사 앞에서 시위대열을 정돈했다. 최영근 부위원장의 ‘3·15선 거의 불법 규탄시위를 시작한다’는 개식사 후 남충환 선전부장의 선창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최 부위원장은 “이승만 정부는 집정 12년에 악정(惡政)을 거듭한 끝에 불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고 하므로 3·15선거는 불법이며 무효다”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시위대는 민주당 경남도당을 출발하여 부산진역 쪽으로 미 공보원을 향해 행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천여 명의 정·사복경관과 교통경찰에 둘러싸여 약 400미터 남짓 전진한 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농성에 들어갔다. 약 20분간 농성을 하는 사이 도당 간부들과 경찰 간부들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시위 코스를 변경하는 조건으로 행진을 벌이기로 했다. 10여명의 부녀당원이 포함된 시위대는 현대극장 앞을 거쳐 부산역 앞 광장까지 경찰에 2중 3중으로 둘러싸여 행진했다. 시위대의 선두에는 경찰 백차가 길을 안내했다. 시민들은 경찰의 경비로 인해 시위대와 격리된 채 박수도 치지 못했다. 시위대는 “마산사건 책임자를 잡아내라”, “3·15선거는 불법이다”, “리승만 정권 물러가라”, “3·15선거는 무효다”라는 4개의 플래카드를 들고 삐라를 뿌렸다. 이들은 부산역 앞 광장에서 약 20분간 불법선거 규탄을 외치다가 오전 11시 경 해산하였다. (『부산일보』1960. 4. 9 조3면, 석3면 ;『동아일보』1960. 4. 10 조3면 ;『조선일보』1960. 4. 9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58-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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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천 [민주당 강원도당,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좌절]
      민주당 강원도당부에서는 9일 오후 1시 정각에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감행했다. 도당위원장이자 춘천시 출신 민의원인 계광순 위원장 외 22명의 간부는 민주당 강원도당 사무실에서 ‘ 3·15선거 불법 무효 선언식’을 마치고 시위행진을 시도했으나 약 1시간 전부터 민주당 당사 를 포위하고 민간인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있던 정·사복경찰관들의 제지로 좌절되었다. (『동아일보』1960. 4. 10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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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1
    • 시위 상황 개요
      4월 11일, 3·15 마산 사건의 행방불명자였던 김주열의 시신이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오후부터 마산 곳곳에서 또다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김주열의 시신이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자 병원 앞에는 격분한 시민들이 모여들어 시체실을 점거했다. 일부 시민과 학생들이 도립병원을 벗어나 시가행진을 시작하자 신(新)마산과 구(舊)마산 일대의 다른 곳에서도 연달아 시위대가 구성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통해 고문과 살인을 자행한 경찰을 규탄하고, 정·부통령 재선거를 요구했다. 시위대는 마산경찰서와 각 파출소, 마산시청과 소방서, 형무소 등 관공서에 투석하고 집기를 파괴했다. 창원군청에서는 투표함을 부수고 투표용지를 시내에 뿌렸다. 그밖에 마산시장 관사와 민주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꾼 허윤수·김성근 의원의 집,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마산지부 등을 파괴하였다. 경찰들은 시위가 발생하자 피신하였으나 도경의 증원 조치가 결정되자 경찰서로 집결했다. 마산경찰서 안에 모인 경찰은 공포를 쏘아 경찰서를 포위한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지만 공방전이 계속되자 실탄을 발사했다. 이로 인해 마산경찰서 앞에서 1명의 사망자와 5-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마산경찰서 앞 발포로 일시 해산되었던 시위대는 여러 무리로 나뉘어 마산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던 또 다른 시위대들과 구마산에서 합류했다. 이들은 시민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다 야간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자 대부분 귀가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1천여 명의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앞에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경찰이 연행된 학생들을 석방하자 시위대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해산했다. 김주열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 날의 시위는 4월혁명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마산에서는 12일과 13일에도 시위가 계속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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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3·15 행방불명자 김주열 시신발견]
      11일 오전 11시 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340쪽. 일부 기록은 오전 10시 경으로『( 마산일보』1960. 4. 12 2면), 일부는 오전 11시 25분 경으로(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64-165쪽 ; 조화영 편,『사월혁명 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44쪽), 반면 일부 기록은 오전 11시 30분 경으로(『동아일보』1960. 4. 12 조3면), 일부 기록은 정오로 기록하고 있다『(동아일보』1960. 4. 12 석3면).)

      11시 30분 경 표류시체의 소문이 퍼지자 기자와 시민들이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목격자들은 3·15시위 과정에서 실종된 김주열 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흥분했다. 경찰서에서는 2명의 정복경찰관만이 와 있었다. 마산경찰서 수사계장 고인준 경감과 부산지검 마산지청 길영기 검사가 도착하고 나서야 시체 인양 작업이 시작되었다. 시체가 떠 있는 곳 부근에 거룻배를 타고 나가있던 어부가 갈고랑이로 시체를 끌어 배 위로 인양하였다.

      인양 후에도 시체는 장시간 중앙 부두에 방치되어 있었다. 10대 소년으로 보이는 시체는 오른쪽 눈에 쇠붙이가 박혀있었고, 옷깃이 있는 흰 메리야스에 염색한 검은 군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현장에 온 김주열의 외외존이모 안영자는 시체가 3·15마산사건 당시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이라고 확인하였다. (안영자는 김주열의 어머니인 권찬주의 이모이다.)

      오후 2시 경 (『동아일보』1960. 4. 12 석3면 ; 마산일보사,『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1960, 56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42쪽. 일부 기록은 오후 2시 30분으로(현역일선기자동인 편, 60쪽), 반면 일부 기록은 오후 2시 경에 이미 시민들이 도립마산병원에 집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1960. 4. 11 호외, 1960. 4. 12 석1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65쪽).)

      도립병원 정문은 닫힌 채 2명의 경관이 지키고 있었다. 경찰은 시체실로 들어가려는 군중을 막기 위해 20여 명의 정복경관을 배치했다. 일부 시민들은 담을 넘어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도립병원을 겹겹이 에워싼 수많은 남녀 학생과 시민들은 큰 소리로 거칠게 항의했다. 오후 5시쯤 시민들의 힘에 의해 도립병원 정문이 개방되었다. 시민들은 김주열 시체가 안치된 시체실을 점령했다. 경관들도 몰려드는 시민들을 막지 못하였다. (『마산일보』1960. 4. 12 2면 ;『한국일보』1960. 4. 12 조1·3면 ;『서울신문』1960. 4. 12 조3면 ;『동아일보』1960. 4. 11 호외, 1960. 4. 12 조3면, 석1·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64-165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59-60쪽 ; 이강현 편,『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 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54-55쪽 ; 김재희 편,『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79-80쪽 ; 조화영 편, 44-45쪽 ; 지현모 편, 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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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도립마산병원 앞에 모였던 군중들, 시위 감행]
      오후 6시 경 “3·15영웅 김주열군의 시체발견”, “협잡선거 불법”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시체 안치실에 걸렸다. 시체실 앞에 모인 일부 학생들은 시체를 메고 시가행진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군중들도 “무자비하게 타살된 시체를 시민 앞에 공개해야 한다”, “시체를 해부하지 말고 전 국민에게 보여야 한다” 고 외쳤다. “시체를 알코올에 넣어 서울로 보내 이승만과 이기붕의 집에 갖다놓자”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유가족도 아닌 시민들이 “시체를 해부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오후 6시 15분 경 (『동아일보』1960. 4. 11 호외, 1960. 4. 12 석3면 ; 마산일보사, 56쪽. 일부 기록은 오후 6시 경으로(안동일·홍기범 공저, 164쪽 ; 김재희 편, 80쪽), 일부 기록은 오후 6시 5분 경으로(현역일선기자동인 편, 61쪽), 반면 일부 기록은 오후 7시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1960. 4. 12 조3면).)

      구마산 쪽으로 향한 시위대는 애국가와 통일행진곡을 부르며 행진했다. 모여든 군중은 3천 명을 넘었다. 7-8미터 남짓한 좁은 마산거리에 수 천 명의 남녀 시민들이 시위대와 마주칠 때마다 박수와 환성을 보냈다. 이들이 약 10분 동안 시가를 행진하면서 함성을 울리는 동안 다른 곳에서도 연달아 시위대가 구성되었다. 시위대는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자”, “협잡선거 다시 하자”, “실종된 학생을 찾아내라”, “고문경관 찾아내라”고 외쳤다.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강경한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따랐다. 시위 행렬이 무학국민학교 앞을 지나 자산동 철교 밑에 이르렀을 때는 수많은 인파로 넘쳐났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긴급하게 플래카드를 만들어 휘두르고 다녔으며, 전등이 켜진 건물에 돌을 던지며 불을 끌 것을 요구했다(등화관제). 점포들은 철시했고, 가정집에서도 전등을 꺼버려 마산 시가는 암흑으로 뒤덮였으며, 교통도 마비되었다.

      시위대는 오후 8시 15분 경 남성동파출소에 이르러, 경비를 서고 있는 경찰관을 향해 “살인한 경관 잡아 죽여라”고 외쳤다. 시위대 선두에는 김주열의 친척 누이동생이 나서서 “오빠의 원수를 갚아 달라”며 호소하여 군중들을 더욱 자극했다. 몇몇 학생들이 파출소 1, 2층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자, 남아있던 경찰들이 모두 피신했다. 시위대는 파출소 안에 있는 비품과 서류를 부수고 찢었다. 8시 30분 경에는 자유당 마산시당으로 뛰어들어 사무실 유리창과 내부시설을 파괴했다. 이들은 서울신문 마산지국의 건물에도 투석하며 “왜 우리를 빨갱이로 모느냐?”고 항의했다. 민주당사 앞에 이르러서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서 “민주당은 여기에 간섭 말라”, “참가하면 사주하는 것으로 또 끌려간다” 등을 부르짖었다. 시위대는 대열을 가다듬어 오동동파출소와 마산형무소 앞을 통과해 신마산으로 향했고, 일부는 도립병원으로 돌아왔다. (『한국일보』1960. 4. 12 조1·3면 ;『서울신문』1960. 4. 12 조3면 ;『동아일보』1960. 4. 11 호외, 1960. 4. 12 석1·3면 ;『조선일보』1960. 4. 12 조3면 ; 마산일보사, 56-57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64-165쪽 ; 현역일선기자동인편, 61-62쪽 ; 이강현 편, 55쪽 ; 김재희 편, 80쪽 ; 조화영 편, 48-49쪽 ; 지현모 편, 34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45-346,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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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마산시청·소방서·경찰서 앞 시위]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시위에 가담하라”고 호소하고 다녔다. 마산 시내 곳곳에서 동시에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우리 학생을 살려내라”, “김주열군의 시체를 학생에게 인도하라”, “살인경찰을 잡아내라”, “살인선거 물리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3·15 당시의 유가족과 경찰의 고문을 받았던 사람들은 “내 자식 내놓아라”, “또 나를 죽여보아라”, “또 우리를 고문하라”고 외쳤다.

      한편 오후 6시 15분 도립병원을 출발해 한 차례 시가행진을 벌인 시위대의 일부는 7시 20분 경 도립병원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김주열 시체 앞에서 조의를 표하는 짧은 묵념을 하고 다시 신마산으로 향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라는 ‘조병옥 박사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7시 30분 경 이들이 마산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수비경찰관은 삼엄한 경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경찰서 정문 앞에서 “경찰은 잘못을 알고 사과하라”, “살인 선거 다시 하라”, “마산사건의 희생자를 살려내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신마산에서 시위를 벌인 한 무리는 마산시청과 소방서를 습격했다. 시청에 난입한 시위대는 캐비닛을 부셔 공문서를 꺼내 뿌리고 투표함을 파괴했다. 소방서에도 투석하여 유리창을 깨트렸다. 시위대는 “우리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는데 세금은 무엇 때문에 받는거냐? 표 도적놈들”, “우리에게 또 물을 뿜어 보아라”고 외쳤다. 이들은 마산경찰서 앞 시위대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약 6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포위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 중 과격한 일부 청년들은 경찰서 정문을 밀고 들어갔다. 곤봉과 막대기 등으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경찰서 마당에 대기 중이던 트럭 2대를 돌로 파손시켰다. 경찰서를 점거했던 시위대는 저녁 8시 30분이 지나서야 물러났다. (『조선일보』1960. 4. 12 조3면 ;『동아일보』1960. 4. 12 석3면 ; 마산일보사, 57쪽 ; 조화영 편, 49쪽 ; 3·15의거사편찬위원회, 346-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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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동양주정회사와 창원군청 습격]
      일부 시민들은 박영두 마산시장 집을 부수러 갔다. 이들은 서복태 마산세무서장 집을 박영두의 집으로 오인하고 파괴하려고 했다. 이웃 주민의 설명으로 시민들은 다시 장군동에 있는 마산시장 관사로 몰려가서 “박영두 시장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내부시설을 파괴했다. 또한 1천여 명의 시민들은 완월동에 있는 허윤수 집으로 몰려갔다. 3·15때 이미 폐허가 된 허윤수 집을 과격한 장정들이 담장과 문짝까지 완전히 파괴했다. 이들은 “불구대천의 원수! 변절자를 처단하라!”. “악독한 고문경찰관을 잡아 죽여라!”고 외치며, 장독 등 가재도구를 모두 부쉈다. 시민들은 산호동에 있는 시의회의장 김성근의 집에도 투석했다. 김성근은 허윤수에 이어 지난 2월에 민주당을 탈당한 후 자유당에 입당해 마산 시민들에게 변절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계속 행진하여 창포동에 있는 동양주정회사를 습격했다. 동양주 회사는 무학주정과 함께 중서부 경남 일대를 대표하는 주정업체였다. 허윤수는 마산검찰지청장 서득룡과 모의하여 허남호와 함께 1960년 3월 4일 동양주정회사를 부정한 방법으로 인수했다. 허윤수와 숙질간인 허남호는 동양주정의 사장이 된 후 전 직원을 해고했었다. 시위대는 회사를 잘 아는 이들의 안내를 따라 동양주정회사에 난입하여 시설들을 파괴했다. (동양주정회사를 습격한 시민들 가운데는 해고당한 직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조화영 편, 50쪽).)

      시위대는 신마산에서 시위를 하고 온 또 다른 시위대와 합류하여 창원군청으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창원군청에 투석했다. 학생들은 2층 사무실 및 군수실을 포함해 군청 내 곳곳을 파괴했다. 일부 과격파는 창원군청에서 보관중인 투표함을 끌어내 망치와 쇠막대기 등으로 부쉈다. 3·15 부통령 투표함은 물론 5·2 민의원 및 도의원 투표함도 파괴했다. 수 십 명의 시민은 투표용지를 들고 나와 “불법 협잡 선거 다시하자”고 외치며 시내에 뿌렸다. 이때 군중들은 “내가 찍은 대로 되어있나 보자”, “빼앗긴 내 표를 도로 찾자”는 등 함성을 질렀다. (『마산일보』1960. 3. 6 2면, 1960. 4. 13 2면 ;『한국일보』1960. 4. 12 조3면 ;『동아일보』1960. 2. 10 석3면, 1960. 4. 12 석3면 ; 조화영 편, 46-47. 49-50, 53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68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79-281. 348-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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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도립마산병원을 포위한 시민들과 각지로 분산된 시위대]
      도립마산병원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계속해서 운집해있었다. 일부는 도립병원 시체실을 점거했다. 부산지방검찰청 허형구 검사는 시체검안과 사태 수습 등을 위해 급히 마산에 왔다. 밤 9시 20분 경 허형구 검사는 도립병원 앞에서 마이크를 통해 “김주열 군의 시체를 법대로 해부하여 그 결과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히겠다”고 말했다. 허 검사는 계속해서 공정한 규명을 약속하며 해산을 호소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도립병원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오히려 흥분한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다가 죽여라”, “경찰관을 모조리 잡아들여라”고 외쳤다. 일부는 병원 창문을 깨뜨리기까지했다. 김주열의 친척인 김함수와 한경득 민주당 마산시당 선전부장도 확성기를 통해 해산을 호소했다. 그들에게도 군중은 야유를 보냈다. ( 조화영 편, 49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66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46쪽)

      한편 시위대는 5-6개의 무리로 나뉘어 각지로 분산되었다. 이들은 남성동·북마산·오동동·중앙동·신마산 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파출소 내에 있는 문서와 각종 집기들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뜨렸다. 그 밖에 서울신문지국, 자유당 마산시당부, 조민당 사무실, 국민회 마산지부 등을 돌며 난입하거나 투석했다. 불을 끄지 않았다고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김완길 병원, 마산일보사에도 투석하였다. 특히 마산일보사 앞에는 “신문은 억울한 군중의 호소를 대변해 달라”고 외쳤다.

      시위대는 시가행진을 하면서 애국가, 전우가 외에도 여러 노래를 불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라는 ‘유정천리’ 가락에 개사를한 ‘조병옥 박사 노래’ , “큰 별이 떨어졌다 땅을 치고 통곡하라……”는 ‘조병옥 박사 조가’ ,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라는 ‘해방의 노래’ ,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6·25 노래’와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영남의진 권세가’ , ‘자유의 노래’ 등을 불렀다. 여학생과 부녀자들은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라는 ‘ 3·1절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한국일보』1960. 4. 12 조3면 ;『서울신문』1960. 4. 12 조3면 ;『조선일보』1960. 4. 12 조3면 ; 마산일보사, 56쪽 ; 김재희 편, 80쪽 ; 조화영 편, 47. 52-53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62. 65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64. 167-168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47.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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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시위자 연행과 마산경찰서 앞 발포]
      시위대는 책상다리와 간판조각, 곤봉과 돌 등을 주워들고 다시 마산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은 시위 초 2시간여 동안 경찰서를 비워두고 피신해 마산경찰서는 무방비상태였다. 경남도경에 응원을 요청하여 경찰관 증원 조치가 결정되자 밤 9시 10분 무렵 전열을 정비하여 마산경찰서 안으로 집결했다. 도경에서는 현지 경찰에게 발포 금지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현지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공포를 쏘며 접근했다. 경찰과 시위대의 공방전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마산상업고등학교 운영위원장 김양부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50쪽. 일부 기록은 김양구로 기록하고 있다 『( 조선일보』1960. 4. 12 조3면 ; 조화영 편, 47쪽).)

      결국 밤 9시 30분 경 (『조선일보』1960. 4. 12 조3면 ;『동아일보』1960. 4. 12 석3면 ; 조화영 편, 47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49쪽. 일부 기록은 밤 9시 5분으로『( 동아일보』1960. 4. 11 호외), 일부는 9시 10분으로『( 동아일보』1960. 4. 12 석1면), 반면 일부 기록은 9시 35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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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연행자 석방과 시위 해산]
      마산경찰서 앞 발포로 피신한 군중들과 여러 무리로 나뉘어서 마산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던 시위대는 구마산 쪽에서 합류했다. 시위대는 약 2만 명 정도 되었는데 거리에 나와 있던 시민들을 합쳐 4만여명가량이 시가를 메웠다. 시위대는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이기붕을 “이기붕을 죽여라”,“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 “학살경관 처단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했다. 야간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자 밤 11시 반 경 대부분의 시민들은 귀가하고 시위대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시위대 1천여 명은 0시 경 다시 마산경찰서로 몰려와“연행된 학생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지원 온 경찰들은 총 대신 곤봉으로 무장하고 불과 5미터 간격을 두고 시위대와 대치했다. 경남도경 경비과장 최윤국은 시위의 주동자들과 협상을 했다. 시위대는 ①한 사람도 체포하지 말 것, ②죽은 사람과 부상자를 철저히 밝힐 것, ③사후대책을 강구하라는 세 항목을 요구했다. 최윤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확약하고 연행된 학생을 곧 석방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시위대는 연행된 학생들이 석방될 때까지 버티겠다며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경찰서 부근에서 통나무를 가져와 도로를 막고 농성을 했다. 0시 15분 경 연행되었던 학생들이 석방되자 시위대(『한국일보』1960. 4. 12 조1면 ;『조선일보』1960. 4. 12 조3면 ;『동아일보』1960. 4. 12 석3면 ; 조화영 편, 47. 53-54쪽 ; 김재희 편, 81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68쪽 ; 3·15의거사편찬위원회, 349-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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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2
    • 마산 [마산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지지]
      김주열의 시체가 안치된 마산도립병원과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주변에는 오전부터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마산경찰서에 3중 4중의 저지선을 치고 시민들의 접근을 막았으나 도립병원은 완전히 개방하였다.

      오전 10시 경 마산공업고등학교 학생 300-500명이 시가행진을 벌였다. 1학년을 제외한 2, 3학년 학생들은 오전 9시 50분 1교시 수업을 마치는 신호종이 울리자 교문 밖으로 몰려나왔다. 마산공고 하광호 교장은 학생 간부를 말리다가 체념하고 “비조직적인 난동은 희생자를 낼 뿐이니 정연한 질서유지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마산공고 학생들은 “협잡선거 물리치자”, “마산공업고등학교”라는 2개의 플래카드를 들고,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스크럼을 짠 시위대열은 마산상업고등학교 앞에 이르렀다. 마산상고 학생들과 시내에 들어가기 전에 합류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각 마산상고 학생들은 본관 2층 입구에서 교사들의 완강한 저지를 받아 교실로 돌아갔다. 마산공고 학생들은 마산상고 앞에서 고함을 쳤지만 호응이 없자 사기가 한풀 꺾였다. 학생들은 남성동파출소를 지나 마산도립병원을 향해 행진했다. 도립병원 앞에 모인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마산공고 교사들은 시위대의 앞뒤를 호위하고 학생다운 시위만을 부탁하면서 같이 행진했다. 학생들은 애국가와 교가, 전우가를 불렀다. 마산시청 앞에 이르러 “썩은 정치 바로잡자”, “마산시장 물러가라”, “학도여 궐기하라”, “민주제단 우리가 지키자”, “자유를 달라”, “민주정치 바로잡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마산일보』1960. 4. 13 2면 ;『한국일보』1960. 4. 12 석3면 ;『조선일보』1960. 4. 12 석3면 ;『동아일보』1960. 4. 13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70-171쪽 ; 김재희 편,『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8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354-358. 378-379쪽)

      오전 10시 30분 경 시위대가 시청 앞을 지나 경찰서로 향하려 할 때 정복경찰관 약 200-300명(『마산일보』1960. 4. 13 2면 ;『조선일보』1960. 4. 12 석3면. 일부 기록은 경찰수가 시위대의 2배정도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7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55쪽).)

      마산여고와 제일여고의 정문은 잠겨 있었다. 마산여고 학생들은 책가방을 싸고 생활관에서 플래카드를 제작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설치지 마라! 설치 면 재미없다”는 식의 엄포를 놓으며 신발장에 있는 학생화까지 감췄다. 제일여고의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 학생들이 무섭게 여기는 교사들을 뽑아 3학년 교실에 배치시키고, 훈육주임을 비롯한 신체가 건장한 교사들이 학생들을 감시했다. 이와 같은 학교당국의 저지로 마산여고와 제일여고 여학생들은 마산공고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하지 못했다.

      마산공고 시위대는 제일극장 앞을 둘러 구마산 쪽으로 행진했다. 이때 민주당 윤보선 의원과 몇몇 동료 의원들이 학생들을 만류했다. 학생들이 질서정연한 시위를 하겠다고 주장하자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앞장서겠다고 했다. 시위대는 10여 명씩 스크럼을 짜고 애국가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마산경찰서를 정면으로 통과했다. 각 신문 통신사의 지프와 USIS의 촬영반이 시위대를 뒤따랐다. 경찰은 2중 3중으로 경계하고 있었으나 시위대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길가에 서서 박수갈채로 응원을 보내던 시민들도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1만여 명의 일반 시민들은 때마침 내리는 부슬비에 우산을 들고 뒤따랐다. 시민들은 “자식을 지키자, 우리도 민주주의를 찾아야 하겠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일부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양동이로 물을 떠다 주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신마산과 구마산을 잇는 도로는 인파로 뒤덮여 보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어 차량들은 인파를 피해 해변통을 이용하고 있었다. 학생 시위대는 북마산을 거쳐 15킬로미터의 시위행진을 마치고 오후 1시 25분 경 무사히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우리는 이제 학업에 돌아가겠으니 돌아서 달라”고 외쳤다. 학생들은 교장의 제의대로 한 시간 수업을 받았다. 교장은 “이제까지 용기있게 시위를 하였으니 더 이상 흥분하지 말라.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훈시했다. 마산공고 시위는 해산했으나 일부 학생들은 흩어져 각 학교로 시위를 선동하고 다녔다. (『서울신문』1960. 4. 12 석3면 ;『마산일보』1960. 4. 13 2면, 1960. 4. 14 2면 ;『조선일보』1960. 4. 12 석3면 ; 『동아일보』1960. 4. 13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71-173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54-358. 361-367. 3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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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마산 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들, 시위 감행]
      마산 시내에는 800여 명의 경찰병력이 증가되었다. 경찰들은 시내 간선도로에 20-30명씩 집결하여 시위대를 주시했다. 마산경찰서장은 11일 밤 시위대에 폭행을 당해 입원해있었기 때문에 마산시의 치안은 12일 아침 일찍 내마한 이정용 경남경찰국장이 총 지휘하고 있었다. 이정용 경남경찰국장은 오전 11시 40분 기자회견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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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경고문]
      이정용 경남경찰국장은 기자회견에서 “몰매를 맞아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발포나 구타 등을 못하도록 엄중지시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마산일보』1960. 4. 13 2면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81쪽)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마산공고 학생들의 뒤를 이어 창신고등학교 200-300여 명, 마산여고 400여 명, 마산고 500여 명의 학생들도 시위를 감행했다.

      창신고 학생들은 마산공고 학생들의 시위소식을 듣고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교사들과 규율부 학생들이 정문을 막고 있었고 후문도 이미 봉쇄된 상태였다. 일부 교사는 목총을 들고 다니며 학생들을 위협했다. 학생들은 담을 뛰어넘기도 하고, 교사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교장은 학생들에게 “어디까지나 제군들은 학생의 신분인 만큼 시위만은 질서를 지켜가며 평화적으로 조용히 끝내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하며 교문을 열어주었다.

      마산여고의 교문도 열렸다. 학교 측은 여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겠다는데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이 맨발로라도 나가 시가행진을 하자고 선동하자 학생들은 공감하는 듯 함성을 질렀고,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교사들은 “질서만은 분명히 지켜줘야 한다”며 교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마산여고 학생들이 시가행진에 나서자 마산여중 학생들도 가담하였다.

      제일여고 학생들도 교사들의 저지에 완강히 저항하며 시위에 동참했다. 몇몇 학생들이 닫힌 미술실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플래카드와 피켓을 만들었다. “협잡선거 물리치고 공명선거 다시하자”, “경찰은 학생의 살상에 책임져라”라는 구호를 적었다. 선두 학생들이 들고 나온 플래카드는 교사들에게 빼앗겼다. 이를 예상한 여학생들은 생활관에 숨겨둔 플래카드 2개를 다시 들고 나왔다. 제일여고 학생 간부들은 1, 2학년은 학교에 남아 수업을 받기로 하고 3학년 학생들만 시위에 참가하기로 했다. 학교 측의 승낙을 받은 3학년 학생 들은 교문을 나서 신마산 거리로 행진하였다.

      마산고 학생들은 3교시가 끝나자 책가방을 들고 운동장에 모였다. 학생들은 상급생부터 시위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3학년 학생들부터 교문을 나서 스크럼을 짜고 시가를 행진했다. 마산고의 교장은 선두에 서서 학생들을 인솔했고 교사들은 학생들을 호위하다시피 하여 시위행렬의 좌우로 포진해 함께 행진했다. 500여 명의 마산고 학생들은 이미 행진에 나선 창신고, 마산여고 등의 학생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 “살인경찰 처단하라”고 외쳤다. 학생들은 도립병원에 도착해 시체실에 안치된 김주열 시신 앞에 묵념한 후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 앞에서 학생들은 연좌농성을 벌였다. “김주열을 죽인 경찰을 밝혀라!”, “살인경찰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마산고의 학생대표는 ‘우리 학생들은 어떤 정당의 지령이나 일반적인 선동에 의하지 않은 자발적인 시위를 했다. 김주열 군의 사체가 잔인무도하게 살해되어 있음을 용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했다. 학생들은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 “학살경찰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 한 후 오후 3시 20분 경 해산하였다. (『마산일보』1960. 4. 13 2면 ;『한국일보』1960. 4. 12 석3면 ;『동아일보』1960. 4. 13 조3면 ; 이강현 편,『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56-58쪽 ; 조화영 편,『사월혁명 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54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99-200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51-354. 358-367. 375. 379쪽)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르자 1만여 명의 시민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무학국민학교 앞 간선도로는 시위 군중으로 가득 찼다. 경찰은 무장을 풀고 시위행렬을 저지하려하지 않은 채 연도(沿道)에 늘어서 있었다.

      오후 2시부터는 마산상고 학생들이 뒤늦게 시위에 가담했다. 마산상고 학생들은 2학년이 시위대의 선두에 나서고 3학년은 그 뒤를 이어 나서기로 했다. 1학년은 시위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일찍 하교시켰다. 그러나 2, 3학년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자 1학년 학생들이 정문 앞에 모여 있다가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열이 형성되자 마산상고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마산상고 교사들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시위행렬을 호위했다. 마산상고의 시위는 직원회 및 사친회의 결의를 거쳐 정식으로 학교 측에서 허가한 것이었다. 1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나서자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경찰도 제지하지 않았다. 시위 행렬은 오동동파출소와 남성동파출소를 경유하여 오후 3시 경 마산도립병원 앞에 도착했다. 마산상고 학생들은 도립병원에서 김주열을 애도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묵념을 한 후 교가를 부르고, 문예반 학생들이 지은 애도사를 낭독했다. 학생대표는 병원 안으로 들어가 태극기에 덮여 꽃다발에 쌓여 있는 김주열의 주검 앞에 묵념을 하고 나왔다. 마산간호고등학교 학생 100여 명도 마산상고 시위대에 합류하여 애도 의식에 참여했다. 오후 3시 40분 경 마산상고 학생들이 해산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자 학생들의 각 학교별 시위는 대부분 해산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행렬을 뒤따라온 시민들은 여전히 도립병원 주위에 운집해있었다. (『서울신문』1960. 4. 12 석3면 ;『동아일보』1960. 4. 13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73쪽 ; 조화영 편, 54-55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57-358. 379쪽)

      [경고문]

      1. 법질서를 파괴하는 일절의 행동을 중지할 것
      2. 오후 7시부터 익일 오전 4시까지 야간 통행을 금지할 것
      3. 위 각 사항을 준수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는 법에 의하여 엄중 조처할 것임

      단기 4293년 4월 12일
      경남경찰국장 이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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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창원군청 회의실 습격]
      오후 5시 경 도립병원 앞에 모인 인파를 헤치고 ‘민주당 국회의원’이라고 쓴 지프 한 대가 나타났다. 지프에서 내린 민주당 윤보선 의원은 간호고등학교에서 가져온 책상 위에 올라가 “이번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해 왔다”는 내용의 짧은 연설을 했다. 시민들은 “민주당 만세!”,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오후 5시 30분 경, 군중 속에서 몇몇 학생들이 “학살경찰 처단하라!”, “협잡선거 다시 하라”고 외쳤다. 이에 “학생들이 해도 너무 한다”고 말한 한 여인이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후 6시가 넘어서자 귀가하는 시민들이 많아졌다. 길거리에는 야간통행 금지시간 연장 공시가 나붙기 시작했다. 진주와 부산을 운행하는 시외여객 버스들은 갑작스러운 야간통행의 제한으로 발이 묶였다. 오후 7시 정각 통금 사이렌이 울렸다. 그러나 시민들은 통금 사이렌이 울리자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곳곳에서 모인 군중들은 경찰서를 향하는 시위대, 남성동파출소 쪽을 향하는 시위대, 창원군청을 향하는 시위대 등 별개의 시위행렬을 이루었다. (『한국일보』1960. 4. 13 조3면 ;『서울신문』1960. 4. 13 조3면 ;『마산일보』1960. 4. 14 2면 ;『동아일보』1960. 4. 13 조3면, 석3면 ; 김재희 편, 81-82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81쪽)

      약 500명의 시민들은 창원군청으로 몰려가 군수실을 에워쌌다. 군수실에서는 오후 6시 경부터 신도성 경남도지사, 이정용 경남경찰국장, 치안국 경비과장 등과 윤보선, 김용진, 정헌주, 박찬현, 김동욱, 조일재, 김재곤, 박충모 등 8명의 민주당 수습대책위원들이 모여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민주당 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을 제시했다.

      1. 3·15 당시 피살당한 유가족의 위로가 부족하였으며 부상자의 구호가 불성의 하였으니 이를 시정할 것
      2. 발포책임으로 구속된 5명의 경찰관 이외에 더 많은 경찰이 구속되어야 할 것이며 고문경찰도 즉시 구속되어야 할 것
      3. 행방불명자에 대하여 경찰은 아는 대로 밝혀야 할 것
      4. 김주열군의 비참한 시체에 대하여 그 사인을 밝히는 한편 범죄수사도 해야할 것
      5. 이번 제2차 시위 역시 그 원인이 당국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의 모든 가담자를 불문에 붙여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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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제목 無)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2천-3천 명으로 늘어났다. 시민들은 “더 기다릴 수 없다 빨리 태도를 결정하라”, “우리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라”, “집어치워라”고 외치며 아우성이었다. 오후 7시 쯤 부터는 회의장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몇몇은 회의장에 뛰어들기까지 했다. 결국 회의는 결렬되어 도지사, 경찰국장이 신문사 지프로 피신하고 민주당 의원들만 남자 시위대는 태극기와 “부정선거 다시 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경찰서를 향했다. (『마산일보』1960. 4. 14 2면 ;『한국일보』1960. 4. 13 조3면 ;『조선일보』1960. 4. 13 조3면 ;『동아일보』1960. 4. 13 석3면 ; 조화영 편, 55-56쪽 ; 이강현 편, 58쪽 ; 마산일보사, 61쪽 ; 김재희 편, 82-83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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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마산경찰서 앞 충돌과 시위 해산]
      오후 7시 40분쯤 400여 명의 또 다른 시위대는 남성동파출소를 급습했다. 경찰들은 시위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도주했다. 남성동파출소는 물론 시내 5개 파출소가 청년 및 학생들에게 점령당해 난장판이 되었다. 비슷한 시각, 500여 명의 시위대는 마산경찰서로 향했다. 시위대는 경찰서로 가는 도중 11일 밤 사망한 김영길의 시신을 안치해 둔 덕수의원에 투석해 유리창을 파괴했다. 시위대가 경찰서에 도착해 문 앞에 설치한 전등불을 파괴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에 투석했고 일부 과격한 청년들은 경찰서 마당에 서있던 소방차, 트럭, 지프 등을 끌어내 불을 지르기도 했다. 낮 시위는 질서정연하고 평화적이 었지만 밤 시위는 시위대의 분노가 폭발해 격렬해졌다. 시위군중은 마산경찰서와 시청 앞, 남성동파출소에서 자산동 철교 밑 도로에 가득 차 있었다. 시위수는 2만 명가량으로 추산되었다. 학생들은 “교문경관 체포하라”, “협잡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시민들도 학생들의 구호를 따라 외쳤다. 오후 8시가 넘어서자 창원군청과 도립병원에 있던 시위대 등이 마산경찰서 앞으로 속속 집결해 합류했다. 이들이 경찰서로 침입할 기세를 보이며 전진하면 경찰대는 이에 발맞추어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미 경찰서 담 안에는 카빈총을 든 무장경관 15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소방차 3대가 유사시를 대비해 시동을 걸어두고 있었다. 밤 9시 무렵, 시위대의 선봉대가 함성과 함께 돌팔매질을 하며 경찰서 정문으로 돌입했다. 경찰은 공포를 쏘며 대응했다. 경찰은 약 30분간에 걸쳐 공포를 쏘았고, 소방차도 시위대를 향해 물을 뿌렸다. 시위대는 50미터 가량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던 40여 명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시위 주동대 이외의 시민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서울신문』1960. 4. 13 조3면 ;『마산일보』1960. 4. 14 2면 ;『조선일보』1960. 4. 13 조3면 ;『동아일보』1960. 4. 13 석3면 ; 조화영 편, 57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74-176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82-383쪽)

      한편 마산시청 앞에 집결해 있었던 군중들과 귀가 중이던 일부 시민들은 오후 9시 20분 경 시청 내로 침입했다. 시위대가 침입하자 시청 현관을 경비 중이던 5-6명의 경찰관들은 현장에서 피신했다. 시위대는 청사의 유리창을 비롯해 기물들을 파괴하고, 시청에 비치되어 있던 서류들을 꺼내 헤쳐 놓았다. 7-8명의 시민들은 지하실 쪽 세무과에 들어가 “마음대로 세금매기는 새끼들아!”라고 외치며 서류뭉치를 찢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소동에도 시청에서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마산일보』1960. 4. 14 2면 ;『조선일보』1960. 4. 13 조3면 ;『동아일보』1960. 4. 13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76-177쪽)

      오후 11시 20분 무렵 시위대는 대부분 해산했다. 마산경찰서 골목에는 아직 군중들이 모여 있었고 그 밖의 곳곳에서 산발적인 함성이 들리는 정도였다. 시위대가 주로 외친 구호는 “뭉쳐라 뭉쳐라”, “무장경찰 나오지 말라” 등 이었다. 밤 시위에서 부녀자들은 “고문경관 체포하라”, “관력발동 하지 말라”고 외쳤고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가거라”라는 노래를 불렀다. 시위대의 해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경찰은 무차별 검거에 나섰다. 도망치는 청년과 학생들은 곤봉으로 구타당하며 연행되었다. (『서울신문』1960. 4. 13 조3면 ;『한국일보』1960. 4. 13 조3면 ;『동아일보』1960. 4. 13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76-177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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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대구 민주당원들 시위 감행]
      민주당 당사에서 농성으로 밤을 새운 대구의 민주당원들은 12일 오전 7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는 삐라를 단 수 백 개의 고무풍선을 대구 상공에 날렸다. 민주당의 시위 감행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 당사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정사복경관들은 오전 7시가 되자 증원되어, 당사 입구에만 200여 명이 집결해 있었다. 오전 10시 반 경 이종왕 대구시장과 도경사찰과장은 민주당 도당위원장인 권중돈 의원을 방문하여 시위와 관련해 교섭을 시도했지만 결렬되었다.

      시위 예정 시각이었던 오후 2시보다 한 시간 늦어진 3시 정각, 민주당원들은 시위를 강행했다. 100여 명의 남녀당원들은 스크럼을 짜고 “불법 선거 다시하자”, “마산살인사건의 진범을 처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2중 3중으로 진을 치고 있던 300여 명의 정·사복경찰관의 완강한 저지에 부딪혔다. 당사 뒤편에서 날아오기 시작한 돌로 경찰의 저지선이 한때 무너져 민주당원들은 10미터 가량 전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의 저지선을 몸으로 뚫으려던 당원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결국 20여 분 만에 당사 안으로 후퇴했다. 경찰은 미리 대기시켜두었던 백차와 트럭으로 10여 명의 당원을 5-6차례에 걸쳐 연행하였다.

      한편 오후 3시 45분 경 민주당 당사로부터 약 300미터 떨어진 종로출장소 입구에서 경찰의 교통차단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일반 시민들 중 일부가 고함을 지르며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려고 하였다. 그 중 수 십 명은 저지선을 돌파하고 민주당 당사를 향해 달려갔으나, 모두 붙잡혀 경찰로 연행되었다. 그 후에도 종로출장소 근처에는 2천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다. 오후 5시 30분 경 민주당원들이 앞으로 마산사건의 귀추와 중앙당의 지시를 받을 때까지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고 시위를 중지, 귀가하자 시민들도 해산하였다. 이날 경찰에 연행되었던 민주당원 및 일반시민 35명(남자 30명, 여자 5명)은 오후 6시 15분 석방되었다. (『한국일보』1960. 4. 12 조3면, 석3면 ;『서울신문』1960. 4. 13 조3면 ;『동아일보』1960. 4. 13 조3면,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77-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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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청주 민주당원들, 시위 저지당하자 당사에서 농성]
      민주당 충청북도당에서는 12일 오전부터 도당 사무실에 중견간부 수 명과 당원 약 20여 명이 모여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들은 합법적인 시위 허가를 요구하고, 거절당할 경우 규탄대회 허가를 요구하기로 했다. 이것마저 거절당하면 강제 시위를 감행하기로 합의하였다. 민주당 간부 5명은 오후 5시부터 약 45분간 청주경찰서장과 면담하였으나 시위와 규탄대회 승인을 받아내지 못했다. 오후 7시 반 경 당 사무실에 모인 당원 20여 명은 강제 시위라도 감행하겠다는 태세로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에서는 도당 사무실 주위에 약 100명의 정·사복경찰관을 배치했으며, 오후 3시 경부터 도당 사무실로 통하는 시장도로 약 50미터 좌우로 일반인 및 당원들의 통행을 엄격히 차단하였다. (『중도일보』1960. 4. 1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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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3
    • 마산 [해인대학 학생 100-200명 시위]
      13일 오전 10시 40분 경 (3·15의거사 편찬위원회,『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384쪽. 『동아일보』등 일부 기록은 오전 10시 경으로『( 동아일보』1960. 4. 14 조3면 ; 이강현 편,『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59쪽),『마산일보』는 오전 10시 25분 경으로『( 마산일보』1960. 4. 14 2면), 반면 조선일보는 오전10시 5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1960. 4. 13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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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성지여자중·고등학교, 마산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
      마산시내 각 중·고등학교는 임시 휴교상태였다. 오전 11시 30분 경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84쪽. 『마산일보』등 일부 기록은 오전 10시 30분 경으로『( 마산일보』1960. 4. 14 2면 ; 이강현 편, 59쪽),『조선일보』는 12시 경 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1960. 4. 13 석3면).)

      한편 오후 2시 40분 경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구마산 부림시장 입구에서는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근거리에서 발사한 최루탄으로 인해 시민 3명이 두부, 안면부, 항부 등 전치2주의 화상을 입었다. (『마산일보』1960. 4. 15 2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66쪽)


      오후 늦게부터는 마산에 폭우가 내렸다. 경찰은 13일부터는 강경한 태세를 취하며 폭우가 쏟아지는 야음을 틈타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무장경찰관들이 곳곳에서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면서 오후 7시부터 실시된 야간통행금지 위반자들을 철저히 단속했다. 당시 상황은 경남도경에서 치안국장에게 보낸 전문에 드러나 있다.

      13일 마산의 밤은 11일 이후 최고조의 유혈극이 예상되었지만 폭우와 경찰의 강력한 야간통금 위반자 단속 등으로 시위가 발생하지 않았다. (『한국일보』1960. 4. 14 조3면 ;『조선일보』1960. 4. 14 조3면 ;『동아일보』1960. 4. 14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8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85쪽)

      [보고 전문]

      1. 지금 마산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경관들은 비에 담뿍 젖어있다. 거리에는 10미터마다 5명씩의 경찰관을 배치시켜 통행인을 무조건 검거 구류하고 있다.
      2. 오후 7시 야간통행금지시간 이후 국회의원과 신문기자에 대해서는 그 신분이 확실함을 인정하면 “수고하십니다, 실례하였습니다”라고 대접하여 보내주고 있다.
      3. 오후 7시 30분 현재 야간통행금지위반자 250명을 검거하였으며 계속 검거 중에 있다. 검거자에 대하여는 심문도 하고 있으며, 신원이 확실한 무혐의 자는 석방귀가조치를 취하고 있다.
      4. 검거자를 현재의 형편상 경찰서에 구류할 수 없어 정거장에 교섭하여 회차 2개를 빌려 구류시키고 있다.
      5. 김주열군에 대한 시체해부를 민주당 측 추천의사 입회 하에 하오 4시 30분부터 시작하여 동 7시에 끝냈는데 눈에 박혀있는 탄환은 미제 최루탄이었다.
      6. 김군의 시체를 그의 고향인 남원으로 이송하는데 있어 이 사실이 시민에게 알려지면 일대 소란이 일어날 것이므로 모종 조치를 취하겠고, 실제 이송은 14일 새벽 1시에 실시하겠다.

      경상남도 경찰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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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민주당 경남도당 당원들의 시위 좌절]
      오후 1시 민주당 경남도당 청년부장 윤명원 외 50여 명의 (『조선일보』1960. 4. 13 석3면. 『국제신보』는 6명의 부녀자를 포함한 약 30명으로『( 국제신보』1960. 4. 14 조3면),『서울신문』은 여자 7-8명을 포함한 약 60-70명으로『( 서울신문』1960. 4. 14 조3면), 반면『동아일보』는 약 1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4. 14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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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청주 민주당원들, 이틀째 당사에서 농성]
      민주당 충청북도당에서는 이틀째 시위 감행을 위한 대기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도경사찰수사진 전원을 포함한 약 200명에 달하는 정·사복경찰관을 동원하여 도당사무실을 포위하였다. 민주당 사무실 전면 도로에는 지프, 스리쿼터 트럭 4-5대와 앰뷸런스까지 출동하여 대기 중이었으며, 당 사무실 입구 좌우 약 100미터 도로에 새끼줄을 치고 교통을 차단했다. 경찰들은 당 사무실 옆 여관에서 취식해가며 사무실 앞 도로에 멍석을 펴놓고 바둑과 장기 등을 갖다놓고 둘러앉아 민주당 농성에 대항해 장기 경비태세를 취하였다. 농성대원이 외출하여 접근한 장소는 경찰들이 일일이 검문을 실시했으며, 청주 시내 곳곳에는 무장경찰관 200-300명씩으로 편성된 순회반과 경찰백차가 계속해서 순찰을 돌았다. 청주의 각 중·고등학교에서도 직원들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중도일보』1960. 4. 16 2면 ;『동아일보』1960. 4. 14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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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4
    • 진주 [진주 민주당원·진양고등학교 학생들, 시위 감행]
      14일 오후 진주 시내에서는 민주당원들이 시위를 했다. 시위는 경찰관의 제지로 짧은 시간에 끝났으며, 민주당원 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후 4시 30분경에는 진주시에서 약 30리 떨어진 진양군에서 진양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감행했다. 소풍을 가장해 천국사에 모여 시위를 하려던 학생들은 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1개 소대의 경찰기동대의 제지를 받았다. 시위는 시작하려는 순간 경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다. (『동아일보』1960. 4. 15 석3면 ; 사월혁명청사편찬회 편,『민주한국 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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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 [민주당 전북도당부, 15일에 감행할 규탄시위 위해 철야 농성]
      전주의 민주당 전북도당에서는 3·15부정선거 규탄 대회를 열기 위해 시 당국에 집회허가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민주당은 15일 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도당간부를 비롯한 당원들이 14일 도당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서울신문』1960. 4. 16 조3면 ;『조선일보』1960. 4. 16 조3면 ;『동아일보』1960. 4. 16 조3면, 석3면, 1960. 4. 17 조1면,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9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401쪽)

      한편 민주당 전북도당 상무위원회 송인강은 14일 밤 10시 경 오스카극장 앞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관람객에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전북인의 수치 박 지사는 물러가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다 경찰에 연행되었다. 도의원 유수복, 시의원 서준용과 경찰서장 간에 합의 하에 15일 새벽 0시 10분경 석방되었다. (『동아일보』1960. 4. 16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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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5
    • 서울 [마산상업고등학교·마산고등학교 학생들, 산 위에서 시위 감행]
      15일 오전 10시 30분 경 (『 마산일보』1960. 4. 16 2면 ; 『한국일보』1960. 4. 15 조3면 ; 『조선일보』1960. 4. 15 석3면. 일부 기록은 오전 11시 경 으로(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90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401쪽), 반면 일부 기록은 오전 11시 5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1960. 4. 16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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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안 [민주당 함안군당부 간부 10여 명 시위]
      15일 낮 12시 경 (『 마산일보』1960. 4. 16 2면, 1960. 4. 17 2면 ;『 조선일보』1960. 4. 15 조3면. 서울신문은 12시 30분 경으로『( 서울신문』1960. 4. 16 조3면), 반면 동아일보는 오후 1시 경 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1960. 4. 16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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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 [민주당 전북도당부, 2차례에 걸쳐 시위 감행]
      3·15부정선거 규탄대회의 집회허가를 거부당한 민주당 전북도당부에서는 15일 시위를 감행했다. 오후 3시 경 유수복 도의원은 도당 사무실 앞에서 “3·15선거는 불법·무효”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를 시작으로 100여 명의 당원들이 시위에 돌입하려 했으나 300여 명의 정·사복경찰관이 이를 저지, 플래카드와 삐라를 압수하고 30여 명의 당원들을 연행했다. 이들은 오후 3시 40분 경 연행되었던 당원들이 석방되자 다시 시위계획을 세웠다. 오후 5시 경 100여 명의 당원들이 또 다시 시위를 감행했다. 이들은 도당 사무실 앞에서 시청 앞까지 약 500미터를 행진하며 “3·15선거는 불법 무효다”, “마산사건의 원흉을 잡아내라”,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구호와 “만세”를 외치고 삐라를 뿌렸다. 시청 앞에서 경찰의 강력한 저지를 받자 당원들은 “박 전북지사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당사로 돌아갔다. 두 번째 시위에서는 5-6명의 당원이 연행되었으나 저녁 9시 경 전원 석방되었다. 이날 시위로 7-8명의 당원들이 부상을 당했고 그 중 2명은 중상을 입었다. (『 한국일보』1960. 4. 16 조3면 ; 『서울신문』1960. 4. 16 조3면 ; 『조선일보』1960. 4. 16 조3면 ; 『동아일보』1960. 4. 16 조3면, 석3면, 1960. 4. 17 조1면, 석3면 ; 조화영 편, 『사월혁명 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72-273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9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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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청주 민주당원들, 시위 대기농성 4일째에 해산]
      2일부터 3·15부정선거 규탄 및 마산사건 신속공정 처리를 호소하는 시위를 감행하려다 경찰의 제지로 좌절되자 연4일째 시위 대기농성을 하던 민주당 충북도당은 15일 오전 10시 경 농성을 해산하였다. 도당 사무실 앞에서 경비를 하던 경관 100여 명과 일반인 및 당원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도당 조직부장은 “우리 당원은 끝까지 3·15부정선거와 마산사건을 규탄키 위해 강제 시위라도 감행하려 했으나 경찰의 삼엄한 방해공작에 부딪혀 중과부적으로 일시 시위농성을 중지하고 유리한 사태를 노려 시위를 감행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농성투쟁을 중단하였다. (『 중도일보』1960. 4. 17 2면 ; 『동아일보』1960. 4. 16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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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동래고등학교 학생시위 좌절]
      오전 11시 경 동래고등학교 학생 약 1천 명이 시위를 감행하려다 경찰에 의해 좌절되었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19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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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
    • 서울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 200-300명, 청주역에서 시위 시도]
      16일 낮 12시 30분 경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 약 200-300명이 청주역에 집결해 시위를 시도했다. 학생들은 “불법선거 무효다”, “경찰의 만행을 쳐부수자”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고 선언문을 낭독한 후 가두시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100여 명의 정·사복경관에 의해 해산 당했다. 학생들은 경찰차에 의해 청주 역으로부터 밀려나서 북문로 2가까지 200미터 가량 행진했으나 계속되는 경찰의 제지로 골목으로 피신했다. 경찰과 교사들은 학생들의 모자와 책가방을 빼앗아 가며 30-40명의 학생을 경찰서로 연행했다가 2시간 후 석방했다. 청주공고 학생들의 시위 이후 청주시 곳곳에는 삼엄한 경비가 계속되었다. (『 중도일보』1960. 4. 19 2면 ; 『동아일보』1960. 4. 17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05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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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진주농림고등학교 학생시위 좌절]
      진주농림고등학교 학생들은 시내 시위를 감행하려다 경찰에 의해 좌절되었다. 학생들은 시위가 좌절되자 학교 교실의 유리창 등을 파손하였다. (『마산일보』1960. 4. 18 2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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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7
    • 인천 [인천시 민주당원들, 철야농성 후 시위 감행]
      민주당 인천시 갑·을·병, 옹진군당부 당원 약 100여 명은 17일 오전 11시 불법선거 규탄시위를 감행하기 위해 16일 오후 6시부터 을구 당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경기도경은 민주당원들의 시위에 대비해 17일 오전 9시부터 인천·동인천·수상·부평 각 서원 및 기타 각 서에서 동원한 경찰관 수 백 명을 인천 시내 곳곳에 배치했다. 을구 당사(黨舍) 앞에는 무술경관을 포함해 70-80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경찰 백차에 최루탄 발사대를 설치하고 방독면을 쓴 경찰관 4명이 최루탄 발사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당사 30미터 내에는 소방차 2대와 빈 버스 2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40분 경 민주당원들은 애국가를 부른 후“3·15선거는 불법이다 무효다”,“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 살인선거책임자들을 처단하라”,“ 마산사건의 원흉을 잡아내라”,“ 평화적 집회·데모의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이같은 구호와 같은 내용의‘민주당·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의 명의로 된 삐라 수 백 매를 2층에서 뿌리고 플래카드를 들고 정문을 나오려 했다. 그러나 경찰의 제지로 당사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플래카드만 경찰에 빼앗겼다. 인천 을구 당부 상무부위원장 이호상이 혼자 밖으로 뛰어나오자 경찰들이 폭력을 휘두르며 인근 파출소로 연행하였다. 경찰은 민주당 중앙위원 권혁환, 인천 갑구 의원 허이복 등 2명을 대기시켰던 버스에 연행했다가 석방했다. 민주당원들은 오전 11시 15분 경 당사 밖에서 시위를 다시 시도했으나 인천 을구당부 부위원장 김준식, 청년부장 김윤권 등 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민주당원들은 연행된 버스 안에서도 구호를 외치고 창문 밖으로 삐라를 뿌렸다. 2차시위 시도가 저지되자 남은 부녀당원들은 경찰을 향해“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시위대는 정오에 정식 해산하였다. (『기호일보』1960. 4. 16 4면, 1960. 4. 17 석4면 ; 『마산일보』1960. 4. 19 2면 ; 『서울신문』1960. 4. 18 석3면 ; 『조선일보』1960. 4. 17 석3면 ; 『동아일보』1960. 4. 17 석3면, 1960. 4. 18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96-197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401-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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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진주시 민주당원들, 두 차례에 걸친 시위 시도 좌절]
      민주당 진주시당은 16일 오전에 다음 날인 17일 오전 9시를 기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하기로 하고, 경찰에 시위계를 제출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경찰은 민주당이 시위를 감행할 시에 일어날 학생들의 호응을 우려하여 16일 야간부터 학생통행을 철저히 단속·감시하였으며, 약 200명의 경찰을 시내에 배치했다. 17일 오전 10시, 서부 경남 민주당원 22명은 중안동에 있는 당 사무실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민의례 등의 식순을 마친 후 거리로 나왔다. 경찰은 당사 주변에 2중 3중으로 정복경찰관을 배치했으며, 당사 안으로까지 들어와 민주당의 집회를 저지하기도 했다. 민주당원들은 시위대를 직접 둘러싼 사복경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한 채 당사 앞 도로변에 그대로 주저앉아 농성에 들어갔다. 민주당원들은 농성을 시작한지 약 4시간 만인 오후 2시 경 스크럼을 짜고 행진을 감행하려 했으나 경찰과 약 30분에 걸친 충돌 끝에 오후 2시 30분 경 해산했다. 해산에 앞서 진주시당 부위원장 이활인은“악랄한 경찰관의 방해에 의하여 일단 시위는 제지당하였지만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우리의 정신만 은 제지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부단히 싸워나가겠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했다. 이 시위로 당원 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 마산일보』1960. 4. 18 2면 ; 『동아일보』1960. 4. 17 석3면, 1960. 4. 18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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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녕·하동 [창녕·하동, 사건 시위 정보 누출]
      17일 창녕에서는 오전 9시 경 민주당상무위원 김덕용 외 수 명이 시위를 감행하려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좌절되었다. (『동아일보』1960. 4. 18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97쪽)

      같은 날 하동고등학교 학생들도 진주시 민주당원들의 시위에 호응하여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그 정보가 경찰에 유출되어 좌절되었다. (『동아일보』1960. 4. 18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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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 [민주당원들의 시위 경찰제지로 실패]
      민주당원들은 오후 2시 30분을 기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민주당원들은 민주당 선전부장 현재수 집에 집결하여 선언문을 낭독한 후 거리 시위를 감행하려 했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사복경찰관과 충돌하여 약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민주당원들은 그 자리에서 삐라를 뿌렸을 뿐 시위행진은 벌이지 못하였다. (『동아일보』1960. 4. 18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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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8
    • 시위 상황 개요
      3·15정·부통령선거 이래 산발적으로 전개되어오던 학생들의 시위가 4월 18일에는 서울과 부산, 청주에서 일어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될 기미를 보였다. 특히 서울에서는 고려대학교 학생 약 3천 명이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며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정부 당국자들을 긴장시켰다. 이날 저녁 시위를 끝내고 질서있게 귀교하던 고려대생들은 경찰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의심되는 깡패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부산에서는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시위가 무장경관과 난투극을 벌이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청주학생들 역시 시위를 저지하는 경찰에게 투석으로 항거하며 격한 투쟁을 벌였다. 이날 각 지방에서 학생들이 부르짖은 시위 구호는 모두 경찰의 학원 간섭 배격, 부정선거의 규탄, 마산사건의 공정한 처리 및 말살된 국민주권의 회복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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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고려대학교 학생시위가 있기까지]
      4월 1일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미 3·15부정선거와 마산 사건, 곳곳에서 발생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전국의 학생들은 동요되고 있었다.

      고려대학교 학생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신보』는 연달아 젊은이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고대신보』의 사설 중 1960년 3월 26일자“낡은 사회에 신선한 피를 수혈하라”와 4월 2일 자“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 지식인을 거부한다”는 많은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 고대신문』축쇄판 2(1957년부터 1960년까지), 431. 435쪽)

      그러나 별다른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학생자치위원회 운영위원장들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시위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고 한다. 학생회 간부들의 논의와 계획은 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 원회가 쓴「자유 정의 진리 되찾기 위해」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자유 정의 진리 되찾기 위해」,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각급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123-132쪽).)

      학생들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4월 16일 신입생 환영회를 기회로 하여 무슨 일인가가 벌어질 것이라는 암시가 오고갔다. 그러나 이를 알아 챈 학교 측에서는 16일의 신입생 환영회를 18일 오후 1시로 연기하였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208-209쪽 ; 조화영 편, 77쪽. 그러나 4·19 직후 작성된 다른 기록에 는 학생회 간부들이 시위준비를 위해 학교 측과 협상하여 자진해서 신입생 환영회를 18일로 연기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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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대규모 대학생 시위의 시작을 열다]
      마침내 4월 18일 아침, 긴장한 학생들이 학교로 속속 몰려들었다. 캠퍼스에는 여전히 형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오전 11시, 현승종 학생처장을 비롯한 4명의 교수진은 학생 간부들과 재단이사장실에서 연석회의를 열고 시위결행의 정당성을 토의하였다. 40분이 지나도록 이들 사이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학생대표들은“지금 이 시간에 사복경찰이 학원으로 침입하고 있는데도 학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냐?”고 마지막 한마디를 내던지며 퇴장하여 버렸다. (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28-129쪽)

      마침내 12시 50분, 학생들이 교정의 인촌동상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학교당국은 급하게“신입생 환영회를 무기연기 한다”“, 학원 내에서의 정치적 행동을 엄금한다”는 글을 게시하였다. 그러나 이미“전 학생은 12시 50분까지 교정 앞에 집합하라”고 쓴 학생들의 게시물도 학교당국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에 나붙은 상태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해산시킬 목적으로 마이크를 높이 달고“학생들은 본분을 지켜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은 저마다 도서관과 강의실로 뛰어다니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드디어 오후 1시 경, 3천 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 고대신보』1960. 5. 3 2면 ; 사월혁명청사편찬회, 『민주한국 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499쪽 ;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반면 일부 기록은 고려대생 시위 인원을 “4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10쪽 ; 조화영 편, 78쪽). 서울신문에는“하오 1시 직전 고대생 200명도 시내서 첫 데모를 했다”고 보도하였다『( 서울신문』1960. 4. 18 석3면).)

      [고려대학교 선언문]

      친애하는 고대생 제군!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對)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고대생 동지 제군!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 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
      우리들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구호]

      一.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一.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一.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一.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一.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4293년(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일동

      [고려대학교 건의안]

      1. 마산학생 석방을 요구한다.
      2. 학원의 자유보장을 요구한다.
      3. 기성세대를 불신하며 각성을 촉구 한다.
      우리는 이 건의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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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민주역적 몰아내자”구호도 힘차게]
      시위대는 30여 명의 형사대가 늘어선 교문을 무난히 통과하고 백차가 가로막고 있는 큰길로 나섰다. 학생들은 힘을 모아 백차를 옆으로 밀어놓고 물밀 듯 안암동 로터리에 이르렀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212쪽)

      안암지서 앞에는 100여 명의 경찰이 5열 횡대로 서서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저지하였다. 이를 돌파하느라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50여 명이 연행되었다. 이 와중에 겨우 수 백 명만 빠져나가고, 뒤에 쳐진 2천여 명의 학생들은 각자 길을 돌아 신설동 로터리까지 도달하였다. 시위대는 이곳에서 또다시 일진일퇴의 투석전을 벌인 다음 동묘 앞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212쪽 ; 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29-130쪽. 한편 동아일보는“시위 학생들이 안암동 입구를 거쳐 신설동 로터리를 지날 때까지 경찰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학생들이 동대문을 약 10미터쯤 지나 종로5가로 구부러질 때 경찰 백차 3대가 길을 가로막고 저지하였다. 이번에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달려 나가 이를 돌파하였다. 종로5가에서도 백차 3대와 수 십 명의 경찰관들이 가로막았으나 학생들은 또다시 이를 돌파하여 전진을 계속하였다. 시위 학생들이“자유 인민들 피를 흘린다”는 군가를 부르자 연도에 들어선 시민들과 버스 속에 타고 있던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당황한 경찰은 시위 뒷부분부터 학생들을 경찰봉으로 구타하고 땅에 넘어뜨리기도 하는 등 폭력적인 저지작전을 써서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경찰국장 이하 간부급 경찰들이 호령하면서 이를 직접 지휘하였다.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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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경찰의 시위 방해]
      오후 1시 50분 경, 학생들이 종로3가 단성사 앞에 이르자 또다시 정·사복경찰관 약 200여 명이 4중 5중으로 늘어서서 길을 가로막았다. 경찰들 뒤로는 백차가 겹겹이 서서 학생들을 저지하였다. 이를 돌파하려는 학생들과 경찰관들 간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방망이로 마구 구타하였다. 300여 명의 시위 대원들이 경찰에 의해 떨어져나갔다. 트럭을 탄 경찰관들은 시위대의 뒤를 따르면서 행렬을 절단하려고 애썼다. 시위대가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 앞에 이르자 경찰은 시내버스 3대와 백차 4대, 소방차로 길을 차단하였다. 이 상태에서 다시 수 백 명의 경찰이 적극적인 저지에 나섰는데, 학생들은 발로 채이고 방망이로 맞아가면서 지프차로 강제 연행되었다.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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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
      오후 2시 5분 경, 종로3가 쪽에서 5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오자 힘을 받은 시위대는 이들과 합세하여 경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광화문 쪽으로 전진하였다. 어느새 수백 명의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이들과 합류하였다. 세종로 네거리에 이를 무렵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노골적인 박수와 성원을 보내고, 경찰은 당황한 모습으로 시위대의 뒤를 쫓아올 뿐이었다. 1,200-1,300명 정도가 된 시위대는 오후 2시 10분 경 국회의사당(현 태평로 서울특별시 의회) 앞에 총 집결하였다. 이들은“마산학생 석방하라!”, “기성세대는 각성하라!”는 등의 구호를 부르면서 의사당 앞에 자리를 잡았다. 또한 연행학생들의 즉시 석방과 폭행경찰관의 처단 등을 내무부장관에게 요구하는 동시에 아래의 4개 항목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고대신보』1960. 5. 3 2면)

      [4월 18일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의한 대(對)정부 건의안]

      1. 행정부는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라.
      2. 행정부는 이 이상 민족의 체면을 망치지 말고 무능정치, 부패정치, 야만정치, 독재정치, 몽둥이 정치, 살인 정치를 집어치우라.
      3. 행정부는 명실상부한 민주정치를 실천하라.
      4. 행정부는 이 이상 우리나라를 세계적 후진국가로 만들지 말라.

      행정부의 책임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 농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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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백만 학도에게 보내는 호소문]
      경찰은 계속 병력을 증가시키며 시위대 주변의 교통을 차단하려 애썼다. 또한 시위에 호응하려는 군중과 쉴 새 없이 교통 차단석을 뛰어넘어 시위대에 합류하려는 중·고등학생들을 막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위대는 전우가와 애국가 등을 부르며 기세가 더해갔다. 이들을 무마하고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경찰간부에게 학생들은“경찰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시위학생들은 일제히“학원의 자유를 달라”,“ 마산사건 학생을 석방하라”고 부르짖었는데 그럴 때마다 일반 시민들도 박수를 보냈다. 덕수궁과 시청 앞 보도에 운집한 군중과 중·고등학생들이 이따금씩 경찰 경비망을 돌파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다른 대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여 응원연설을 하였다.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백만 학도에게 보내는 호소문]

      백만 학도여,
      지금 우리들 고대생은 구국 대열의 선두에 나섰다.
      불의와 부정에 반기를 드는 공통성을 지닌 우리들 학도는 이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자유, 정의, 진리를 신봉해 온 우리들 백만 학도는 일어서자.
      역사가 우리에게 준 사명을 완수할 시기는 온 것이다.
      백만 학도여,
      힘을 모아 민주터전 새로 닦자.
      훗날 나라 겨레 복되도록 어서 우리 학도 궐기하자.

      (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자유·정의·진리 되찾기 위해」, 이강현 편,『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각급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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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주류 대열 이탈한 일부 시위대, 경찰 저지로 강제 해산]
      한편 오후 2시 55분 경 시위주류에서 이탈한 100여 명의 고려대 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은 의사당 앞에서 조선호텔 쪽으로 시위를 감행하였다. 당황한 경찰이 저지하였지만 이들은 한국은행 앞 로터리 쪽으로 밀고 나갔다. 미도파 앞에 이를 무렵,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있어 혼잡한 가운데 급거 동원된 경찰관들은 시위대를 마구 구타하고 연행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동아일보』1960. 4. 19 석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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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무장경찰과 정체불명 청년들 시위대 주변에 집합]
      국회의사당 앞 농성이 지속되고 있는 동안 중앙청 안에는 소방차 7대가 대기하였고, 무장경찰과 기마경찰, 어깨에 최루탄 통을 맨 경찰과 약 600명가량의 정체불명 청년들이 집합하고 있었다.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고려대 총장이 직접 나와 시위대 설득

      오후 4시 경, 경찰 백차의 안내를 받으며 유진오 고려대 총장과 10여 명의 교수들을 실은 고려대 전용버스가 의사당 앞에 나타났다. (일부 기록에는 유진오 총장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온 시각이 오후 3시 반으로 되어 있다(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31쪽).)

      [유진오 고려대 총장의 연설 내용]

      학생들이 사회적 부정에 이처럼 항거할 용기를 가졌다는 것을 나는 도리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도 서울의 교통을 몇 시간씩이나 이렇게 막고 있으니 사태가 이 이상 더 계속 되면 치안방해가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의기는 장하다고 볼 수 있으나 일에는 한도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시위하는 동안에 폭행이라든지 불법행위가 없었음을 더욱 기쁘게 생각한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밤을 맞이한다면 어렵고 불행한 사태에 빠질 염려가 크게 있다. 이제 막 나 자신이 내무부의 장·차관과 서울 시경국장을 만나고 왔는데 연행된 고대생 약 30명은 곧 총장에게 인계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지금 곧 학생처장이 종로서와 동대문서에 들러 연행된 학생을 인계받아 학교로 갈 것이다. 여러분은 수건을 풀고 학교로 되돌아가자. 거듭 말하거니와 이성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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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주변에서 또 다른 시위 발생]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동안 체신부 맞은편 골목에도 수천 명의 중·고등학생들과 시민들이 운집하였다. 이들은 고려대 시위대에 합류하려 하였으나 경찰이 철책으로 길을 막고 기마경관과 백차가 강력히 저지하자 오후 5시 15분 경 길을 바꾸어 덕수궁 앞과 시청 앞에 운집하여 기세를 올렸다. 경찰의 저지에 분개한 이들은 마구 돌을 던졌는데, 비 오듯 날아드는 돌에 경찰도 주춤 뒷걸음을 쳤다.

      자유신문사 사진기자와 NBC기자가 이마에 돌을 맞고 피를 흘렸고, 기마경관도 돌에 맞았다. 그 와중에 경찰은 5명의 중·고등학생을 버스에 실어 연행해갔다.

      오후 5시 40분 경, 시위 군중들은 5명씩 스크럼을 짜서 돌을 던지며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찰이 휘두르는 방망이에도 불구하고 애국가와 통일행진곡을 소리 높여 부르면서 태평로파출소 앞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경찰이 한 소년을 끌고 파출소로 가자 수 십 명의 학생들이 파출소로 밀려갔다. 호응부대와 경관이 육박전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시청 주변 도로는 학생과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관재청 부근에는“방관자는 비겁하다, 우리는 총궐기하자”는 내용의 삐라 수십 매가 뿌려지기도 하였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217-218쪽 ;『 동아일보』1960. 4. 19 석3면. 관재청은 관재국의 전신으로, 재무부에 딸려있던 한 국(局)이다. 해방 후 귀속 재산의 관리와 처벌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다가 1963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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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선배의 설득으로 시위대는 학교로]
      오후 5시 반 경, 계속 농성 중인 고려대 학생들 앞에 유진오 총장이 다시 등단하자 학생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유 총장은 마이크로“종로경찰서에 연행된 58명과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16명이 지금 막 석방됨으로써 오늘 시위의 희생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자 또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계속하여 유 총장은“해도 기울어지고 있으니 이 이상 농성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성을 상실치 않은 학생들의 시위를 치하하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간단히 말한 후 단에서 내려왔다. (『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계속하여 고려대 출신인 민주당 이철승 의원이 올라와“나는 이철승이다. 가슴 아프고 눈물 난다”고 첫마디하자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동아일보』1960. 4. 19 석3면)

      그러나 43명의 학생들만은 오후 8시 10분 경까지 앉은 자세로 스크럼을 짜고 철야 농성에 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150명 정도의 경찰관들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승용차에 분승하여 귀가조치 하였다. 그들은 해산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215-216쪽 ;『 동아일보』1960. 4. 19 석1면. 서울신문은“경찰관에게 얻어맞았다는 30명의 학생들은 끝내 학교로 돌아가기를 거부코 의사당 앞에서 계속 농성하려고 하는 것을 7시 반쯤 지나 경찰관들이 강제로 한 사람씩 택시를 잡아 태워 보냈다. 이들을 보내는데 있어 경찰관들은 실력행사를 하였으며, 이에 대항하는 학생과 경찰관 간에는 치고받는 난투극까지 벌어졌었다”고 보도하였다『( 서울신문』1960. 4. 19 조3면).)

      [결의문]

      一.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짓밟힌 오늘은 하늘과 땅이 분노하고 있으며 불법 공갈 협박 사기의 3·15선거의 울분한 마산시민의 애처로운 그 참극상을 주권국민인 우리는 보고만 있을 수 없다.
      一. 궐기하라 애국동표여, 36년을 두고 피를 흘려 전취한 우리 민주주의가 지금 몽둥이와 총검 앞에서 피 흘리며 애소하는 저 구슬픈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지 않는가. 민족을 위한다는 위정자들이여, 그대들의 이름은 부귀요 영화이며 몰인정한 위선자라고 우리 국민은 모두가 분노하고 있다.
      一. 집권당 위정자여, 그대들이 떼어버렸던 양심을 다시 찾지 않으려는가. 지금 거국적인 민중궐기의 피 끓는 이 호소를 듣고 어서 그 양심을 다시 찾아 민권수호에 목숨 바친 지하에 계신 선열과 시달리고 통곡하는 우리 국민 앞에 늦진 않아서 왔으니 사과하라.
      一. 우리는 지금도 용서하여 줄 용의가 있다. 같은 핏줄기에 단군의 자손이기에 동표여 어서 일어나 집권당의 사과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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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석방된 연행학생들]
      시위도중 연행된 학생들은 치안당국과 학교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자 즉시 석방되었다. 국회 앞에서 학생들을 해산하라고 설득하다가 실패한 유진오 총장과 교수들은 이들의 석방을 위해 직접 각 경찰서를 방문하였다. 종로경찰서 58명, 동대문경찰서 16명, 도합 74명이 석방되었다. 이들은 버스로 학교로 옮겨졌는데, 이중 10여 명은 석방 즉시 농성이 진행 중인 국회 앞으로 갔다. (『고대신보』1960. 5. 3 2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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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귀교하는 시위대에 깡패 습격]
      국회의사당 앞에서 철수한 고려대 시위대가 가운데 스피커를 장치한 고려대 소속 서울 자 920호 지프차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각 경찰서에서 동원된 경찰들도 7대의 버스와 2대의 트럭에 타고 이들의 뒤를 따랐다. (『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시위대의 선두가 내무부 앞과 을지로4가에 이르렀을 때 선도차는 웬일인지 을지로통으로 계속 나가지 않고 청계천을 거쳐 유난히 복잡한 종로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화영 편, 80쪽)

      학생들을 습격한 이들은 곽영주, 임화수, 이정재의 지령을 받은 깡패들이었다. 경찰관들은 사건 현장에서 처음부터 이들을 지켜보았으면서도 이들이 학생들을 폭행하고 사라진 다음에야 놀란 듯이 현장수습을 하는 척 하였다. (이효식, 236-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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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학생 16명 손상, 기자도 2명 중상]
      『조선일보』는 종로4가에서 괴한과 충돌하여 부상을 입은 학생 수는 중상자 6명, 경상자 10명이며, 현장을 취재하던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빼앗기는 등 2명의 기자가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하고, 확인된 명단을 발표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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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조선일보가 확인한 4월 18일 부상자 명단]
      ●김재우(20, 고려대 상과 1년, 백병원 입원) ●김황중(고려대 국문과, 반도병원 입원) ●안정남(1년생, 대동병원 입원) ●최필남(52, 고려대 기관수) ●정형근(28, 『세계일보』기자) ●신영민(30, 국제보도 사진기자)

      수많은 경찰관들이 현장에서 경적소리를 울리며 경비를 시작하자 시위대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신설동을 지나 안암동 쪽으로 향하던 시위대는 안암동파출소 앞에서“저 안에 깡패가 있다”,“ 경찰은 학생을 때렸다! ”고 고함치며 파출소 주변을 둘러쌌다. 그러나 지도자격인 학생 수 명이“우리가 폭행을 해서는 안된다! ”고 소리치면서 제지하였다.

      밤 8시 20분 경, 수 십 명의 부상자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다시 고려대 교정에 도착하였다. 시위대 뒤에는 수많은 군중이 뒤따라 왔다. 교정에 집합한 학생들은 유 총장 및 교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는데 유 총장은“학생들의 목적이 하루 이틀에 해결되기는 어렵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다. 연행된 학생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아무쪼록 집에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학생들은 밤 8시 40분 경 애국가와 교가를 합창하고 해산하였다. (『 동아일보』1960. 4. 19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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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뒤따르던 학생들, 후속시위 전개]
      시위대의 뒤를 따르던 일부 중·고등학생들은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깡패들이 시위대를 습격한데 격분하여“깡패들 나오라”고 외치며 또 하나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약 2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이들 남녀 중·고등학생들은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 세종로 네거리로 향하다가, 자유당 중앙당부 앞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대의 완강한 제지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아일보』1960. 4. 19 석3면. 서울신문은 이들을 가리켜‘신원 일절를 파악할 수 없는 1백여 명의 난동대열’이라고 표현하였다( 『서울신문』1960. 4. 19 조3면).)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한 고려대 학생들과 이후 시위 도중 부상당한 자들까지, 이날 밤 12시 현재『동아일보』기자에 의해 확인된 부상자는 모두 41명이다. 이들은 대학병원, 수도의대 부속병원, 백병원, 대동병원, 경전병원 등에 분산 입원하였다. (동아일보는 고려대 한상철군이 실신한 채 깡패들에게 끌려가 죽었다는 소문도 있다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19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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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아일보가 확인한 4월 18일 피해자 명단]
      ◇ 고려대학교 학생 (8명)
      중상 ●황효선(경영학과 1년) ●안오남(경제과) ●김재욱(사학과)
      경상 ●이정일(사학과 2년) ●박재수(법과 4년) ●이항(법과 1년) ●안재필(농과) ●윤덕진(법과 3년) ●성명미상 고려대 신문기자1명

      ◇ 신문기자 (6명)
      중상 ●신영민(28, 사진보도사) ●곽형근(30, 세계일보사) ●안승식(평화신문사)
      경상 ●이경모(29, NBC) ●김용택(자유신문사)

      ◇ 경찰관 (8명)
      경상 ●양우식(동대문경찰서장) ●양병혼(동대문경찰서 경비계장)●최태욱(동대문경찰서 경사) ●한동우(동대문경찰서 경사) ●임성태(동대문경찰서 순경) ●문무원(동대문경찰서 순경) ●안치학(동대문경찰서 순경) ●최영창(남대문경찰서 경사)

      ◇ 기타 (19명)
      중상 ●최정길(21) ●왕홍빈(16, 중국인) ●신원미상 4명 (반도병원 치료)
      경상 ●김순태(19) ●장완영(21) ●엄기순(25) ●노기상(18) ●조남행(7, 재동초교 1학년) ●신원미상 8명 (반도병원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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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서울신문이 확인한 4월 18일 부상자 명단]
      ◇ 중·경상자
      ●이항 ●황효손 ●안노남 ●김순태 ●김재중 ●안재필 ●이정일 ●유광균 ●이해춘 ●김면중 이상 고려대 학생
      ●최○남(고려대 보일러 기관사) ●○석진(고려대 지프차 운전사)

      ◇ 일반 경상자
      ●김대원(21. 마포구) ●이완응(43, 인사동 156) ●성원○(○인상고 1년생)

      ◇ 경찰 중상자
      ●종로서 순경 박인규(6주일) ●남대문서 경사 최영○(1개월) ●경찰국 경비과 김○경(20일) ●성동서 경위 최병○(12일) ●마포 경찰서 신철배(1주일) ●마포서 순경 주영조(1주일) ●동대문 서장 양홍식(10일) ●동대문서 경감 양○○(15일) ●동대문서 경사 한동우(10일) ●동대문서 경사 최태오(3일) ●동대문서 순경 임성태(1주일) ●동대문서 순경 안치○(1주일) ●동대문서 순경 황충○(1주일) ●동대문서 순경 문원○(1주일) ●종로서 경사 이근○(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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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동래고등학교 학생들, 삐라 뿌리며 시위]
      경찰의 포위로 4월 15일 시위계획이 좌절된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은 16일부터 5명의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700매 정도의 삐라와 플래카드를 만드는 등 다시 계획을 세웠다. 18일 오전 9시 50분 경.

      (옥일성(부산 국제신보사 기자),「 취재기자가 본 그 밑바닥 : 나는 부산의 민중의거를 증언한다」, 조화영 편, 218쪽. 동아일보는 동래고교의 시위 시작 시각을 오전 9시로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동래고등학교 선서문]

      우리는 오늘 이 데모를 감행함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적으로 원만히 진행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아울러 우리는 이것이 어느 외부의 조종이나 권고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며,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기인된 것임을 명백히 한다.

      지난 4월 15일, 경찰은 우리 학교 주변에 수 백 명이나 동원해서, 될 수 있으면 잡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본분에만 충실하려는 우리들에게 정치적인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포감을 조장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선거 때에도 경찰은 학교에 출입하기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리고 형사들은 아무 생각 없는 학생회 간부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진술조서니 조사서니 하는 것들을 쓰게 하고, 정부와 경찰에 대한 증오감을 격화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참아왔다. 데모는 불법이라는 학교 당국의 의견에 좇아서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이런 데모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산시민과 학생이 다 같은 백의민족인 경찰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인권이 유린되었음은 우리들 학생으로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경찰의 이 무자비한 행동에 대하여 엄중한 책임을 묻는다. 우리는 이승만 박사의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그 숭고한 투쟁정신을 이어 받아 정의를 위하여서라면 경찰의 어떠한 압력이 있더라도 우리들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서한다.

      단기 4293년(1960년) 4월 18일
      동래고등학교 학생 일동

      [결의문]

      동래고 학도는 이렇게 외친다. 조국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내건 선열과 현존 이 대통령의 생생한 투쟁사를 읽고 또한 영화를 보고 감격하고 있다.

      전국의 학도여, 눈을 떠라.

      그대들 가슴 속에 진정한 선열의 피가 흐를진대 눈에 총알이 박혀 참살당한 내 형제의 시체가 대낮에 표류하는 마산을 상상하라. 평화적인 시위는 우리의 자유다. 마산사건에서 총구 앞에 민주주의를 목이 메이게끔 외치다가 쓰러진 행방불명된 내 동족들의 살상에 책임지라.

      이 비참한 참극을 보고 의협심에 불타는 배달의 자손은 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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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구호]
      교내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학생 1,200여 명이 뒤를 이어 교문을 나와 동일한 구호를 외치고 삐라를 뿌리면서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를 제지하기 위해 정·사복경찰관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었지만 시위에 합류하는 학생들은 계속 증가하여, 1,300여 명이 온천동 방면과 부산 시내 쪽으로 3개 대열을 지어 시위를 감행하였다. (동래고등학교 학생회, 89-90쪽 ;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주력인 1천여 명은 부산 시내로 향하고, 약 300명은 온천장 쪽으로 향하였다. 시내로 향하던 주력부대는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동래경찰서 앞에서 강력한 제지를 받았으나 그곳에 대기하던 소방차를 부수고 소방관 2명에게 중상을 입히며 밀어붙였다. 그러나 제2방어선인 거제리 철도관사 앞 경찰의 제지는 더욱 완강하였다.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이를 돌파하자 경찰은 최루탄과 위협사격으로 공포를 발사하였다. 학생들은 이를 무릅쓰고 제3방어선인 양정동 목재소 앞도 돌파하였다.

      오전 10시 40분 경, 시위대가 전포동 적십자병원 앞에 이르렀을 때 경남공업고등학교, 부산공업고등학교, 항도고등학교 학생들도 합류하였다. 이들은 경찰의 방어선을 피해 철길을 따라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경찰의 제지로 흩어져 제5방어선인 범일동 삼일극장 앞에서 이르렀을 때는 약 200명만이 남았다. 이곳에서 다시 충돌이 벌어져 경찰은 최루탄을 터뜨리고, 소방차는 붉은 물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학부형들은“마산사건을 상기하여 보라”며 울상이 되어 있었다.

      한층 더 완강해진 경찰의 제지에 학생들은 주저앉아 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경찰은 학생들에게 협상을 제의하고, 연행된 학생들을 전원 석방하기로 약속하였다. 비로소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질서정연하게 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들이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였다.

      한편, 온천장 쪽으로 향한 시위대는 온천장 입구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되돌아갔는데, 150여 명의 학생들은 원예고등학교 앞을 거치면서 다시 시위대를 재편성하였다. 이들은 명륜동에서 다시 경찰과 충돌하였다. 학생들은 경찰의 몽둥이를 피해 물이 고인 논으로 뛰어들어 산기슭으로 도망쳤다. (옥일성(부산 국제신보사 기자), 219-220쪽 ;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오후 2시 30분 경,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동래고 교정에 집합했다. 학생위원장이“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데모를 감행한 것에 대해서 선생님들께는 사과를 드립니다”하는 연설을 하였다. 학생들은 대대장의 만세삼창으로 5시간 30분에 걸친 시위의 막을 내렸다. (동래고등학교 학생회, 94쪽)

      한편 대청동 소재 덕원중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감행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사전제지로 좌절되었다. (『서울신문』1960. 4. 18 석3면)

      [구호]

      1. 경찰은 신성한 학원에 간섭 말라.
      2. 김주열군과 김영길군(제2차 마산사건 때의 피살자)을 참살한 자를 속히 처단하라.
      3. 마산사건 이후 행방불명자의 행방을 조속한 시일 내에 밝혀라.
      4. 평화적인 시위는 우리들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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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부산 민주당 의원들 시위]
      18일 동래고 학생들의 시위에 이어 오후 5시 15분 경, 민주당원들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부산시 영도 을구당 부위원장 고재일, 총무부장 김상진, 여성당원 강경선 등 11명의 당원들은 영선동3가에서“3·15 부정 불법 살인선거는 무효다”,“ 살인 고문경찰관을 즉시 체포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이승만 정부 물러가라”,“ 대통령 선거 다시하자”,“ 선량한 국민을 공산당으로 몰지마라”등의 구호를 외치고 800매 가량의 삐라를 뿌리면서 약 100미터 진출하였다. 그러나 오후 5시 25분 경 미리 대기 중이던 약 7-9명의 정·사복경찰관들에게 제지당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 동아일보』1960. 4. 19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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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청주시 고등학생들 시위, 저지하는 경찰에 투석 항거]
      18일 낮 청주공업고등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청주여자상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학생 등 약 2천 명이 시위를 하였다. 오전 11시 50분 경 청주공고 학생 약 600여 명이 먼저 내덕동 방면으로 행진하여 청주상고로 돌입하였다. 청주상고에서는 학생 간부가 선언문을 낭독한 후 학생 600여 명이 부근에 있는 청주여상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경찰과 교사들의 완강한 제지를 무릅쓰고 청주공고 학생들의 시위에 가세하였다. 이들은 경찰 지프차와 기마대에 투석하면서“정부는 마산학생사건에 책임져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치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학도호국단가와 전우가를 부르며 행진을 계속하던 시위대는 청주고 앞에서 청주고 학생 약 1천 명과 다시 합세하여 도청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부 군중들은 시위대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중도일보』1960. 4. 20 2면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조선일보는 청주의 시위학생들이 모두 3천 명 정도였다고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시위가 본격화되자 이를 제지하기 위하여 소방차, 기마대, 정·사복경찰관이 총동원되었다. 경찰이 곤봉과 의자 등을 던지며 시위를 제지하자 700-800명의 학생들은 청주역 뒤 우암산으로 쫓겨 갔다. 이로 말미암아 근처 교동국민학교 인근 가옥 4-5동이 파괴되었다. 또 경찰봉에 맞은 청주고생과 청주공고생 등은 부상을 입었다. (『중도일보』1960. 4. 20 2면 ;『 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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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2차 시위 전개]
      그러는 사이 오후 1시 경에는 또다른 청주공고 학생 100여 명이 7-8명씩 스크럼을 짜고 시내 북문로 쪽으로 행진하면서“협잡선거를 물리치고 다시 하라”“, 정당한 시위에 경찰은 간섭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각자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삐라 수백 매를 살포하였는데, 그 내용은“경찰은 학원에 간섭 말라”,“ 경찰은 세광고등학교 학생들의 보수적 시위의 진상을 밝혀라”등이었다. (서울신문은 청주공고생 100명이 약 10분간 시위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서울신문』1960. 4. 19 조3면). 청주 세광고등학교의 관제시위에 대해서는 3월 11일자 일지 참조)

      경찰의 제지로 삼삼오오 흩어졌던 학생들은 재차 청주상고 교정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오후 2시 20분 경 600여 명이 집결하자 2차 시위에 들어갔다. 청주상고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학도호국단가를 제창하면서 시내 번화가를 관통하여 청주역전으로 향하였다.“ 경찰의 학원 간섭을 물리치자”,“ 우리들의 동료를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부르며 나아가다 중앙시장 앞 시영 목욕탕 앞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시위대는“으샤으샤”하며 한국은행 청주지점 앞을 향해 시위를 강행하다가 충북여객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차 3대, 트럭 1대로 완강히 제지하는 경찰과 대치하였다. 여기서 10여 명이 연행되자 일대는 시내 남문로 방면으로, 또 다른 일대는 서문동 방향으로 분산하여 산발적인 시위에 들어갔다. 서문로 방면으로 향한 시위학생들은 무심천변에서 재정비를 단행하려고 기도했으나 경찰의 출동으로 오후 3시 경 운천동 방면으로 도피하였다. 이 날 시위대와 경찰의 투석전으로 인해 수십 명의 시위대원과 경찰이 중경상을 입었다. (『중도일보』1960. 4. 2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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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충북 경찰국장, “시위 배후 조종 있는 듯”언명]
      18일 밤 발생한 학생시위사건에 대하여 충북 문○동 경찰국장은 이 사건은 본인의 부덕으로 발생했다고 전제하고, 시위대에 배후조종이 있는 듯하다고 발언하였다. (『중도일보』1960. 4. 20 2면. (○는 판독불능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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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충북도지사, 학생신분 지켜달라 호소]
      18일 오후 대규모로 발생한 학생시위 사건에 대하여 충북도지사는 간곡한 담화를 발표하여 냉철한 자기비판으로 학생신분을 지켜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이번 사건은 유감천만이라고 소신을 밝히고, 학생들에게 그릇된 선전과 사수에 현혹되어 자기를 망각하고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는 행위를 감행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대전일보』1960. 4. 20 2면 ;『중도일보』1960. 4. 2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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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
    • 시위 상황 개요
      4월 19일, 3·15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고 마산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학생·시민시위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에서 발생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하여 4월혁명의 정점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18일 고려대 시위에 이어 오전부터 각 대학별로 시위가 일어났다. 4월 1일 개학 이후 시위를 추진해오던 여러 대학들이 고려대 시위대가 깡패의 습격을 받은 데 격분하여 총궐기한 것이다. 수 십 만 명의 시위군중은 시내 중앙으로 진출, 군가와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의사당 앞을 거쳐 경무대 쪽, 대법원 쪽, 이기붕의 집 쪽, 내무부 쪽, 이렇게 크게 네 갈래로 나누어졌다. 세종로 광장은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 서대문, 안국동, 시청 쪽에서 수 천 명씩 떼를 지어 오고가는 학생시위의 교차점이 되었고, 쉴 새 없이 합류되는 수 만 학생들과 응원 군중들로 말미암아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시위가 점점 격렬해지자 정부는 서울과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대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경찰은 요소요소에서 이들을 제지하려고 최루탄을 수없이 발사했으며, 경무대 앞과 이기붕 집 앞, 내무부 앞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경찰이 발사한 총에 수십 명이 사상을 당하였다.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던 광주와 부산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대구와 인천, 청주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언론들은 이 날을“피의 화요일”로 명명하였다.

      이 날 폭발된 각 대학의 선언문, 결의문, 그리고 격문 등은 사이비 민주주의의 독재를 배격할 것과 시위가 이적이 아니라 폭정이 이적이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3·15선거의 부정을 규탄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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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 4·19의 아침을 열다]
      신설동에 위치한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임원들은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것과 경찰로부터 봉변을 당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밤을 새워 시위계획을 세웠다.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벅찬 젊은 가슴을 가다듬고」,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107-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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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의 결의문과 구호]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드디어 시위가 시작되었다. 3학년 학생들이 선두에 섰고, 2학년과 1학년도 끼어있었다. 처음에는 단숨에 학교 밖으로 달려 나오느라 모두들 여념이 없었는데, 동대문 앞에서부터는 질서가 잡히고 정연한 행렬이 되었다. 이들은“학생에게는 평화적 데모의 자유가 있다!”,“ 경찰은 학원에 간섭 말라!”, “민주대한 위하여 학도는 일어나라!”등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111-122쪽 ; 홍영유, 240-242쪽)

      그러나 종로5가에서 경찰의 첫 저지선에 부딪쳤다. 경찰은 마침 지나가던 오물차 1대를 붙잡아 세우고 그 곁에 백차 2-3대를 세워놓고 방망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을 뒤따르던 선생님 몇 분이 이를 보고 급히 소리쳤다.“ 앉아라, 앉아! 뭉쳐 앉아라!”그러나 학생들이 한발 한발 저지선으로 육박하여 백차를 떠밀고 빠져나가려고 하자 경찰들과 푸른 제복을 입은 반공청년단이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학생 몇 명이 백차에 실려갔다. 그러는 사이 가로 막았던 차가 밀려나고 학생들은 종로4가 방향으로 쏟아져나갔다. 다시 트럭을 탄 경찰들이 몰려왔다. 화신백화점 앞까지 달려나간 학생들의 뒤로 순경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사정없이 방망이로 내리쳤다. 수가 그리 많지 않던 학생들은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사방에서 발길로 걷어차이고 몰매를 맞았다. 학생들과 함께 있었던 선생님들도 매를 맞고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홍영유, 240-244쪽)

      오전 9시 10분 경, 교내에 남아있던 200-300명가량의 학생들이 다시 학교 담을 넘어 시위를 강행하였다. 이들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차를 선두로 3대의 트럭을 타고 온 200여 명의 정·사복경찰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하고 트럭에 실려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주5) 비폭력 시위를 하는 학생들에게 왜 폭력을 쓰느냐고 경찰에게 대들던 선생님도 경찰에게 난타 당하고 트럭에 실려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들의 함성은 아직 웅성대기만 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의대 학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홍영유, 244쪽. 대광고 학생들의 시위는 오후에 다시 재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교에 모여 있던 1천 명 가까운 대광고 학생들은 오후 1시 반 경, 다시 나설 준비를 하였다. 이들의 강한 의지에 선생님들도 동행하기로 하고, 떠나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도 해주었다. 이번에는 처음의 경험에 비추어 선두에 장대한 운동선수들이 서고, 좌우 옆줄과 맨 뒤에도 주먹이 든든한 학생들로 외곽을 둘러 8열 종대로 스크럼을 짰다. 이들은 교문에서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 동대문에 서 종로로 들어섰다.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에서 을지로 입구로 향해 미국대사관 앞을 지나 시청 앞 광장에 다다랐다. 이미 군중은 덕수궁 앞까지 가득 찼고, 국회의사당 앞에는 연좌농성을 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 경무대 앞에서 희생당한 학생을 실은 지프차가 시청 앞으로 질주하여 나오고 있었다. 시위대의 선두는 대한문 앞에서 남대문으로 향하여 행진을 계속하였다. 시경앞을 지나 한국은행 앞에서 을지로 입구로 돌아 동대문을 거쳐 학교 운동장까지 질서 정연하게 돌아왔다”(홍영유, 246-248쪽 ;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111-122쪽).)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의 결의문과 구호]

      우리는 제2세 국민으로서 아래와 같은 결의를 선포한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정사를 내일에 물려받을 주인공으로서, 붉게 피 발리고 때 묻은 정사(政事)를 계승받기는 싫다. 그리고 3·15의 불법과 불의의 강제적 선거로 조작된 소위 지도자들은 한시바삐 물러가야 한다. 형제들이여!

      대한의 학도여! 일어나라

      피 묻은 국사(國事)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정의에 불타는 학도이거든, 진정한 일꾼이 되려거든 일어나라!

      3·1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 공화국이요, 결단코 독재국가, 경찰국가는 아니다.

      법에서 이탈하고, 만행으로 탄압하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광학생들은 평화적인 행위로 시정을 요구하는 바이다

      단기 4293년 4월 19일
      대광고등학교 학생 일동

      [구호]

      1. 정부는 마산 사건을 책임지라.
      2.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3. 3·15 협잡선거를 물리치고 정·부통령을 다시 선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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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숭동 서울대학교 학생들 시위 돌입]
      오전 9시 30분 경, (조선일보는 서울대생의 시위시작 시각을“9시 30분 경”이라고 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그러나 일부 기록에는 오전 9시로『( 동아일보』1960. 4. 19 석1면), 또 다른 기록에는 오전 9시 20분으로 기록되어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26쪽).)

      동숭동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18일 고려대의 시위에 이어 또다시 대학생들이 궐기한 것이다. 서울대는 닷새 전부터 시위를 준비하여 11개 단과대학이 함께 19일 오전 11시에 궐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전날인 18일 고려대 시위가 있어 이에 고무되고, 사전에 시위계획을 탐지한 경찰이 학교에 배치되는 바람에, 또한 19일 아침 대광고 학생들의 시위를 접하며 시간이 앞당겨진 것이다. (『대학신문』1960. 5. 2 2·3면. 일부 기록에서는 단과대학 운영위원장들이 4월 초순부터 시위를 준비했다고 한다. 또 19일 아침 10시를 기해 총궐기하기로 결의하고, 16일 밤에 는 각 대학에 비밀리에 연락하였으며, 19일 오전 8시 반부터 학생 간부들이 각 과를 두루 다니며 격문과 구호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조화영 편, 84쪽).)

      정문 앞에 모여선 100여 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준비된 삐라가 살포되고 플래카드가 등장하였다. 삽시간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웅성거리며 모여있던 학생들 틈으로 한 학생이 문리대 학장 이양하 교수를 모시고 와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양하 교수는“여러분의 책임이 중대합니다”라고 하며 두 손을 맞잡고 제자들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학생들은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다”,“ 이 놈 저 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학원자유 보장하여 애국애족 선봉되자”,“ 민주 위한 학생 데모 총칼로써 막지 말라”라고 외치며 교문을 나섰다. (『대학신문』1960. 5. 2 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75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225쪽 ; 조화영 편, 88-90쪽. 당시 서울대학교는 단과대학들이 분산되어 있었는데, 문리대와 음대·미대·법대는 동숭동에, 의대와 약대, 수의대는 문리대 건너편 연건동에, 사대는 을지로6가에, 상대는 안암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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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 나붙었던 격문]
      그러나 이화동 입구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들이 시위대를 저지하면서 쌍방 간에 일대 충돌이 발생해 한동안 수라장을 이루었다. (내무부는 계속되는 지방의 시위와 18일에 있었던 고려대 학생시위에 대한 예방책으로 19일 이른 아침부터 이미 서울 거리에 완전무장한 경찰관들을 배치하고, 각 대학 주변에 경찰관들을 사전 배치하였다(현역일선기자 동인편, 82-83쪽).)

      “민주주의 바로 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있다”,“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다”는 등등 구호를 외치며 원남동을 거쳐 종로4가 동대문경찰서 앞에 다다른 학생들은 또다시 대기하고 있던 무장경찰 약 100명의 완강한 저지에 맞닥뜨렸다. 학생들은 경찰대와 약 50미터 거리를 두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애국가를 불렀다. 이때 돌연 곤봉을 든 경찰대가“돌격!”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학생들을 앞뒤에서 급습하여 무차별 폭행하기 시작하였다.“ 와-”하는 경찰관들의 함성, 이를 물리치려는 시위대들의 아우성, 선두에서 터져 나오는 목 메인 애국가…학생들은 경관들에 의한 무자비한 난타, 구타, 폭행에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찢어졌다. 공격을 받은 지 5분 만에 학생 일부는 연행되고 대부분은 근처의 전매청(현 웅진출판사 동숭동 사옥) 구내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학생들은 뒷골목에 들어가서 돌을 주워 경찰에 투석하였다. 그리고 피 묻은 머리통을 수건으로 감싸고 재집결하기 시작하였다. (『 대학신문』1960. 5. 2 3면 ;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76-77쪽 ; 이효식, 「4·19에서 4·26까지의 서울 : 일선 취재기자의 수기」,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수기』, 정음사, 1960, 227-240쪽. 이때 연행된 학생은 모두 25명이라고 한다(조화영 편, 91쪽).)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 나붙었던 격문]

      여기 대학의 양심은 증언한다.
      우리는 보다 안타까이 조국을 사랑하기에 보다 조국의 운명을 염려한다.
      우리는 공산당과의 투쟁에서 피를 흘려온 것처럼 우리는 또한 사이비 민주주의 독재를 배격한다.
      조국에의 사랑과 염원이 맹목적 분격에 흐를까?
      우리는 얼마나 참아왔는가!
      보라! 갖가지의 부정과 사회악이 민족적 정의의 심판을 받을 때는 왔다.
      이제 우리는 대학의 엄연한 양심으로 일어나노니 총칼로 저지 말라, 우리는 살아있다.
      동포의 무참한 살상 앞에 안일만을 탐할소냐! 한숨만 쉴소냐!
      학도여! 우리 모두 정의를 위하여 총 궐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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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경찰 저지망 뚫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
      경찰의 저지망을 뚫는 동안 점점 수가 늘어난 서울대 법대, 문리대, 미대, 약대, 수의대 등 5개 단과대 학생들은 다시 열을 지어 종로2가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앞 인사동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처음으로 십여 발의 최루탄과 연막탄을 발사하면서 학생들의 전진을 완강히 제지하였다.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있다! ”고 외쳤다.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227쪽. 조선일보는 이때 쏜 최루탄이 5발이라고 보도하였다.)

      경찰대는 최루탄 발사 후 극도로 흥분한 학생들에게“광화문 쪽은 피하고 남대문로를 거쳐 의사당에 간다”는 쪽으로 협상을 제의하였다. (이날 모든 시위대의 목적지는 국회의사당이었다(조화영 편,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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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선언문]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교문을 나선 서울대 상대 학생 약 2천 명도 안암동에서 동대문 앞을 통과한 다음 종로4가에서 경찰대와 충돌하였다. 이들은 계속해서 종로4가를 거쳐 세종로를 돌아 국회의사당 앞으로 향했다.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동안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과 버스 속의 승객들은 박수를 보내면서 이들을 성원하였다.

      그 뒤를 이어 서울대 사대 학생 약 1천여 명도 동대문을 지나 종로, 을지로 입구를 거치면서“시민들이여, 정의를 찾아 궐기하자!”고 외쳤다. 경찰이 세종로와 시청 앞, 의사당 앞에 총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관계로 이들은 경찰로부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마침 혜화동 방면으로부터 종로5가 쪽으로 행진하던 성균관대학교 학생 2천여 명“, 민주주의를 사수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선 동성중·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도 이들과 합세하였다. (『대학신문』1960. 5. 2 3면 ;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동성중·고등학교 시위대 1천여 명은 19일 오전 10시, “민주주의 사수하자”, “우리는 무저항 평화주의자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학교를 출발하였다. 이들은 이화동에서 화신 앞을 거쳐 을지로 입구에서 동국대 시위대와 합세하여 경무대로 향하였다. 동성고 교장과 교사들은 학생들의 신변을 염려하여 처음부터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동성춘추』1960. 5. 15 1면).)

      오전 10시 55분 경, 이미 3천여 명의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학생들이 농성 중인 의사당 앞에 2천여 명의 상대 학생들도 도착하였다. 낙원동 분교를 떠나 종로와 광화문을 거쳐 온 건국대학 학생 1천여 명도“경찰은 정의의 불을 끄지 말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의사당 앞으로 모였다. (『건대학보』1960. 5. 5 1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232-233쪽. 조선일보는 시위에 참여한 건국대 학생 수를 약 500명으로 기록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이들은“이승만 박사 물러가라!”,“ 불법으로 치룬 3·15 선거 다시 하자!”“, 3·15선거 불법으로 감행한 책임자를 이 자리에 불러내자!”고 부르짖었다.

      단발머리를 한 숙명여자대학교 학생 김종자가 앞으로 뛰어나와“선거를 다시하자”는 플래카드를 양손에 쳐들고 목메어 구호를 외쳤다. (연세대에서 수집한 사진자료에는 이 여학생의 이름이 김종자가 아닌 김인숙으로 되어 있다.)

      시위대는 그를 높이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도로변 시민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시위대의 기세는 점점 충천하고, 각 대학 학생들은 점점 증원되어 갔다. 시위대는 애국가와 학도호국단 노래, 3·1절 노래 등을 부르며, 부정선거와 살인선거를 감행한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 및 현 내무부장관 홍진기와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최인규를 불러내라!”,“ 홍진기 내무장관과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불러내 공개투표 합법이라고 우긴 설명을 듣자!”,“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고 한 이기붕 의장을 불러내 즉시 자진사퇴를 요구하자! ”고 외쳤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세종로에 이르는 길에 모인 시민들은 1만여 명이 넘었고, 이 일대의 교통은 완전 마비되었다. (『동아일보』1960. 4. 20 조1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93-94쪽)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薄土)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匡正)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宣明)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專制)로 민중 앞에 군림하는‘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설픈 것임을 교시(敎示)한다.

      한국의 일천(日淺)한 대학사가 적색 전제(赤色專制)에의 과감한 투쟁에 거획(巨劃)을 장(掌)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간(基幹)은 자유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은 바야흐로 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단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 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慘屍)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威)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번을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학구(學究)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임을 자랑한 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死守派)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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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학생들, 대법원장 면담 요구]
      그러는 동안 학생대표 3명이“대한민국의 생명선은 대법원에 달려있으니 9명의 대법관들에게도 대한민국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려주자”고 제의하자 학생들은 모두 이에 찬성하였다. 오전 11시 30분 경, 즉석에서 선출된 학생대표들이 대법원(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갔다. 이들의 임무는 조용순 대법원장이 직접 시위현장에 나와 달라는 학생들의 요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장은 부재중이었다. 학생대표들은 대법원 행정처장을 만나 만약 학생들의 뜻이 관철되지 못하면 대법원에서 농성할 것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표시하며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1. 3·15선거가 합법이냐 불법이냐에 대한 대법원장의 답변을 요구한다.
      2. 선거 소송을 양심적으로 판결해 주겠는가.
      3. 평화적인 데모를 하는 학생들에게 강권을 써서 본의 아닌 불상사를 일으킨데 대해서 책임을 규명하라.
      (『대학신문』1960. 5. 2 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학생대표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자 12시 10분 경, 동국대학교와 건국대학교 학생 500-600여 명도 대법원 옆 건물인 서울지방법원의 4개 처 문으로 몰려들어 법원 구내까지 쇄도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일부 기록에는“건국대 학생들을 비롯한 약 2천 명의 학생들”이 법원으로 몰려갔다고 기술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9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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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동국대학교 학생들 선두로 경무대 향해 전진]
      오전 11시가 좀 지나면서 시위를 시작한 동국대학교 학생 약 2천 명은 을지로를 통과하여 미국대사관(현 서울시청 을지로 청사. 당시엔 미문화원, 또는 미공보원이라고 도 하였음) 앞, 시청 앞을 거쳐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하였다.

      강문고등학교 (강문고등학교는 현 용문고등학교이다)

      학생들은 각양각색의 구호를 부르며 세종로를 거쳐 중앙청 앞을 돌아 경무대 쪽으로 전진하였는데, 그 물결은 끝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시위대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중앙청 정문을 지나 해무청(海務廳) (해무청은 현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중앙청을 바라보며 서있던 건물에 있었다. 상공부 장관 소속의 외국(外局)으로, 1955년 2월에 신설되었다. 수산ㆍ해양 경비ㆍ조선(造船)ㆍ항만 공사에 관한 사무와 일반항만 및 해운 행정을 맡아보았으나 1961년 해체되고, 그 업무는 농수산부ㆍ교통부 등으로 이관되었다. 현재는 해양수산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12시 5분 경, 선발대인 동국대 학생들이 중앙청 후문인 통의동 파출소 앞에 이르자 중앙청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대가 일제히 최루탄을 발사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이순권,「동국대학교」, 사월혁명청사편찬회, 512-513쪽. 일부 기록에는 오전 11시 55분 경 해무청에서 최루탄이 발사되었고, 학생들이“최루탄 쏜 놈을 잡아라!”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비로소 본격적인 총포를 발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5쪽).)

      [강문고등학교]

      금번 우리 강문의 2천 학도들은 3·15부정선거와 박탈된 민권 및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총 봉기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학원에 자유를 주며 정치 도구화 하지 말 것
      2. 3·15선거는 부정선거이므로 다시 할 것
      3.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엄중 처단할 것
      4. 공무원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며, 경찰은 중립을 지킬 것
      5. 헌법에 보장된 민권을 박탈하지 말 것

      [구호]

      1. 학원에 자유를 달라
      2. 3·15선거 다시 하자
      3. 부정선거 원흉들을 즉시 처단하라
      4.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5. 이 정권 물러가고, 경찰정치 중단하라
      6. 마산사건의 책임을 져라
      7. 악질 경찰을 즉시 처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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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계속 증가하는 학생 시위대]
      오전 11시 35분 경, 주먹을 불끈 쥐고 하얀 가운을 입은 서울대 의대와 약대 학생들 1천여 명도“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치면서 중앙청을 향해 시위를 시작하였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의 시위참여는 두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서울대 시위대 주류 속에서 행해진 기초 1·2학년 학생들의 질서정연한 행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후부터 시작된 임상 3·4학년 학생들의 눈부신 총상자 구호활동이었다(서울대학교 의과학생 자치위원회, 「백색 까운들의 수기」, 이강현 편, 157쪽).)

      12시 5분 경 중앙대학교 학생 약 4천 명도“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을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마산학생 석방하라”,“ 고문경관은 국민 앞에 나서라”,“ 김주열군의 사인을 밝혀라”,“ 경찰은 자유당의 사병이 아니다”,“ 부정선거를 다시 하자”,“ 평화적 시위는 국민의 권리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흑석동을 출발하여 한강을 건넜다. 여학생들도 함께 뛰면서 물을 날라다 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중앙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젊음과 사랑과 조국과」, 이강현 편, 173-188쪽 ;『중대신문』1961. 4. 20 1·3면. 중앙대 학생들이 시위를 하려 하자 임영신 총장은“여러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기 전에 꼭 할 말이 있다. 시민들이 내가 부통령에 낙선됐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을 이용한다는 의혹을 갖게 하지 말 것이며,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는 미명 아래 감정만으로 지나친 행동을 하지 말고, 의에 죽고 참에 산다는 교훈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한편 냉정과 침착, 이성을 잃지 말고, 인명피해가 없도록 해주면 고맙겠다”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동아일보는 중앙대가“학생은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였다고 하고『(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조선일보』는 중앙대 시위대의 학생 수를 3천명으로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같은 시각, 18일 깡패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학생 30여 명과 여학생 100여 명이 포함된 고려대생 3천여 명도 교정을 출발, 정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막아놓은 버스 2대를 뚫고 진출하였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234-236쪽 ; 조화영 편, 89쪽. 이날 고려대 학생들은 18일 시위의 후유증으로 19일에는 시위예정이 없었으나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경관에 쫓기는 광경을 보고 우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한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36쪽).)

      [고려대학교 결의안]

      우리가 이미 주장해 오던 모든 요구를 관철하고 다시금 이 참상을 야기시킨 책임자들을 문책할 것은 물론, 당국은 금반 3·15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데몬스트레이션을 계속할 것을 엄숙히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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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경무대로 향한 시위대, 중앙청 후문에서 경찰과 격돌]
      중앙청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첨예한 대치가 계속되던 중, (일부 기록에는 시위대가 연좌농성한 시간이 약 1시간으로(조화영 편, 92쪽), 또 다른 기록에는 약 30분으로 되어있다『(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시위대의 선두가 경무대로 가는 바리케이드를 뚫기 위해 경찰과 충돌하던 오후 12시 10분 경, 지프차에 탄 소령 한 명의 지휘를 받으며 헌병 트럭 4대에 분승한 헌병대 300여 명이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안국동 쪽에서 중앙청 앞으로 급히 이동하여 왔다. (『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일부 기록에는 모두 7대의 트럭이 사이렌을 울리며 왔고, 곧 바로 뒤에는 소방차 2대와 3대의 시내버스에 탄 경찰 증원부대가 도착하였다고 한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6쪽).)

      학생들은 전우가와 6·25의 노래를 부르며 돌을 던졌는데, 이로 인해 문교부 (문교부는 지금의 교육부이며, 당시 중앙청 옆 2층 짜리 가건물(현 고궁박물관 자리)의 1층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2층은 부흥부가 사용하고 있었다. 부흥부는 6·25전쟁 뒤 경제부흥을 위해 1955년 2월 17일 신설된 기관으로, 종래 기획처 대신 조직된 경제계획기구였다.)

      시위대에 섞여있던 남루한 옷차림의 청소년 약 300- 400명은 무장경관의 발사에 흥분하여 중앙청 돌담을 뛰어넘었다.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조선일보는 중앙청 돌담을 뛰어넘은 학생 수를 400-500명으로 기록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면).)

      해무청 옆엔 완전무장한 장갑차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 앞에서 서울신문사 지프차가 학생시위대에 의해 부서지고, 서울신문사 기자는 부상당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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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경무대 앞에서 경찰과 마지막 대치]
      12시 15분 경, 중앙청 서문 옆에 포진한 학생들은 근처의 공사장에 있던 상수도용 철관을 굴리며 전우가를 부르면서 계속 돌진하였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학생들을 저지하려고 경찰들은 창성동 국민대학 앞길을 가로질러 바리케이드를 쌓고 전투적인 발사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국민대는 초급대학이었는데, 중앙청에서 경무대로 가는 길 중간, 진명여고 못미처에 위치해 있었다.)

      이미 동료들의 피를 본 학생들은“살인귀를 잡아 죽여라!”,“ 자유와 민주주의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외치며 한 걸음 한 걸음 경찰의 마지막 거점을 향해 계속 육박하였다. 전투복으로 완전무장한 약 3개 소대의 경찰사격 병력은 연막탄과 최루탄을 연속으로 발사하여 거리는 처절한 전장으로 화하였다. 최루탄 발사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시위대는 계속 전진하여 마지막 거점까지 불과 50미터만을 남겨놓았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7쪽)

      [시위대가 진명여고 앞에서 채택한 결의문]

      1. 최루탄, 공포, 붉은 물로써 정의의 분노를 막으려 들지 말라
      2. 3·15부정선거는 다시 하라
      3. 마산학생 사건에서의 발포 및 고문경관을 즉시 색출 처단하라
      4. 고려대 데모 습격 깡패를 검거하라
      5. 이상의 요구에 대통령, 국회의장, 혹은 홍 내무가 현장에서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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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경무대 앞 바리케이드 뚫자 무장경관 발포, 사상자만 수 십 명]
      오후 1시 20분 경, 학생들은 드디어 경무대가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마지막 철조망 바리케이드 앞으로 다가갔다. 지프차 트레일러를 하나 얻은 학생들은 그것으로 철조망을 밀기도 했다. 헌병과 경찰들은 또다시 하늘을 향해 수백 발의 총을 발사했으며, 소방차의 붉은 물줄기가 시위대를 향해 뿌려졌다. 시위대는 주춤했으나 대기 중이던 소방차 4대를 탈취한 학생들이 이를 운전하고 전진,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50미터 앞까지 들어갔다가 총격으로 쫓겨났다. 다른 한편에서는 학생들이 톱으로 철조망을 끊어 뚫었는데, 시위대는 이쪽으로 벌떼처럼 터져나가 점점 경무대로 접근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 조화영 편, 93-94쪽)

      오후 1시 30분 경, 경무대 근처 민가의 담을 넘어서 잠입한 시위대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산발적으로 경무대 입구까지 육박하였는데, 이들 중 몇 사람은 경무대 입구 경찰초소까지 도달했다. 시위대도 경무대 정문이 보이는 경복궁 뒷문에 이르렀다. 그때, 경무대 입구를 사수하던 경비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일제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경찰들의 무차별 난사가 시작되었다. (경무대 앞의 본격적인 발포시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김정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경찰의 발포가 오후 1시 경에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시쯤 되자 갑자기 팽팽팽 하고 공포탄이 아니라 실탄을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깜짝 놀라 “이건 실포 소리인데 진짜로 발포를 하나?”하고 말하자 홍진기 내무장관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실포가 뭐요?”“진짜 탄환 말이요, 공포가 아닌 진짜 탄환!”이 말을 듣고 그도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김정렬, 『김정렬 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 234-235·238쪽). 동성고등학교의 기록에는“공포이거니 안심했더니 앞뒤에서 구슬픈 비명이 터졌다. 무차별 사격! 1시 40분이었다”고하였다『(동성춘추』1960. 5. 15 1면). 또 다른 기록은“1시 25분 시위대는 4대의 소방차 를 빼앗아 경무대 정문을 돌파하려고 나아갔다. 그러나 정문 앞 30~40미터 쯤 다가섰을 때 경비경찰은 무자비한 야만적인 행위의 발사를 감행하였다”고 하였다(조화영 편, 93쪽).)

      총알세례를 받은 시위대는 뒤로 물러섰다. 시종 동성고 시위대를 따라다닌 동성고 교사들은 유탄이 머리 위를 스치는 동안에는“엎드렷!” 하고 호령을 렀고, 총성이 멎으면“일어섯!”“후퇴!”하고 명령을 내렸다. (조화영 편, 9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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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채택한 결의문과 구호]
      다급해진 시위대는 쓰러진 학생들을 경찰 앰뷸런스에 실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학생들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피바다가 된 경무대 입구에서 불안과 의분에 발목이 묶인 학생들은 3시간 이상이나 머물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쳐버린 학생들은 차츰 대열에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조화영 편, 96쪽)

      [연세대학교에서 채택한 결의문과 구호]

      발작적 방종이 아닌 민주주의라는 것, 그것은 각인의 의사를 자유로이 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집회, 언론, 결사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되어야 함은 물론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정부와 입법부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며 전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와 자손의 건전한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우리는 선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보다 나은 앞날의 발전을 위하여 헌법 전문에 기록된바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몽매한 무지와 편협, 그리고 집권과 데모의 제지, 학생 살해, 재집권을 위한 독단적인 개헌과 부정선거 등은 이 나라를 말살하는 행위인 것이며, 악의 오염을 더욱 증가시키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이 되겠는가? 나라를 바로 잡고자 혈관에 맥동치는 정의의 양식, 불사조의 진리를 견지하려는 하염없는 마음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사항을 엄숙히 결의하는 바이다.

      1. 부정 공개투표의 창안집단을 법으로 처벌하라.
      2. 권력에 아부하는 간신배를 축출하라.
      3.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허용하라.
      4. 경찰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
      5. 정부는 마산사건의 전 책임을 지라.

      [구호(우리의 주장)]

      一. 민주주의 반역자를 극형에 처하라.
      一. 경찰은 학원 내의 일을 간섭 말라.
      一. 국민의사에 반하여 개헌의 주모자를 저지하라.
      一. 사상 최악의 3·15선거를 다시 하라.
      一. 위정자 양심은 있는가.
      一. 진리, 자유
      一. 학원의 자유를 달라.
      一. 3·15부정선거를 규탄한다.
      一. 경찰국가 원치 않는다.
      一. 학도는 살아있다.

      1960. 4. 19
      연세대학생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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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4월 19일 오후 2시 30분 현재 조선일보 기자가 확인한 부상자 명단]
      ●고영수(22, 서울대 미대 3년, 발바닥 관통상) ●이회백(27, 서울대 의대 4년, 무릎관통상) ●강○○(20, 동국대 2년, 오른손 관통 및 이마 파열상) ●박창○(연세대 3년, 어깨 및 복부 관통상) ●마용주(홍익대 2년, 하퇴부 관통상) ●김○구(19, 손바닥 관통) (○는 판독불능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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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흥분한 시위대, 소방차 탈취하고 시내 질주]
      부상자는 시위 군중이 병원으로 호송하였고, 백색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은 두려움도 잊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치료하였다. (4월 19일 흰 가운을 입고 시위에 참여한 의대생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생들과 연세대학교의과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의 시위참여 상황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서울대 의대 : 아침부터 경찰의 폭력으로 부상당한 학생들로 서울대부속병원이 북적였지만, 11시 35분 경 첫 총상자가 실려 온 후 충격을 받은 의대 3·4학년 학생들은 긴급학생총회를 열고‘구료대(救療隊)’로 시위에 참가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다. 이들은 주머니를 털어 붕대, 탈지면, 구급약품 등을 구입하고 머큐로크롬으로 적십자 표지를 만들어 완장을 두른 후 들것 10여 개를 구비하고 중앙청으로 향했다. 이들은 막아서는 경찰들의 제지를 뚫고 부상자들을 지혈조치를 한 후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 한편에서는 급히 종이에“피를 구함”이라고 써서 붙이고 수혈자를 기다렸다. 이 종이가 나붙은 지 1시간도 안되어 500-600명을 헤아리는 채혈 희망자가 대학병원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의대생들은 이 날 중앙청 앞에서 서대문으로, 내무부 앞으로, 동대문 경찰서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부상자 구료활동을 하였다(서울대학교 의과학생 자치위원회, 161-167쪽 ;『 대학신문』1960. 5. 2 2면). 연세대 의대 : 4월 19일, 서울역에 있는 병원 정문 앞으로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시위하는 광경을 보고, 잠시 후 신촌 본교생들이 광화문을 향해 시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의대생들은 오후 1시 경,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위를 감행하였다. 흰 가운을 입은 시위대는“학도여! 매쓰 들어 썩은 정치 수술하자!”, “부정선거 다시 하자!”, “경찰국가 배격한다!”, “경찰은 중립하라!”, “공산 오열(五列)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전진하다 시청 앞에서 신촌 연대생들과 만나 합세하였다. 이날 오후, 이들은 중앙청 앞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쓰러지는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운반하기에 바빴고, 특히 사격이 심했던 경기도청 앞과 무기고 앞에서 학생들이 감히 나서지 못할 때 총탄을 무릅쓰고 부상자를 운반함으로써 360여 명의 부상자를 세브란스 병원으로 운반, 치료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안국동에서 자유당 본부, 종로 화신, 남대문을 거치면서“경찰은 생명을 존중하라!”, “경찰은 이 이상 발포하지 말라!”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투쟁실기」, 사월혁명청사편찬회, 501-505쪽).)

      뒤에서 미처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다가 경찰의 총을 맞은 학생 시체가 의대 학생들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 가는 광경을 본 학생들은 차츰 흥분과 분노의 도가니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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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연세대학교 의대생들의 결의문]
      오후 2시 20분 경에는 중부소방서 앞 소방차와 중앙청 근방에 있던 소방차들은 모조리 흥분한 시위대가 탈취하였다. 이에 올라탄 시위대원들은 피 묻은 태극기와 윗저고리를 흔들면서 만세를 불렀고, 사이렌 소리도 요란하게 각기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시내 각처를 질주하였다. 시위대는 경찰 백차와 군기관 지프차까지 빼앗아 군중이 박수치는 가운데 질주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연세대학교 의대생들의 결의문]

      1. 부정으로 일관한 3·15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자.
      2. 살인경찰의 만행을 규탄한다.
      3. 경찰은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지키도록 하라.
      4. 학원에 있어서의 일절의 정치적 조종·간섭을 배격한다.
      5. 이상의 결의를 전학생들의 의사로 채택한다.

      [구호]

      一. 학도여! 메쓰 들어 썩은 정치 수술하자.
      一. 부정선거 다시 하자.
      一. 경찰국가 배격 한다.
      一. 경찰은 중립하라.
      一. 공산5열 물러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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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후퇴하는 시위대, 시경 무기고 습격 시도]
      경무대 앞에서의 총포사격으로 피를 흘린 시위대는 다시 뒤를 돌아 진명여고 입구, 국민대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8쪽 ;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조선일보는“이때 기자가 확인한 것만도 즉사자 7명에 부상자는 40여 명이나 되었다”고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학생 시위대는 서울대, 동국대, 연세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기대, (『경대학보』1960. 5. 15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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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학생시위대, 방송국 점령 기도]
      시위가 절정에 달한 오후 2시 반 경, 태평로 일대의 시위대는 아카데미극장(현 코리아나 호텔 자리) 뒤쪽에 있는 서울중앙방송국 제2방송국의 점령을 기도하였다. 시위대는 탈취한 소방차 2대를 앞세우고 방송국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총회관(현 태평로 조선일보 뒤에 위치) 앞에서 경비 중인 군인들을 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2쪽. 군인들이 시내 요소에 경비를 서기 시작한 것은 밤 10시 반 이후 서울시내에 배치된 후이기 때문에 이 시각은 아직 군인이 나올 시각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기록은 경비병을 군인으로 착각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무방비 상태였던 남산의 제1방송국에도 수 백 명의 양정고등학교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의 목적은 그저 시위사실을 정확히 방송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송국 간부들은 학생들 앞에 나가서“국영방송으로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였다. (한국방송협회, 『한국방송 70년사』, 1997, 303쪽)

      반공회관과 서울신문사 방화

      오후 3시 경, 경무대 앞에서 경찰관의 사격을 받아 수많은 학생들이 죽어가자“우리 학교 학생이 죽었다”,“ 내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으면서 세종로 쪽으로 돌아오던 1천여 명의 시위대는“공산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부르며 반공회관에 방화하였다. (세종로 현 미 대사관과 현 KT본사 사이에 위치했던 반공회관은 공산치하의 암흑상을 드러냄으로써 국민들의 반공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1958년 개관되었다. 반공회관 앞에는 맥아더 동상이 서 있었다.)

      수 분 후 시위대가 태평로파출소에 이르자“파출소를 불 질러라”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오후 3시 40분 경, 시위대의 선두가 파출소를 향해 다가가니 안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관이 카빈총을 쏘았다. 어린 중학생 1명이 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자 선두에 있던 몇 명이 파출소로 돌입, 휘발유 통에 불을 질러 던졌다. 당황한 경관 2명이 총을 쏘면서 달아나자 뒤따른 시위대원들이 추적하여 이들을 잡아 발로 밟아 죽인 후 시체를 끌고 다녔다.

      시위대는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시 전진하여 서울신문사 앞에 다다랐다.“ 서울신문사를 때려 부셔라!”“, 불태워 버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와!”하는 함성과 함께 시위대가 몰려들어 방화하였다. 완전한 자유당 정부 기관지이며 우리나라 신문사 시설로는 최대의 규모를 갖춘 서울신문사 4층 건물은 수만 명의 시위군중 앞에서 삽시간에 불길을 뿜으며 활활 타올랐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96쪽. 이 날 오후 6시 경, 서울신문사가 전소된 후 건물 내부에서 학생복을 입은 청년의 시체를 꺼내 서울신문사와 외무부 사이의 노상에서 죽은 시체 2구와 함께 앰뷸런스에 싣고 갔다고 한다『(한국일보』1960. 4. 20 조3면). 이날 서울신문사 방화로 입은 손실은 수 억대를 넘는다고 한다『(서울신문』1960. 4. 20 2면).)

      10분 후, 카빈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50여 명의 경찰관과 헌병들이 불타고 있는 태평로파출소 앞에 집결하여 시위대를 향해 일제사격을 개시하였다. 수 명이 쓰러지고, 총소리에 놀란 군중들은 조선호텔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광장에 가득 찼던 수만 군중들이 일시에 좁은 길로 몰려 닥치자 부상자들의 비명으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국일보』1960. 4. 20 조3면)

      그러나 경무대와 서대문, 남대문 쪽에서 발사된 총성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카빈총과 도끼를 든 학생들이 곳곳에 보였다. 또 총탄에 쓰러진 학생을 싣고 가는 앰뷸런스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시가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진영숙의 유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의 모든 동무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해서 손이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진영숙은 당시 14세로,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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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미국인도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옥상서 유탄 맞아]
      당시 미국대사관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서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침착하게 시위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외신기자들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취재하기에 바빴다. (당시 발간된 잡지『여원』과『비화 제1공화국』에는 진영숙 유서의 자필 원본 사진이 나와 있으나, 이 둘은 글씨체도 다르고 맞춤법도 다르므로 어느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다「( 민주혁명에 앞장 선 15세 소녀의 유서」, 『여원』, 1960. 7, 129쪽 ; 동아일보사, 『비화 제1공화국』6, 197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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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일부, 이기붕 집 앞까지 육박]
      12시 경, 주류부대가 경무대를 향하고 있는 동안 성균관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은 광화문을 분기점으로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향하였다. 성균관대는 원래 20일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일 오전 각 대학들이 시위하는 것에 고무되어 오전 11시 석조본관 앞에서“우리의 이 평화적인 시위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불의에 항거하며 정의를 좇을 따름이다. 오직 민주대한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이제 나섰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3·15선거는 사상 최대 최악의 선거였다”,“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민족정기는 살아있다”는 등의 6개조문의 결의문을 낭독한 후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섰다. 이들은 창경원(현 창경궁)을 지나 돈화문을 거쳐 종로통으로 들어서서 광화문에 이르렀다.

      광화문 로터리에서 시위대는 잠시 멈추어 서서 국회의사당으로 가자는 의견과 경무대로 가자는 의견이 대립되었다. 잠시 후 시위대는 경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두가 경기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 다른 학교의 시위대가 경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성균관대 시위대는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가기로 결의하고 방향을 바꾸었다. (『한국일보』1960. 4. 20 조3면)

      오후 12시 25분 경, 시위대는 이기붕의 집 약 5미터 앞까지 육박하였다. 시위대가 서대문으로 향하자 경찰은 이기붕 집 못미처 송월동 로터리에서 이들과 충돌하였다. 학생 일부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자 대기 중에 있던 소방차가 붉은 물을 뿌렸다. 학생들이 벽돌로 응수하면서 속속 부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부상자는 적십자병원으로 운반되었다. 경찰은 병력을 집결하고 가끔 수 십 발씩 발사하였으나 시위대는 후퇴하지 않았다. 시위대의 선두는 태극기를 높이 흔들면서 애국가를 부르며 농성에 들어갔다. 약 600명은 노상에 주저앉고, 그 외 학생들은 서서“이 의장은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외쳤다. (조화영 편, 102쪽. 4월 19일 이기붕의 집은 이들 경찰뿐 아니라 4월 18일 고려대 시위대를 습격했던 깡패 일당인 유지광의 부하 40여 명도 함께 경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조선일보』1960. 4. 25 조2면).)

      오후 12시 40분 경, 신촌 방면에서 약 3천 명의 연세대와 홍익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아현동 고개에서 약 20명의 경관들의 제지를 받았으나 계속 전진, 서대문에서 남대문 시경 앞을 통과한 다음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쪽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합류하였다. (『한국일보』1960. 4. 20 조2면. 시위대가 경찰이 충돌하는 사이 이기붕 일가는 자택 뒷문으로 빠져나가 지프차를 타고 탈출하였다.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6군단으로 가서 이틀간 체류하고 21일 아침 9시 경에 돌아온 즉시 경무대로 가 이승만을 방문하고 요담하였다(조화영 편, 332쪽).)

      오후 3시 경, 경찰들이 학생들을 연행하여 이기붕의 집 건너편 동양극장으로 끌고 가자 시위대는 석방을 요구하며 극장에 돌을 던졌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그러나 저녁 7시, 이기붕 집 앞과 충정로 일대에서는 경찰들이 통금시간에 쫓겨 집으로 돌아가는 군중 속에서 학생만을 골라 허리띠를 끌러 양 손을 묶고 곤봉이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난타한 뒤 연행하였다. (이정길,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 : 4·19데모 수기」, 사월혁명청사편찬회, 523-524쪽. 동양극장으로 끌려간 학생들은 심한 타박상을 입고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고,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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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선린상업고등학교 학생들, 한희석 집 습격]
      청파동에 위치한 선린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 측의 저지로 시위가 좌절되자 산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부는 학교 담장을 넘어 연세대 시위대열에 합류하였고, 70여 명은 원효로 입구에 위치한 자유당 거물 한희석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한희석의 집은 당시에 보기 드문 분홍색 차일과 페인트로 담장과 건물을 도색하여 마치 외국인의 별장을 연상케 하는, 지하 2층과 지상 3층으로 된 웅장한 건물이었다. 주인이 모두 도주하고, 송아지만한 포인터 두 마리만이 지키고 있던 빈 집에서 학생들은 난생 처음 보는 고급 집기들을 야구 방망이로 부셔댔다. 학생들은 또한 지하실을 가득 채운 수입 설탕포대, 최고급 분유, 밀가루 포대, 양복지, 인삼, 녹용, 양주, 화장품, 수입 식품 등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며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호화의 극치였던 대저택은 삽시간에 흉가로 변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다시 시위행진을 계속하여 광화문까지 진출하였다. (이정길, 5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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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내무부 앞에서도 실탄 발사]
      각 대학 시위대는 아침부터 산발적으로 을지로 입구 내무부 앞에 모여“내무장관은 마산사건을 해명하라! ”“, 국민을 우롱하는 내무부는 필요 없다! ”는 등 구호를 소리 높이 부르짖으며 질서정연하게 시위를 하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서울대생들과 합류하여 기세를 올리던 건국대 학생들도 다시 행진을 시작하여 남대문, 서울시경찰국 앞, 한국은행, 미도파 앞을 거쳐 오전 11시 20분 경 내무부 앞에 이르렀다. 이들은“내무장관은 마산 학생들을 모두 석방하라”,“ 정의의 싹을 죽이지 말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주자앉아 농성에 들어갔다. M1소총을 든 경관들이 탄 트럭 한 대가 급파되고, 철책의 내무부 바깥문이 닫히고 잠시 동안 그 앞은 난장판이 되었다. 얼마 후 동국대학을 비롯하여 서울대 사대, 성균관대 학생들이 합세하자 다시 기세를 올리면서 시청 쪽으로 전진하였다.

      정오가 넘으면서 경무대 앞과 중앙청, 서대문 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질서가 무너지고, 시위대는 내무부 점령을 기도하였다. (김강준(당시 선린상고 2학년), 「민족의 분노 4·19!」,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대전·충남 4·19혁명 동지회, 『3·8민주의거』, 2005, 155-156쪽 ; 홍영유, 『사월혁명통사』제6권, 천지창조, 2010, 119-120쪽)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을 때 중앙청 앞을 떠나 내무부 쪽으로 온 중앙대 시위대 2천여 명은 여학생들을 선두로 내무부 정문 바로 앞에 연좌하였다. 이들은 결의문을 낭독하고 애국가를 부르며“내무장관은 나와서 부정과 협잡선거를 해명하라”고 외쳤다. 앞에 앉은 여학생들은 태극기를 높이 쳐들면서 발사자세를 하고 있는 경찰관들을 향해“이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다. 여기에 총을 쏘는 사람은 반역자다”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0-101쪽 ; 중앙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젊음과 사랑과 조국과」, 이강현 편, 181쪽)

      오후 5시 반 경, 보건사회부 벽에 계엄령 선포를 알리는 특보가 나붙었다. 내무부 청사 앞 도로에는 무장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받들어 총’ 자세로 겨냥하고 있었다. (조화영편, 97쪽 ; 중앙대학교 학생 자치위원회, 181-183쪽. 내무부 앞에서 중앙대학의 학·처장들이 마이크로 학생들의 귀교를 설득하였으나 별무소용이었다고 한다.)

      오후 6시 5분 경, 시위대가 또다시 내무부를 뚫고 들어가려 할 때 시청 쪽으로 부터 2대의 경찰 장갑차가 나타났다. 그 뒤로 2열종대의 경찰관이 뒤따라오며 소총과 경기관총을 발사하였다. (원각사는 현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근처에 위치했던 공연 극장으로, 경춘철도 사무실을 개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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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일부, 시경 점령 기도]
      을지로 입구 내무부 청사를 점령하려다가 맹렬한 총격으로 인해 실패한 시위대의 일부는 오후 4시 반 경 남대문 쪽에 있는 서울특별시 경찰국 쪽으로 몰렸다. 시위대원들이 소방차를 앞세우고 시경으로 몰려 들어가려는 찰나, 2층에서 시위대를 향해 겨누고 있던 총부리에서 일제히 불이 뿜었다. 차에 탔던 학생들이 산탄(散彈)에 맞아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이때 중앙청에서 남대문으로 통하는 길은 10여만 명의 군중으로 꽉 차 있었는데, 탈취한 자동차를 탄 시위대는 이들을 헤치고 소방차 사이렌을 울리면서 다녔고, 시위는 절정에 다달았다. 시위대는 피살된 동료의 시체를 차에 싣고 터질듯 한 소리를 외쳐댔다. 피를 본 학생들과 이에 가세한 시민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시위대는 시경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앞장섰던 학생 수 명이 총에 맞아 엎어지자 기세가 잠시 주춤해졌다. 다시 대열을 정돈하던 시위대는 급파된 군인들을 보고서야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조화영 편, 98-99쪽)

      을지로 입구 쪽 시위대의 후미는 장갑차로 완전히 차단되었고, 1천여 명으로 줄어든 시위대는 고립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갖가지 구호를 외쳐대며 전우가를 소리 높이 불렀다. 오후 6시 경, 전투복으로 완전무장한 경관이 2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왔다. 일부 학생들이 이들을 군인으로 오인하고 환성을 올렸다. 화다닥 뛰어내린 경관들은 후미의 장갑부대와 동시에 무조건 발사를 시작하였다.“ 따다다다!”총알은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누군가의“엎드려!”소리에 학생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렸다. 경찰은 맨 앞줄에 있던 여학생 4명을 개머리판과 구둣발로 무참히 짓밟고는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수위실로 가 감금하였다. 엎드렸던 학생들은 급하게 구리개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98-99쪽)

      오후 6시 30분 경, 미처 달아나지 못한 2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의 구둣발에 채이면서 중부서로 연행되어 갔다. 촉박해진 통금시간에 미처 귀가하지 못한 학생들은 구리개 뒷골목의 부국여관으로 몰려들었다. (구리개(銅峴)는 현재 을지로 2가, 즉 을지로 입구의 옛 이름이다.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었는데, 이 고개의 흙이 몹시 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을지로라는 이름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0월 1일부터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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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내 도처서 무차별 소탕사격으로 사상자 속출]
      일선전투를 방불케 하는 무장경찰대의 무차별 소탕사격이 시내 도처에서 개시됨에 따라 수 십 명의 사망자와 무수한 총상자가 발생하였다. 오후 4시 20분 경, 태평로파출소에서는 순경 3명이 달려드는 군중에게 실탄을 쏘아 2명을 즉사시켰다. 이를 목격한 군중들이 분노하자 순경들은 정복을 벗고 셔츠 바람으로 총만 들고 소공동에 있는 육군특무대 안으로 피신하였다. 흥분한 군중들이 특무대 앞으로 몰려들어“살인경관을 인도하라”고 외쳤으나, 특무대에서는 총격으로 응대하여 중학생 1명이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조화영 편, 96-99쪽. 경찰들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숨어 있다가 계엄령에 힘을 얻어 다시 나타나 보복발사를 한 것이라 한다(조화영 편, 101쪽).)

      계엄선포 후 오후 5시 경, 병력 집결 중에 있던 약 500명의 무장경찰대는 M1소총과 권총을 소지하고 2대의 경찰용 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면서 경무대 쪽에서 2열종대로 중앙청 앞 세종로 거리까지 산개하였다. 30분 후, 여태껏‘앉아 총’자세로 일렬로 나란히 앉아 총부리를 겨누고 있던 중앙청 앞의 경찰은 이때부터 2대의 장갑차를 앞세워가며 M1총, 카빈총, 기관단총, 권총 등을 일제 발사하며 마치 시가전이라도 하듯 한발 한발 세종로로 밀고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상태 하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총성으로 천지는 뒤흔들리고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후퇴하기 시작했다. 경찰 사격대가 반공회관까지 전진하자 세종로 네거리에 있던 1만여 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아직 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고 있던 8천여 학생들이 일어나서 경찰사격을 주시하였다. 경찰사격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물을 끼얹은 듯 시위대가 흩어진 세종로 네거리에는 5-6구의 시체가 뒹굴었다. 이때 돌연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 2명이 들것을 들고 시체 앞으로 뛰어들었다. 보는 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경찰은 이들에게 욕설을 퍼부을 뿐 차마 쏘지는 못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반공회관 앞까지 육박한 경찰병력은 잠시 동안 마이크를 통해 무마연설을 하였으나 세종로 광장의 시위대가 그대로 머물자 또다시 돌격태세와 함께 일제사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순식간에 세종로 광장을 진압하고, 다시 화신백화점 앞과 서대문, 의사당 쪽에 있는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계속하였다. (이효식, 247-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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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후퇴하는 시위대, 을지로·동대문에서 경찰과 격돌]
      중앙청 앞 경찰의 본격적인 소탕작전으로 세종로를 물러나와 서대문, 화신백화점, 을지로 쪽으로 분산된 군중은 또다시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격돌하였다. 을지로6가와 서울운동장 근처에서는 약 2천 명의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장시간에 걸친 사격전이 벌어졌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오후 6시 40분 경에는 동대문 경찰서를 포위한 시위대원들이 종로3가에 집결한 경찰관 30명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사격은 약 30분 간 계속되었는데, M1총에 맞은 학생 1명과 교통순경 1명이 총탄에 쓰러져 즉사하였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오후 7시 경, 혜화동 쪽으로 밀린 시위대는 동소문파출소를 다시 습격, 내부를 파괴한 뒤 삼선교와 돈암동 일대를 오르내리면서 기세를 올렸다. (『한국일보』1960. 4. 20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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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통금 후 무장기동대화한 시위대]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7시,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미처 해산하지 못하고 밀린 일부 시위대원들은 오후 8시 경 동대문 밖에 약 700명 정도가 집결하였다. 이들은 성동역 근처에서 전차 1대를 징발하여 종로6가 쪽으로 돌입하려다가 경찰의 실탄발사로 숭인동까지 후퇴하였다.

      밤 9시 경, 시위대는 택시·트럭·버스 등 30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한국일보』1960. 4. 20 조3면)

      아직도 흥분이 절정에 달해있던 이들은 서울운동장 주변에서 몰려온 무장대들과 합류하였다. 총을 소지하게 된 시위대는 뒤따르는 경찰관에 응사하면서 장시간 대치하였다. 밤거리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공포를 자아냈다. 군대가 서울로 진주하기 시작하자 기동 시위대는 의정부 쪽으로 향하였는데, 도중 창동지서를 불태웠다. (한국일보 기사에는 차량 40대로 기록되어 있다『(한국일보』1960. 4. 20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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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고려대로 모인 시위대, 계엄군과 조우]
      탈취한 차량 30여 대에 분승한 시위대는 약 40자루의 소총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맨주먹이었던 시위대는 마치 소규모의 무장기동대화한 장비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밤 10시 경, 시가 동쪽으로 행진하던 이들은 라이트와 사이렌을 총동원하고 탱크를 앞세워 서울로 들어오는 계엄군 1개 연대 병력을 보고 도주하였다. (『육군본부군사감실 편, 『4293년판 육군연감』, 4294(1961), 38-39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3-104쪽 ;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진로를 잃은 시위대 약 1천 명이 고려대 강당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한 계엄군은 고려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마이크를 통해 빨리 나오라는 선무공작을 했다. 그러나 투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육군본부의 기록에 의하면 군대가 서울로 진주할 때 이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공포를 쏘면서 들어올 것인가, 사이렌을 울리며 들어올 것인가를 논의한 끝에 사이렌을 울리기로 결정하였다 한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43-44쪽). 만약 이때 군이 공포를 쏘면서 진군했다면 군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은 퍽 나빠졌을 것이다.)

      회담 장소에 들어선 조재미 사단장은 그곳에서 시위대원들이 메고 다니다가 이곳에 안치한 것으로 추측되는 태극기로 덮은 시신을 발견하고는 철모를 벗고 경건한 조의를 표하였다. 이 광경을 본 시위대원들은 눈물을 흘렸고,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 사단장은 이들에게 이 중 4명의 대표들이 고위 당국자들과 만나 그들의 요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알선하여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시위대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무장해제와 해산에 동의하였다. (『고대신보』, 1960. 5. 3 2면 ;『조선일보』1960. 4. 20 조1면, 석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5쪽. 고려대로 들어간 시위대 숫자에 대해 조선일보에서는“약 1,200여 명”, 연행자 숫자는“40여 명”이라고 보도하였으며『(조선일보』1960. 4. 20 조1면), 육군본부 기록에는“1,500명 이상”으로 되어있다(육군본부군사감실편, 39쪽). 4월 25일 교수시위 주도자 중 하나인 이상은 교수는 이튿날 나가보았더니 시위군중이 하룻밤을 세운 고려대 강당(서관교사)는 유리창 하나 파손되지않았다고 한다(이상은,「교수단 데모에 이르기까지」, 이강현 편, 205쪽).)

      시위대 대표들을 데리고 사단본부로 돌아온 사단장은 그들을 대기시켜놓고 상부와 절충 끝에 중앙청으로 국무위원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정렬 국방장관은 경무대 방문으로 부재중이었고, 다른 장관들은“폭도를 어떻게 만나느냐”고 하며 사단장과의 면접조차 거부하였다. 체면을 잃고 사단본부로 돌아온 조 사단장은 이 내용을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로 보고하였다. 사령관 측은 즉석에서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부녀자를우선적으로 석방시키고, 학생으로 신분이 확인된 자들도 무조건 석방시키라고 하였다. 단, 방화와 살인 등을 한 자들은 연행할 것이며, 학생대표 면담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조치하겠다고 지시하였다.

      날이 밝자 계엄군은 그 포위망을 압축하여 강당에서 농성 중이던 시위군중 중 무기를 가진 자 30여 명을 연행하고, 나머지는 전원 석방하였다.그러나 연락장교 이석봉 준장의 지프차는 실망한 시위대에 의해 모두 파손 당하였다. (조화영 편, 329-330쪽. 이 당시는 군대와 시위대와의 관계가 아직 명확한 하나의 선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고, 군으로서는 시위대가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상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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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아일보 발표 4월 19일 사상자 명단]
      <사망자>
      ●손중근(23, 서울대 사대 국문과 3년) ●17세가량의 소년(순화병원) ●서대문 이기붕 집 앞 2명 즉사 ●태평로파출소 앞 2명 즉사

      <부상자>
      순화병원
      ●나용주(홍익대 미술과) ●박원배(연세대 정외과 4년생) ●전대길(동국대 2년생 타박상) ●이동인(동국대 법과 2년생 넓적다리 관통상) ●고영수(22, 서울대 미대 2년생 파편찰과상) ●이회백(27, 서울대 의대 4년생 다리관통상) ●박장엽(연세대 의대 4년생 총상) ●김정만(동성고 3년생 총상)

      세브란스병원 ●김재덕(21, 서울대 사대) ●양병옥(16, 관철동 246) ●기영린(20, 강문고) ●임화연(19, 대경상고) ●박광일(19, 금곡동 265) ●김신운(20, 여, 서울대 사대) ●박홍규(21, 동국대생) ●박원대(21, 성신대생)

      수도의대 제2병원
      ●이용준(건국대 3년생, 다리총상) ●오광식(18, 흥국고 2년생, 다리총상) 외 ●이진면(29세, 아현동 85-39, 왼쪽 넓적다리 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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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아일보 발표 4월 19일 파괴·소실된 건물과 탈취·파괴된 차량]
      건물피해
      전소 : ●반공회관 반공청년단 본부 ●서울신문사 ●태평로파출소 ●정릉파출소 ●돈암동파출소 ●안암동파출소 ●종로5가파출소 이상 7곳 일부 파괴 : ●세종로파출소 ●부흥부 ●문교부 ●외자청 ●자유당 중앙당부 ●적선동파출소 ●광화문파출소 ●중부소방서 이상 8곳

      차량피해
      ●경찰백차 1대 ●소방지프차 및 소방차 7대 ●군용 트럭 1대 ●민간 트럭 1대 ●군용 지프차 4대 ●서울신문사 차 4대 ●연합신문사 차 1대 ●세계일보사 차 1대 ●기타 파괴 및 소실 3대 등 이상 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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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조선일보 발표 4월 19일 피해 건물과 차량]
      전소된 건물(14)
      ●서울신문사 ●반공회관 ●통인동파출소 ●태평로파출소 ●용두동파출소 ●고사(高砂)파출소 ●동묘파출소 ●북선동파출소 ●종암파출소 ●정릉파출소 ●돈암동파출소 ●안암동파출소 ●종로5가 파출소 ●신설동파출소

      일부 파괴된 것(16)
      ●원남파출소 ●종로2가파출소 ●을지로1가 파출소 ●을지로3가 파출소 ●을지로6가 파출소 ●남선파출소 ●서선파출소 ●성북동파출소 ●광화문파출소 ●적선동파출소 ●중부소방서 ●정릉2동 동회 ●자유당 중앙당부 ●문교부 ●부흥부 ●외자청

      차량피해(22대)
      ●경찰 백차 1대 ●소방차 7대 ●군용트럭 1대 ●군용 지프차 4대 ●서울신문사 차량 4대 ●연합신문사 차량 1대 ●세계일보사 차량 1대 ●기타 파괴 및 소실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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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경찰들의 가혹한 보복행위]
      19일 오후 4-5시 경부터 계엄령에 힘을 얻은 시경 관내의 각 경찰서는 시위해산을 위해서가 아닌 보복발사를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을 조준사격하거나, 2-3명씩 짝을 지어 돌아가는 학생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지프차에 태워 곤봉으로 치고 발길로 차면서 보복행위를 한 것이다. 이날 밤 경찰이 연행한 학생들은 무려 704명이나 되었다. 경찰은 이들을 유치장에 가두고, 밤에는 불꺼놓은 지하실에 끌고 가 수 십 명의 경찰들이 떼를 지어 몽둥이로 후려갈기기도 했다. 이처럼 야만적인 고문은 시위학생들을 빨갱이로 몰거나 자백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사찰계로 끌고 가 시위를 주동했다는 자백서를 쓰도록 강요하거나 허위자백을 받아낸 경우도 있다. 이 날 이후 경찰의 보복으로 부상, 사망한 학생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육군본부군사감실 편, 39-40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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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학생들의 구호]
      4월 19일 시위 시에 학생들이 외친 구호는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있다”
      “민주 위한 학생데모 총칼로써 저지 말라”
      “학원자유 보장하여 구국애족 선봉 되자”
      “이놈 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 한다”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다”
      “권력에 아부하는 간신배를 축출하라”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 허용하라”
      “경찰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 말라”
      “정부는 마산사건에 책임지라”
      “부정공개투표의 창안집단을 법으로 처단하라”
      (조화영 편, 101-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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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학생대표 민주당 방문, 경찰발포중지 요구]
      서울시내 시위학생 대표 일부는 19일 오후 4시 경 민주당 의원들을 방문하고 경찰이 발포를 중지할 것과 연행학생을 전원 석방하도록 당국자와 교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내무부 당국자가 부재하였던 관계로 민주당 의원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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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국대 학생들, 시체 인도 요구]
      경무대 입구에서 시위대의 선두에 나섰던 동국대 학생대표들은 경찰들이 경무대 안에 시위대원의 시체 12구를 유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시체만 인계해주면 물러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끝내 이들의 요구에 불응하고 스피커를 통해“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돌아가라”고만 거듭 통고하다가 급기야 오후 5시 경부터 일렬횡대로 시위대의 머리 위를 향해 일제총격을 가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0 조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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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중·고등학생 중심 시위, 사상자 발생]
      19일 부산에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청년 시민들이 합세해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오전 10시 반 경, 시내 좌천동에 있는 금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들어갔으나 약 50미터 지점 골목에서 경찰 측의 공포로 저지되었다. 오전 11시, 전포동에 있는 부산공업고등학교 학생 약 2천여 명이 서면(西面) 로터리를 거쳐 제일제당 회사 앞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들은 400명의 경찰대와 4대의 소방차가 물을 뿜자 투석으로 대항하다가 해산하였다.

      그러나 700여 명의 학생들은 다시 모여 철도길을 따라 범일동의 좌천(佐川)지서 앞까지 전진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오전 11시 25분, (『동아일보』1960. 4. 20 석3면)

      또한 11시 정각부터는 경남공업고등학교 학생 약 700명이 시위에 들어갔다가 11시 45분 경 해산하였다. 그러나 12시 45분부터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 학생 약 2천 명과 (『조선일보』는 가양동 방면으로 향한 부산상고 학생이 약 5백 명으로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시내로 향한 시위대는 좌천동파출소 유리와 동부산서 유리 등을 파괴하고 오후 2시 40분 경 부산 소방서 앞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소방차를 배치하고 있는 소방관들에게 투석하여 그들을 후퇴시킨 후 소방차에 발동을 걸고 호스로 소방서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부산일보』1960. 4. 19 석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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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3천여 군중 부산진 경찰서 점거, 서면 일대서 격돌]
      오후 3시 경, 부산진경찰서 앞 로터리에서도 6명의 피살자와 수 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각층 시민들이 합류된 약 3천 명의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부산진서를 일시에 점거하고 3층짜리 경찰서 건물을 완전 파괴하였다. 이들은 경찰서 앞에 서있던 지프차 2대와 소방차 1대, 증원 무장경찰을 싣고 오던 트럭도 불살랐다. 건물과 넓은 로터리를 빈틈없이 메운 시위대는 경찰의 집단사격 속에서도 분산되지 않고 1시간 가량 대치하였다.

      기관총과 수류탄까지 동원한 경찰은 서면 일대를 완전히 공포의 거리로 내몰았다. 시위군중은 악을 쓰며 창문 없는 건물 안에 진을 친 발포경찰대를 향해 돌멩이로 대항하였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시위대원은 지체 없이 백색의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와 병원으로 싣고 갔다. 오후 3시 40분 경, 군중들이 경찰서에 불을 지르려하자 실내에 있던 무장경찰대가 일제히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고, 총성은 더욱 심해졌다. 오후 4시 10분 경, 피투성이로 나둥그러진 피해자는 30여 명에 가까웠다. 피를 본 군중의 아우성은 피를 토하는 것 같았다. 4시 40분 경, 군중들의 기세가 약화되자 경찰은 주변 일대의 골목과 건물 속에 숨어있는 시위대원을 찾으러 다녔고, 때때로 공포를 쏘아 몰려드는 군중들을 물리쳤다. (『부산일보』1960. 4. 20,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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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동(東)부산경찰서 앞에서도 시위]
      오후 4시 경, 학생보다 20세 전후의 청년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여한 시위대가 다시 동부산경찰서 앞으로 쇄도하였다. 경찰서가 포위되자 경찰은 기관총과 최루탄, 소총 등을 쏘았다. 영주동파출소 앞에서 되돌아선 시위대는 다시 서면 쪽을 향해 달리면서 초량 제1파출소와 제2파출소를 습격하고, 계속 수정동파출소를 습격하여 서류들을 파기하고 건물 일부를 파괴하였다.

      오후 4시 10분 경, 범일동 교통부 앞에 있던 시위대 일부가 반대방향에서 내려오는 약 200명의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이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동부산서로 가자”고 외치면서 뛰어가 동부산서 주변에 머물던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5시가 넘은 시각까지 이 주변에서 서성였다. 시위대원 3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부산일보』1960. 4. 20 조3면)

      이로 인해 비가 내리는 이날 오후 동부산서를 기점으로 한 북(北)부산 일대에는 한 때 총성과 돌팔매질의 대전으로 공포와 전율의 도가니를 이루었다. 총탄에 맞은 중부상자는 범일동 주외과로 옮겨졌다. 오후 5시 경부터 시위대원들은 해산되고, 6시부터 는 중무장한 군인과 탱크도 등장하여 시내를 순회하였다. (『부산일보』1960. 4. 20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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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실탄 발포로 사상자 수 십 명 발생]
      19일 오전 경남공고와 부산상고 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가 끝난 후 오후에 다시 일어난 경남공고 학생들과 데레사여고 학생들은 경찰관의 실탄발포에 격노해 수 개 처의 경찰관서를 돌팔매질로 파괴하고 방화하였다. 도중 경찰발포로 1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오후 7시 반 현재 총상을 입고 시내 4개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다. 경찰에서는 시위에 가담한 학생 및 청년층 50여 명을 연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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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광주고등학교, 광주 학생시위에 불을 지피다]
      19일 오전 10시 40분 경부터 광주시내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광주고등학교 학생 약 500명이 수업을 중지하고 운동장으로 나와“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감행할 기세를 보이자 급거 출동한 경찰기동대와 교장의 무마로 운동장에서 실랑이를 하였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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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광주여고 비롯, 시내 학생 거의 합세]
      오후 1시 20분, 200명가량의 광주여고생들도 교사의 제지를 무릅쓰고 시내로 몰려나와“학원에 자유를 달라! ”,“ 평화적인 데모를 방해하지 말라! ”고 외쳤다. 광주고 학생들도 연행된 학생들이 풀려나자 이를 계기로 전교생이 총궐기하여 스크럼을 짜고 학도호국단가를 부르며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연행된 학생 수는 기록마다 모두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동아일보에는 연행된 학생이 60명으로 되어있으나『( 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일부 기록에는 30명으로 되어있고(임인수, 257쪽), 또 다른 기록에는 48명으로 되어 있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59쪽 ; 김재희 편, 143쪽 ; 『전남일보』1960. 4. 19 1면).)

      오후 1시 50분 경, 500여 명의 광주상고 학생들도 1천여 명의 광주고 학생들과 합류하여 금남로 2가에서 달려드는 경찰 쓰리쿼터와 백차를 때려 부셨다. 광주고, 조선대부속고등학교(이하 조대부고), 광주공고, 광주상고, 광주여고 등은 학교별로 시위대열을 이루었고, 광주일고, 사레지오고등학교, 수피아여자고등학교, 광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전남일보』1960. 4. 19 1면 ; 김재희 편, 143-144쪽 ; 임인수,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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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경찰과의 협상도 무효]
      노도와 같이 충장로2가에 이른 약 5천 명의 시위대는 셋으로 나누어져 광주경찰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호남신문사 앞 경찰서로 통하는 도로에 진을 치고 애국가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이 대열은 나일론 잠바를 입은 18세가량의 공고 학생들이 앞장섰다.

      주로 조대부고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대의 일부는 도지사 관사 앞 통로로 몰려와 사세청(司稅廳: 국세행정기관)으로 통하는 경찰서 뒤편으로 육박했다. 이때 광주경찰서수사계장과 사찰계장이 나와서 시위대원들에게 요구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키가 큰 학생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①경찰은 마산 사건을 책임지고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②광주고와 광주공고에서 연행된 학생을 즉시 석방하여 우리에게 인도하라, ③학원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고 경찰은 평화스러운 시위대에 횡포를 가하지 말라는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경찰이“첫째 조건은 중앙에서 처결할 문제이고, 연행한 학생은 이미 석방하여 한 사람도 없다”고 답변하자 시위대원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우리가 확인하겠다”고 대들었다. 이때부터 최루탄이 펑펑 터졌다.“ 사기당했다”고 아우성치는 학생들은 연기 속에서 눈을 비비며 눈물을 흘리면서“광주학생 살아았다!”고 소리소리 외쳤다. 최루탄은 계속 터졌고, 떨어진 최루탄을 주워서 다시 경찰 쪽으로 던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오후 3시 15분 경 숨 막히는 한 고비 격전을 마친 다음 시위대는 다시 나누어져서 일부는 금남로로 빠져나가고 다른 일부는 충장로를 거쳐서 동방극장 앞으로 가 이승만 사진이 걸려있는 자유당 도당 사무소를 부셔버렸다. 성난 사자처럼 흥분한 시위대는 유문동파출소에서 다시 합세하여 파출소를 돌과 곤봉으로 파괴하고 문서를 흩어버렸다.

      한편 소방서를 습격한 상고와 광주고 학생들은 동명동으로 빠져나가 도청 앞을 지나서 금남로로 접어들어 행진하다가 유문동파출소를 부수고 돌아오는 시위대와 합세하여 약 3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여기에는 수 십 명의 대학생들도 있었으며, 광주농업고등학교, 숭일고 등 시내의 각 고등학생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대열을 정비하여 학도호국단가를 부르면서 금남로1가 네거리에 다달았다. 고등학생이 중심인 시위대에 시민과 대학생들이 속속 합류하였다. (임인수, 258-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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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시위대,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 감행]
      오후 5시 20분 경, 이때는 이미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시점이었다. 경찰은 이때부터 공포를 쏘기 시작했다. 최루탄이 수없이 터졌다. 시위대가 대열을 정비하여 질서 있게 진격해 오자 경찰국장 관사 앞에 대기하고 있던 2대의 소방차가 붉은 물을 뿌리며 서서히 접근하였다. 이때 공고생 한 명이 경찰 바리케이드로 접근하면서 돌을 던지자 경찰도 일제히 돌을 던지기 시작하여 시위대와 경찰 간에는 치열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시위대가 던지는 돌에 경찰의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격을 감행했다. 경찰은 마구 공포를 쏘고 소방차는 붉은 물을 뿌려댔다. 극도로 흥분한 학생들은“소방차를 부수자”고 외치며 투석으로 육박했다. 이때 금남로 거리는 최루탄 연기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시민들은 학생들이 눈을 씻을 수 있도록 군데군데 세숫대야에 물을 떠놓아 주었다.

      학생들은 소방차를 완전히 포위하고 수 명이 차체에 올라붙었다. 당황한 운전수는 도망을 하고 학생들은 드디어 소방차를 탈취했다. (『전남일보』1960. 4. 25 3면 ; 임인수, 260쪽 ; 김재희 편, 148-149쪽 ;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69-171쪽)

      또한 우체국 쪽으로 달아나는 학생들의 등 뒤에 최루탄을 쏘면서 추격하는 바람에 수 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을 입은 학생들은 동료들에 부축되어 도주하였으나 미처 도망가지 못한 학생들은 부근의 다방과 음식점으로 피신했다. 이로써 약 40분간의 치열한 투석전은 끝났다. (김재희 편, 148-149쪽)

      오후 6시, 경찰 백차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마이크로 계엄령이 선포된 것과 야간 통행금지 시간이 오후 8시부터 라는 것을 강조하며 학생과 시민들의 귀가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붉은 물을 뿌리는 소방차에 투석을 하면서“광주학생사건에 봉기했던 선배들의 뒤를 따르자”며 행진을 계속하였다. (『전남일보』1960. 4. 26 3면 ; 김재희 편, 148-150쪽 ;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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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계엄선포에도 불구, 시위 더욱 가열]
      오후 6시 30분 경 계엄령 선포가 완전히 시내에 알려졌다. 경찰 백차는 가두방송으로 이를 알리며 돌아 다녔고, 방송국에서도 계엄사령관의 경고문을 방송하면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불러들이라고 종용하였다. 시민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거리에 나와서 서성거리면서 목이 터지도록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원들은 계엄령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스크럼을 짜고“역적의 공산당을 잡으러 가자!”하고 멸공가를 부르짖으면서 제지하는 경찰관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때 담양, 장성 등의 인근 경찰서에서 응원부대가 와 훨씬 강세된 경찰병력은 콩 튀듯이 공포를 쏘았다. 시위대는 투석으로 대항하면서 일진일퇴하였다. 금남로 법원 앞에서 경찰대와 충돌한 시위대는 경찰관과 맞붙어서 여학생들이 날라다주는 돌멩이로 싸웠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인해 학생 여러 명이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끌려간 학생들은 사복형사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임인수, 260-261쪽)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충장로를 오르내리던 중, 어느 청년 하나가“월산동으로 가자!”고 외치자 시위대는 일제히 함성을 올리면서 파도같이 몰려 내려갔다. 이들은 도중 충장로 파출소를 돌과 곤봉으로 파괴하고 역전통을 통과하여 월산동파출소에 이르렀다. 아직 남아있던 수 명의 순경들은“물러나라”고 외치는 시위대의 소리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쳐버리고, 시위대원들은 곤봉과 돌멩이로 파출소의 기물이며 창살을 닥치는 대로 부셔버렸다. (『전남일보』1960. 4. 27 3면 ; 4·19혁명 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72쪽)

      여기서 대열은 다시 양동시장을 거쳐 서중 남쪽 도로를 통과하여 일부는 충장로로 머리를 돌리고 일부는 서중 정문 앞을 통과하여 유문동파출소로 향하였다. 유문동파출소를 습격하고 난 시위대는“광주학생 만세!”를 연창하면서 다시 금남로로 올라왔다. 그들은 금남로5가 입구 네거리에 이르기까지 학도호국단가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들은“학생을 무수히 연행한 계림동파출소로 가자!”고 외치는 상고 학생의 주장을 따라“와!”하고 계림동으로 몰려갔다. 지나갈 때 역전파출소를 부수려 했으나 경찰이 대항을 포기하자 선두는 그대로 지났으나 시위대 뒤편에서는 파출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손했다. 그 길로 계림동파출소에 다다랐는데, 경찰과 약간 충돌했으나 결국 함락시키고 파출소를 산산이 부셔버렸다. 계림동파출소를 파괴하고 돌아선 시위대는 부상 입은 동료의 어깨를 부축하고“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부르면서 다시금 도심지로 행진해 들어왔다. 이때 통금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전남일보』1960. 4. 28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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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통금도 아랑곳 없이 광주학생의 피는 끓고 있다]
      한편 이날 밤 7시 넘어서부터 역전 광장에서는 일찍 저녁을 먹고 나온 학생들에 의해서 새로운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이 시위대에는 나이 어린 사레지오중학교 학생들도 끼어 있었고 그 밖에 광주농고 및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들은 금남로로 솟아 올라오면서 경찰서를 습격하려다가 학동으로 빠져나가 학동파출소에 투석하였다. 그 순간 총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한 소년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광주 4·19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 전남일보』1960. 4. 28 3면 ; 김재희 편, 150-152쪽)

      한편, 광주여관 앞과 전남일보사 인사관 앞은 시위대로 빽빽이 들어찼으며 수효는 어느새 1만 여 명을 헤아렸다. (이 소년은 후에 강정섭으로 밝혀졌는데, 전남대 의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강정섭의 신원은 4월 28일에 가서야 밝혀졌다(4·19혁명 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73·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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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광주 경찰서 앞에서 시위대에 실탄 발사, 사상자 발생]
      오후 9시 경, 점차 숫자가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경찰서로 향하였다.“ 폭력경찰 때려 죽여라!”,“ 민주역적의 소굴 경찰서를 쳐부수자!”등을 외쳤다. 시위대는 광주경찰서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그 앞에서“광주 학생의 피는 끊고 있다!”,“ 몽둥이 경찰 죽여라!”,“ 선량한 민주의 사도, 연행 학생 즉시 석방하라!”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제지하였다. (임인수, 261쪽. 동아일보는 학생 외에도 많은 청년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0 석3면).)

      이날 밤 약 300명이 수색에 의해서 붙들렸는데, 이들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연행되었다. (일부 기록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9시 40분 경에 이루어졌다고 한다(4·19 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89쪽).)

      오후 10시 반까지도 광주법원 앞 광장에서는 농성이 계속되었고, 총성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전남일보』1960. 4. 29 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0쪽 ; 임인수, 261-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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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광주 4·19 사망자 및 부상자 명단]
      사망자
      ●고중석(남 16, 무직, 계림동 2구 28방) ●김재복(남 18, 무직, 서동 1방) ●이귀봉(남 19, 속성학원생, 진도군 고금면 고성리 ●강정섭(남 17, 노동, 백운동 32방) ●박순희(여 21, 양제직공, 금동 216) ●장기수(남 18, 속성학원생, 금남로 5가 294) ●김준호(남 19, 목공, 양동 1구 39방)●최금동(남 29, 경찰관, 경찰의 사격으로 사망) ●강정섭(학동파출소 습격시 사망) 이상 9명

      부상자
      ●오권식(남 12, 학생, 충장로 4가 30) ●류윤성(남 12, 학생, 충장로 1가 32) ●강영원(남 18, 학생, 대인동 12방 57) ●황영운(남 13, 학생, 구동 47의 4) ●김성수(남 13 학생, 류동 70)●이혜택(남 18, 학생, 계림동 49) ●이정근(남 38, 도의원, 계림동 1구 483) ●박청석(남 20, 학생, 학동 1구 28방) ●김서운례(여 51, 무, 금남로 4가) ●박해룡(남 20, 무, 대인동 23) ●박자용(남 27, 무, 서석동 6) ●강주형(여 25, 무, 양림동 6) ●김숙(여 19, 무, 림동 12) ●박종대(남 17, 학생, 계림동 1구 904) ●최영자(여 19, 학생, 학동 1구 14방) ●이준희(남 22, 학생, 학동 2구, 841) ●정삼선(남 20, 학생, 학동 2구 11방) ●이해학(남 18, 학생, 남원읍 중남리) ●박노필(남 18, 학생, 남동 116) ●김동현(남 18, 학생, 북동 242) ●김영진(남 16, 점원, 충장로 5가) ●이행송(남 18, 무, 북동 89) ●차귀환(남 26, 학생, 충장로 5가) ●박천조(남 22, 학생, 산수동 14방) ●황인도(남 15, 학생, 월산동 13방) ●송태홍(남 22, 학생, 등용동 대우리) ●박래주(남 21, 학생, 구동 15) ●박형근(남 48, 무, 학동 2구) ●김녹영(남 40, 무, 대의동) ●임춘성(남 32, 무, 충금동) ●민란식(여 31, 무, 계림동 1구) ●박경태(남 21, 무, 서호동 10방) ●박정용(남 38, 상업, 담양군 무정면 동산리) ●이인주(여 15, 무, 금동 22방) ●곽만철(남 20, 직공, 백운동 31방) ●서윤태(남 19, 이발사, 서동 11) ●소청일(남 18, 무, 황금동 23) ●김재덕(남 19, 이발사, 서동 11) ●유기학(남 16, 학생, 류동 13방) ●김관균(남 17, 학생, 동명동 154의 10) ●김두현(남 18, 무, 서석동 14방) ●정우하(남 18, 학생, 누문동 56) ●신영섭(남 19, 학생, 림동 91) ●고몽우(남 47, 무, 송정읍) ●고선주(남 48, 무, 송석동 석정리) ●성홍기(남 51, 무, 방림동) ●고병옥(여 22, 무, 남금동 216) ●임춘철(남 13, 학생, 동명동 2구 12방) ●고홍소(남 19, 학생, 효죽동 31방) ●한성기(남 44, 노동, 계림동 1구 50방)●정극로(남 19, 학생, 상무동 12방) ●조경호(남 17, 학생, 학동 1구 15방) ●이묘순(여 13, 학생, 동명동 6방) ●오교풍(남 14, 무, 충금동 13방) ●황주영(남 18, 무, 양동 1구 26방) ●최세영(남 19, 학생, 산수동 24방) ●유상임(여 18, 학생, 방림동 5방) ●강용원(남 21, 학생, 계림동 1구 536) ●박래현(남 19, 학생, 양동 1구 29방) ●안상은(남 31, 무, 방림동 7방) ●김호준(남 27, 노동, 효죽동 11방) ●김의형(남 17, 학생, 계림동 1구 12방) ●김영숙(여 19, 무, 계림 2구 664) ●모수일(남 17, 학생, 림동 23방) ●서운학(남 21, 학생, 동명동 2구 8방) ●김도암(남 19, 학생, 동명동 5방) ●박귀철(남 21, 무, 서동 8방) ●박유성(남 21, 무, 동명동 1구 27방) ●한경호(남 27, 무, 대인동 265) ●이해경(여 17, 학생, 서동 7방) ●송기영(남 15, 학생, 양동 1구 6방) ●정담양(남 27, 무, 방림동 13방) ●이길홍(남, 학생, 학동 1구 27방) 이상 7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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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경북대학교 학생들, 서울 시위 소식 듣고 시위전개]
      19일 오후 3시, 대구에서는 18일 서울에서의 고려대 시위와 19일 오전 서울에서의 대대적인 대학생 시위소식을 접한 경북대학교 5개 단과대학 학생 2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다. (이 두 가지 기록에는 인명이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나와 있다. 여기서는 내용이 좀 더 상세한 『호남 4·19 30년사』의 기록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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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결의문]
      대운동장에 모인 2천여 명의 학생들은 결의문이 낭독되자 애국가와 교가를 고창하였다. 이들은“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군가를 부르며 대구역전, 중앙동, 남문시장, 도청을 거치며“억지폭력 독재정치를 물리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10분 후, 경북대와 대구공업고등학교 입구에서 시위대를 발견한 경찰은 신암파출소 앞에 트럭 한 대를 세워 길을 가로막고 무장경찰관 50여 명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학생대표와 경찰 측의 타협으로 도청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행진하였다. 역시 대구역전과 한국은행 대구지점에서도 트럭에 실려 온 경찰들이 대기 중이었으나 시위대는 도청 방향을 피해 중앙통을 거쳐 남문시장으로 향하였다.

      오후 4시 45분 경, 시위대는“정부는 마산사건을 책임지라”,“ 민권의 체면을 망치지 말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남문시장을 돌았다. 이곳에서는“구대(大邱大)는 무엇하나?”,“ 구대(大邱大)는 합류하라!”고 외쳤다. 도청 정문 앞 광장에서는 경찰과 약간의 옥신각신 끝에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은“도지사 나오라”,“ 마이크를 내놓아라”고 고함을 치면서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오후 5시 10분, 고병헌 경북대 총장과 이효상 문리대 학장 등 학교 책임자와 정·사복경찰관이 둘러선 가운데 오임근 도지사가 나와“이성을 잃지 말아주기 바란다. 지금 5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질서정연한 시위를 해주기 바란다”고 부탁하였다. 그는“3인조·9인조에 대한 해명을 하라”는 학생들의 요구에“나는 모르는 일이 다”라고 답하였다. 이어 마산사건 고문경찰관에 대한 조치를 묻는 질문에는“권한 밖의 일”이라고 말하였다.

      오후 5시 25분 경, 학생들은“마산에서 경찰에 구금된 학생들은 대검(大檢) 총장의 지시로 전부 석방되었다”는 총장의 답변을 듣고 광장을 떠나 시가행진을 하고 헤어졌다. (일부 기록에는 경북대 학생들의 결의문을 ①구속 중인 우리의 학도 동지를 즉시 석방할 것, ②마산사건에 대한 상세한 해명과 동족 살해에 대한 엄중한 책임 소재를 밝힐 것, ③악독한 고문과 구타를 감행한 경찰로 공인된 자를 속히 구속 처단할 것, ④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 권리를 장해하는 법률을 무효화 시킬 것으로 기록하였다(조화영 편, 239-241쪽).)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결의문]

      1. 마산사건으로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2. 부정선거 다시 하라
      3. 합법적 데모에 간섭 말라

      [구호]

      一. 부정선거 다시 하자
      一. 마산학생 사건 규명하라
      一. 폭행경찰관 물러가라
      一. 3인조·9인조 반대한다
      一. 학생은 살아있다, 시민은 안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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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대구 민주당 측의 소규모 시위]
      오후 3시 40분 경, 변호사 홍정표, 무(戊)구당 부위원장 윤중호 등 15-16명의 민주당원들은 경북도청 앞에서 경북대 학생시위에 합류하려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이들은“학생데모는 합법적이다”,“ 우리 데모도 합법적이다”,“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역전·미창·북성로를 거쳐 종로출장소를 지나 오후 4시 15분 경 민주당 도당 당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30여 명의 정·사복경찰들은 당사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 5시 30분 경, 귀가하기 위해 나오는 무구당 무소속 간부 7명을 백차에 실어 연행하였다. (조선일보는 대구의 시위를 타 지역의 유혈시위와 비교하여“평화로운 시위”로 명명하였다『(조선일보』1960. 4. 20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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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청구대학 야간부도 시위]
      오후 7시 반 경 청구대학 야간부 남녀대학생 2천여 명도 (조화영 편, 241-242쪽) 오후 9시, 통금시간이 되자 경찰은 최루탄을 겨누며 시위대를 따르던 시민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시위대는 방향을 바꿔 대구극장 입구에 이르렀고, 경찰은 최루탄 1구를 발사하였다. 약 10분가량 도로 주변의 건물에서 돌이 날아와 경찰 지프차의 유리가 파괴되고, 이 과정에서 청구대학생 한명이 경찰 곤봉에 맞아 병원으로 옮겨갔다. 이후 시위대는 군·경을 가득 실은 트럭이 뒤따르는 가운데 학교로 돌아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연행된 학생들이 석방되자 오후 11시 20분 경 시위대는 완전히 해산하였다. (『청구춘추』1960. 4. 20 1면. 일부 기록에는 1,50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조화영 편, 238쪽), 조선일보에는 검열로 인해 숫자가 삭제되어 있다『(조선일보』1960. 4. 20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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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인천공업고등학교 학생 시위대 경찰과 충돌]
      19일 오전 11시 경 인천시 주암동 소재 인천공업고등학교 1·2·3학년 학생 약 300명이 수업 중 교문을 나와 인천 수봉산을 넘어서 무언의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시내 숭인동 로터리 지점에서 출동한 경찰관과 소방차에 돌로 응수하다 해산되었다. 이 일로 동인천경찰서 경무계장 탁흥진이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학생들은 다시 12시 20분 경 약 200명이 집결하여 시위를 감행하였는데, (『청구춘추』1960. 4. 20 1면 ; 조화영 편,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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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청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 농기구 들고 시위]
      오전 9시, 청주농업고등학교 학생 전원 600여 명이 농기구를 손에 들고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주머니에 돌멩이와 연필로 쓴 삐라를 넣고 6명씩 스크럼을 짜고 플래카드를 들고 청주대학 앞을 지나 대흥동 서동을 경유, 도청 동편을 향해서 교가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또한“학원의 경찰 간섭을 물리치자”,“ 부정선거 마산사건을 규탄하자”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내덕파출소 앞 철도원 막사를 부수고 파출소의 상황을 살피며 대성로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농기구를 소지하게 되면 부상자가 많이 나오므로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시위하라는 교장선생님의 간청을 수락하여 행진 도중 농기구를 버리고 시위하였다.“ 부정선거 다시 하자”,“ 학원의 자유를 달라”,“ 독재정부 물러가라”, “학생을 정치에 이용 말라”등의 구호를 소리 높이 외치며 도청으로 향하였다.

      청주농고 시위대는 청주상업고등학교 앞을 지날 때 합류를 요청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대성중학교 옆에서 경찰과 투석전으로 길을 열고, 대성중과 단성중학교의 호응을 호소하였다. 이들은 교동국민학교 앞에서 트럭을 대기하고 도열하고 있는 무장경찰과 맞닥뜨려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대가 도청 정문 옆 개천가 도로에 들어섰을 때 전후방에서 시위대를 포위한 경찰이 따발총 쏘듯 최루탄을 발사하였다. 시위대는 어깨동무를 하고 결사적으로 격돌하다 자리를 옮겨 법원 앞으로 집결하였으나 소방차의 방수와 최루탄에 밀려 동(東)공원으로 이동하다가 경찰관에 포위당하였다. 약 1시간 후 청주농고 교장과 경찰 간에 모종의 협상이 성립되어 시위대는 전원 중앙국민학교 강당으로 이송되었다. (조화영 편, 129-130쪽. 서울신문은 이들의 시위 시작 시각을 오후 3시로 기록하고, 약 30분 만에 해산되었다고 하였다『(서울신문』1960. 4. 2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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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청주대학에서도 시위발생]
      19일, 청주대학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청주농고의 시위가 진행 중인 오전 11시 경 부터 학교에서 2킬로미터 지점인 동문로5가 대창제재소 앞까지 행진하였는데, 여기서 경찰에게 포위되어 해산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불응하자 체포명령이 떨어져 40여 명이 연행되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무심천변으로 도피하였다. (민원식, 「청주의 4·19, 그 분노와 함성」,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대전·충남 4·19혁명 동지회, 『3·8민주의거』, 2005, 166-169쪽 ; 「청주농업고등학교 4월혁명 투쟁 실기 : 청주농고 데모 감행기」, 사월혁명청사편찬회, 533-534쪽 ; 조화영 편, 132쪽 ; 『중도일보』1960. 4. 20 1면 ; 『서울신문』1960. 4. 2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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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0
    • 시위 상황 개요
      ‘피의 화요일’ 이 지난 후에도 시위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각지에서 학생들은 계엄령에 따른 휴교지침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왔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특히 광주에서는 시위대가 강력하게 제지하는 군인들에게 기왓장 투석으로 맞서며 대결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발생했지만 큰 희생 없이 마무리 되거나, 미리 정보를 얻은 경찰의 제지로 좌절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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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학생시위대, 무장군인과 투석전]
      4월 20일 광주 시내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진주하였다. 각 학교는 휴교 상태였으나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은 이날 오전 10시 경 200여 명이 집결했다가 교직원과 경찰들의 제지에 의해 해산되었다. 같은 시각, 전남대학교 입구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모이자 광주농고 학생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학생들은 혈서로 쓴 “협잡(挾雜)선거 다시 하여 민주대한 이룩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스크럼을 짜고 광주역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다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여 시위대는 5천 명을 헤아렸다. (김재희 편, 「광주 4·19 학생의거 전모」, 『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156쪽 ;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호남 4·19 30년사』, 삼화문화사, 1995, 182쪽)

      헌병과 경찰로 혼성된 백차부대는 걸어오는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무수히 발사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군대는 학생을 옹호하라!” “살인 경찰 잡아 죽이자!”고 구호를 외치며 전진했다. 시위대가 강한 제지를 무릅쓰고 역전통을 지나 선두가 충장로4가 입구에 다다랐을 때 군인이 탄 GMC 트럭 10대가 대열을 막아섰다. 시위대는 군인들의 제지로 전진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시위대가 재집결을 시도할 때마다 장갑차가 돌격해 막아섰다. 또 광주 상공에는 군대의 정찰기(L19기)가 시위대의 움직임을 파악해 지상에 무전으로 연락하였다. (『전남일보』1960. 4. 20 석3면)

      시위대 일부는 충장로1가로 진출하였고, 다른 대열은 금남로1가를 거쳐 지산동으로 달아났다. 충장로1가로 진출한 시위대가 충장로2가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특무대 쪽에서 달려온 약 2개 소대의 군대가 대열의 뒤를 쫓았다. 군대가 시가로 들어오자 시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군대는 우체국 앞에서 천천히 사직공원 쪽으로 빠지던 시위대 후미와 충돌했다. 학생들은 우체국 주변의 상점으로 피신했다. 우체국과 산업은행 사이 잡화상 지붕 위로 올라간 학생들은 벽돌과 기왓장을 뜯어 길가에 던졌다. 군인들은 처음에는 직접 대결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 대위 하나가 계속해서 기와를 뜯어 내리는 학생을 보고 “내려오라”며 쫓아가자 그 학생은 벽돌은 든 채 뛰어내리면서 그 군인의 전면 좌측 두부를 쳐서 거꾸러뜨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를 본 군인들은 곧 흥분하여 위협사격을 했다. 학생들은 총성을 듣자 건물 안으로 완전히 숨어 버렸고, 군인들은 건물 속에 들어간 학생들을 포위하여 잡아내기 시작했다. 사복 경찰관들은 잡혀 나온 학생들을 군인의 손에서 인계 받아 닥치는 대로 주먹, 발, 몽둥이로 후려갈겨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김재희 편, 157-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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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고려대학교로 잠입했던 시위대 일부, 안암동 일대서 난폭한 시위]
      20일 새벽 고려대학교로 잠입한 시위대 중에서 철조망을 뚫고 탈출한 학생차림의 청소년 20여 명은 안암동 일대에서 시위대를 규합, 그 수가 300명이 넘자 다시 이날 오전 6시 45분 경부터 신설동 로터리에서 안암동 입구를 거쳐 성북구청 사이를 차량 10여 대에 분승, 왕래하면서 난폭한 시위를 감행하였다. 안암동 입구를 중심으로 도로 한복판에 늘어선 그들 가운데는 나이 어린 소녀 3명도 끼어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부근을 통과하는 차량의 유리창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승객을 강제로 내리게 한 뒤 차를 빼앗아 버스 3대, 트럭 1대, 시발택시 10대, 합승택시 2대 등에 분승하였다.

      차량이 시내 중심부로 방향을 돌리자 연변에 늘어섰던 2-3명의 부녀자들은 차에 매달려 “그 쪽으로 가면 총을 쏜다. 그 쪽으로 가면 죽는다”, “이제 제발 말아주었으면…” 하고 안타깝게 말렸다. 그러나 이들은 운전수를 위협하여 운전토록 하고 한편에서는 스스로 서툴게 차를 몰았다. 차 위에까지 올라타고 약 30분 동안 폭주를 거듭하며 구호를 외쳤던 이들 소년시위대는 오전 7시 20분 경 성북서 쪽과 신설동 쪽에서 협공해 오는 기동경찰대원에 의해 해산되어 안암동 방면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일보』1960. 4. 20 석3면)

      한편 계엄사령부는 20일 아침 8시, 고려대에 집결되었던 약 1,200명의 시위대원들이 해산함으로써 시위가 대체적으로 정리된 것으로 잠정 결론지었다. 고려대에 집결되었던 시위대원들은 일부 학생을 포함한 시민들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 무기를 소지하고 있던 약 40명이 긴급 구속당하고, 나머지는 군대에 의해 해산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시위대원들이 소지하고 있던 파괴된 소방차 부속품 등도 군대에 의해 회수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19일 밤 트럭으로 미아리 쪽으로 향한 일부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신문』1960. 4. 20 1면 ;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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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경희대학교와 한양대학교 공대 시위 무산]
      20일 아침, 경희대학교 학생 수 백 명이 청량리 본교 운동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준비하였는데, (경희대는 19일 오후 3시 경 부터 법대생 300명이 중심이 되어 을지로, 미도파, 화신 앞 등에서 밤늦게 까지 산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20일에 집단시위를 감행하기로 모의하였다(이문종,「 경희대학」, 사월혁명청사편찬회, 『민주한국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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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 개별적으로 광화문에 집결]
      태릉에 위치한 서울대 공대 학생들도 이날 아침 10시 경, 운동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강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차량이 준비되지 않은데다 경찰의 사전방해로 학생들이 모일 수 없어 그 일부 100여 명만 학교 버스 두 대에 분승, 동대문까지 나아갔다. 나머지 학생들은 학교 측의 간곡한 권유와 경찰의 제지로 자진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시위는 무산되었으나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광화문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반 경, 그 수는 2천 명을 넘었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5대의 탱크와 2개 중대의 군 병력이 12시를 기해 중앙청에서 남대문까지의 길을 밀어버렸다. 이로 인해 시위대는 해산되었으며, 시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육군본부군사감실 편, 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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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참가 우려, 학교에서 버스로 강제 이송]
      19일 당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버스에 일부 학생들을 집단 승차시켜 중랑교 근방으로 강제 이송하였다. 실려 간 학생들은 인근에 연고자가 있는 자에 한하여 하차시키고, 나머지는 오랫동안 차 안에 갇혀 있다가 20일 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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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대학생 시위, 군경 제지로 좌절]
      20일 오전 경북대학교·청구대학·대구대학 학생들이 각 학교에 집결되어 시위를 감행하려고 하였으나 군경들의 제지로 좌절되었다.

      오전 10시 경 대구대 학생 약 300명은 휴학지시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모여 교문을 나서 8군단 앞을 지나 동인동 쪽으로 나아갔다. (『조선일보』는 5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1960. 4. 20 석3면).)

      정오 경에 대구역전을 중심으로 한 중앙통 일대에 수많은 대학생과 중·고등학생, 그리고 일반시민들이 모여들어 일촉즉발의 위기상태로 돌입하였으나 군경의 방비로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이날 대구지구 계엄사무소 소장 윤춘근 소장과 오임근 경북지사는 각 대학을 순회하면서 시위를 하지 못하게 설득하였다. (『대구매일』1960. 4. 21 조3면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석3면 ; 『한국일보』1960. 4. 21 조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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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 [전주대학교, 서울 시위에 자극받아 시위전개]
      18·19일 양일간에 걸친 수도 서울에서의 소요에 자극받은 전주 학생들도 20일 오전 9시를 전후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전북대학교 덕진동캠퍼스 학생 약 500명은 (『조선일보』는 3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1960. 4. 20 석3면).)

      한편 오전 9시 20분 경, 전주공업고등학교 학생 약 100여 명도 고사동 전매청 앞에서부터 스크럼을 짜고 시위하였다. (『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 ; 고광준, 「4월의 전북 학생데모사건을 증언한다 : 취재기자가 훑어본 밑바닥」, 조화영 편,『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73-275쪽 ; 4·19혁명 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1쪽 ;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 『한국일보』1960. 4. 20 조4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사울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52쪽)

      정오 경, 시내 중앙통과 역전통은 오전에 이어 학생들을 포함한 시민들로 혼잡이 계속되었다. 역전 5거리에서 학생 시위대를 제지한 소방차를 위시로 한 경찰기동대의 주력은 시청 옆에 포진하였다. 전북공보관과 시청 앞에는 비좁을 정도로 시민들과 경비경찰관이 모여 있었다. 시위는 도 공보관 앞에서 제지되었지만 산발적인 시위는 밤 9시까지 잇달았다. (『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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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리 [이리 학생들 시위]
      20일 오전 8시 40분 경부터 이리(현 익산) 남성중고등학교 학생 약 300명이 시위를 감행하였다. (『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

      이들의 시위가 일단락될 무렵인 오전 9시 30분 경, 150여 명으로 추산되는 전북대 이리캠퍼스의 농대와 공대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플래카드를 선두로 또다른 시위를 전개하였다. (조선일보에는 약 3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조선일보』1960. 4. 21 조3면).)

      오전 11시 40분 경, 경찰당국에서는 학생시위대를 일절 저지하지 않고, 마이크를 단 자동차 2대로 연도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군중들에게 귀가를 종용하며 시위대에게도 학교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계속해서 “계엄령을 즉시 철회하라”, “학생에게 수업을 계속 시키라”, “연행 구속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전우가를 소리 높이 불렀다. 이로 인해 경찰에서는 무장경관과 사복경관을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하였으며, 소방차를 동원하고 경찰서 정문에는 더욱 삼엄한 경계망을 쳤다. (『조선일보』1960. 4. 21 조3면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3쪽 ; 4·19혁명 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1쪽)

      학생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합세하는 학생들이 증가하여 20일 정오에는 2천여 명에 달하였는데, (『조선일보』1960. 4. 21 조3면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일부 기록에는 3천여 명으로 되어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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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학생 1천여 명 시위 감행]
      20일 오전, 수원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학생 1천여 명은 강력한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시위를 감행했다. 이날 아침 학생들의 시위계획을 경찰이 미리 탐지하고 제지하여, 저지망을 뚫고 나온 500명의 학생들만이 예정대로 9시 정각 학교를 출발,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수원역전에 이르러 40분 동안 지체하다가 출동한 약 150명의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중동파출소 앞까지 진출하였다. 이곳에서 등교하는 학생들과 합세, 그 수는 1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다시 전진을 계속, 남문에 이르러 만세삼창을 한 뒤 조용히 학교로 돌아갔다. (『동아일보』1960. 4. 21 석3면 ;『조선일보』1960. 4. 20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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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인천사범학교 여학생 10명도 시위하다 연행]
      20일 오전 9시 30분 경, 여학생 50명 포함한 인천사범학교 학생 약 300명은 인천시 숭의동 청과시장 앞 대로상에서 집결하였다. (일부 기록에는 150여 명의 학생이 시위하였다고 한다(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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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리 [비행장 정문까지 애국가 부르며 시위]
      20일 정오, 경기도 서정리 소재 효명중·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은 오산 비행장 정문 앞으로 분산적으로 집합하여 시위를 감행하였다. 시위대가 비행장 정문에서 400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애국가를 부르며 돌진하였을 때 급파된 경찰관에 의해 행진이 저지되었다. 시위대는 별다른 큰 사고 없이 12시 30분 경 완전히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1 석3면 ;『조선일보』1960. 4. 20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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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동아대학교 시위 좌절]
      동아대학교 학생 300여 명은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결의하고 시위하려 했으나 경찰의 철통같은 포위로 좌절되고 말았다.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70쪽)

      [동아대학교 학생 성명서]

      조국의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하여 우리 학생은 과감히 부정과 불법을 규탄하며 평화적 시위를 감행한다.

      우리들의 선배는 일제의 사슬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피를 바쳤고, 이제 우리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하여 피를 바칠 때가 온 것이다.

      우리 학생은 조국의 백년대계를 위한다는 거룩한 자부 속에서 값있게 피를 바칠 때에, 위정자들이여! 그대들의 혈족인 청년들의 목 메인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시간은 있다. 사죄하라.

      여기 온 국민의 노도와 같은 절규가 있다. 행정부는 책임져라.

      우리는 이상과 같은 선언의 요지로써 과감히 투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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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재일한국인들, 시위사건에 대한 성명서 발표]
      (토쿄 20일발 동양통신) 재일한국거류민단은 20일 오후 시위사건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민단성명서는 한국의시위에 깊은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되도록 조속한 시일 내에 질서와 평온을 회복하기를 호소하였다.

      한편 재일대한청년단도 성명서를 발표하여 한국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경찰의 폭력행사를 규탄하고 발포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이 성명서는 이어서 “정부는 깊이반성하고 전 책임을 지고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이번 시위는 친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주된 것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비민주주의적 행태에 대한 청년들의 반항을 표시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1 석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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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1
    • 인천 [인하공과대학 시위대, 폭력경관 처벌 약속받고 해산]
      21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인하공과대학 학생 약 100명이 학교를 출발하여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들은“민주주의 바로잡자”“경찰국가 타도하자”“구타경관은 사과하라”등 각종의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하여 경동파출소 앞 로터리에 집결하였다. 이에 놀라 즉시 출동한 경찰이 시위대를 곤봉으로 무차별 난타하였는데, 한 학생은 머리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하였다.

      학생들은 평화적 시위에 대한 경찰의 폭행에 항의하여 다시 스크럼을 짜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남북공원을 돌아 인천 시청 앞에 이르러 선서문을 낭독하고 구타경관에 대한 구속과 처벌을 촉구하였다. 오후 1시 20분 경 경기도 경찰국장이 사찰 과장을 대동하고 시위학생들 앞에 나타나 구타경관을 처벌할 것을 약속하고 거듭 해산을 요청하자 오후 1시 35분 경 학생들은 해산하여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경찰국장의 약속이 그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엔 다시 시위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1960. 4. 22 조3면, 석4면 ;『조선일보』1960. 4. 21 석3면 ;『서울신문』1960. 4. 22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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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 [군산 민주당 시당부의 시위 좌절]
      민주당 군산시당부에서는 21일 오전 10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계를 군산경찰서에 제출하였다. 경찰에서 이를 각하하자 군산군당 및 옥구군당부 80여 명이 이날 낮 12시 군산시당에 모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규탄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시가행진을 하려고 정문으로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 정보를 탐지하고 달려온 정·사복경찰관 60여 명이 가로막는 바람에 시위대는 일보 전진도 하지 못하고 옥신각신 하던 끝에 제지되고 말았다. (『동아일보』1960. 4. 22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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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2
    • 서울 [서울 초·중·고생 사상 65명, 실종 50명]
      22일 오후까지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4·19 학생시위사건에 의한 서울시내 초·중·고등학교의 학생 사상자는 모두 65명으로 판명되었다. 그 중 사망자는 18명, 중상자 17명, 경상자 30명이라는데, 초등학교 아동도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이번 사건으로 서울 시내 초·중·고등학교 학생들 중 행방불명된 학생이 이날 현재까지 50명이나 된다.

      서울시 교육위원회 김 교육감을 비롯한 간부들은 유가족과 부상자를 방문하여 사망자에게 매 1인당 5만 환씩, 중상자에게 1만 환씩 경상자에게 5천 환씩 나누어주었다. (『조선일보』1960. 4. 23 조3면)

      동아일보에서 조사한 4·19사태 부상자 455명 명단

      수도의대 제2병원 (34명)
      ●서강석(후암동 4) ●정한종(청량리동 142) ●박동석(서소문동 75) ●신종호(돈암동 산48-1) ●이해경(연지동 14) ●장순영(대현동 15-8) ●권한승(수송국교 6년) ●천진희(여 20, 루팡다방) ●김명진(여 22, 중앙미용) ●홍성채(27, 성동구 하왕십리) ●임훈일(13, 마포구 대흥동) ●송준철(44, 마포구 도화동) ●이수원(21, 후암동) ●김선호(22, 서울대 사대) ●김일선(30, 묵정동 11) ●하동훈(20, 신설동) ●김영수(19, 청파동) ●정준태(19, 창신동) ●이용준(22, 건국대 3년) ●이희영(미상) ●최영국(34, 마포구 신공덕동) ●안기상(22, 청량리 산2) ●김광수(17, 종로2가) ●이진면(29, 제기동 85-39) ●조천석(31, 마포구 공덕동) ●장사억(33, 종로경찰서 교통계) ●이진각(22, 성동구 하왕십리) ●장순용(18, 수송전기공고) ●이혜경(여 17, 덕성여고 2년) ●박광섭(20, 서대문구) ●김응섭(22, 동국대) ●김광건(38, 중앙청) ●김원맹(34, 종로경찰서사찰계) ●용성식(19, 명륜동 1) 동아일보에서 조사한 4·19사태 부상자 455명 명단

      세브란스병원 (90명)
      ●박원백(25, 연세대) ●이영민(20, 강문고) ●박창여(21, 동국대) ●김병민(19, 동성고) ●나용주(25, 홍익대) ●신동호(21, 주소불명) ●이영구(20) ●이영구(20, 건국대) ●이정인(18, 동국대) ●김종철(37) ●김용만(19, 동성고) ●김용덕(20, 중앙대) ●전용택(15, 부산시) ●감정옥(23) ●강법치(18, 경신고) ●김재권(여, 서울대 치대) ●홍정인(18, 경기공고) ●장숙인(18) ●신원미상(12세 소년) ●오세인(18) ●강성수(성균관대) ●백욱남(29) ●박수형(21, 성균관대) ●이성은(12, 남대문국교) ●한재식(20, 문리사대부고) ●이도섭(21) ●신범진(문리사대부고) ●유철수(15, 중앙고) ●이강준(20, 서린동 82) ●한기석(신원미상) ●김수영(연령미상) ●최명호(20,정동 16) ●김상천(42, 명동2가) ●이해수(20, 도림동 산) ●이병구(37, 만리동2가) ●최관섭(23, 서울대 상대) ●안소겸(23, 서울방송국) ●민재호(31, 서대문동) ●유용선(18, 영창고) ●이종남(12) ●최복수(연령미상) ●김만영(22, 원서동 92) ●김진출(31, 충남 대천) ●박두송(23, 도동 116) ●이명순(17) ●오성근(18, 중앙상고) ●박중권(19, 경남) ●이기창(20) ●박원준(26) ●박근수(18) ●정명춘(33) ●최종수(육군특무대) ●고익진(23) ●김용돈(18) ●임덕현(15) ●김유항(29) ●이용순(26) ●김재곤(연령미상) ●정성오(32) ●김도희(연령미상) ●윤금진(숙명여고 3년) ●김동채(중림동) ●이상근(20, 성대) ●정근영(18, 아현동 산8) ●한영기(26) ●백종하(21) ●임용웅(18, 아현 368) ●이종호(20, 청량리중 교장의 아들) ●김재희(17, 전남) ●오낙영(14) ●유학조(27, 도원동) ●조면호(35, 필동3가) ●김정웅(21, 문래동 37) ●장도원(18, 인천) ●차대공(14, 약수동) ●노평천(20, 창신동) ●이상옥(26, 전북) ●이희우(35, 부산 범일동) ●정겸원(28) ●최태식(연령미상) ●이대정(22, 안암동) ●박진규(29, 을지로6가) ●소일령(20,전북) ●김광우(16, 한성중) ●조상홍 ●이병남 ●김순일(22) ●유철순(15, 동자동 41) ●이성옥(25, 아현동) ●신봉암(18, 전남)

      적십자병원 (9명)
      ●노희두(22, 동국대) ●김일영(23, 고려대) ●박호진(23, 서울대 문리대) ●유재식(23, 서울대사대) ●박건정(22, 인창고) ●심자룡(29, 무직) ●최기태(20, 경기공고) ●성명미상(45세가량 남자) ●성명미상(20세가량 남자)

      국립중앙의료원 (132명)
      ●박동훈(20, 신설동) ●한상욱(18, 후암동) ●김종수(19, 미상) ●양천석(21, 회현동) ●박상길(18, 미상) ●김기석(21, 상도동 49) ●홍현철(21, 본동 441) ●김광운(21, 충무로1가) ●김경진(25, 창신동) ●조명철 ●강효도(20, 금호동) ●이상옥(26, 홍은동 산) ●김일환(18, 현제동) ●박성진(29, 염리동 산5) ●강용남(20, 장충동) ●배명찬(18, 후암동 49) ●서명석(33, 용두동) ●이원규(39, 현제동) ●김장철(29, 전남 목포) ●김득녀(20, 옥인동) ●유동기(43, 필운동) ●윤순이(33) ●박계봉(28, 을지로4가) ●조창석(31, 공덕동) ●김영내(26, 충신동2가) ●이황수(20, 동숭동 6) ●김미옥(25, 용두동) ●박양자(18, 명성여고 1년) ●김광무(16, 봉래동) ●이정규(21, 남대문) ●김경진(25, 창신동) ●이기대(32, 인흥동 시장) ●김금일(22, 미상) ●김윤환(47, 홍제동 33) ●김영곤(20, 을지로4가) ●유태기(18, 금남동) ●차창용(20, 인천 북평동) ●정기석(22, 전남 광산군 하남면) ●이이수(19, 남대문로) ●오성근(18, 필동3가) ●노명천(20, 창선동) ●강영남(20, 장충동 116) ●김영태(19, 남대문로) ●최복수(26, 대구시 신초동) ●박승환(23,강원도 화천군 산애면) ●김승환(17, 을지로6가) ●심재성(16, 성동구 금북동) ●박정식(21,경북 영덕군 장수면 수동) ●이기창(20, 신문로1가) ●양판용(21, 경남 한양군 지공면) ●김만용(22, 원서동) ●임수빈(30, 영등포구 신길동) ●이대종(19, 안암동) ●백종하(21, 봉래동1가) ●김태봉(20, 남창동) ●문내봉(23, 충남 창경군 신관면) ●방명용(22, 명동2가 28) ●신북만(18, 전남 완도군) ●함연기(25, 창선동 86) ●김진출(31, 충남 대전) ●김영태(미상, 을지로6가) ●박원재(34, 중부) ●김영주(26, 양동 6통 6반) ●이동숙(20, 봉래동1가) ●이성옥(23, 용문동 145) ●김동기(18, 반도호텔) ●김용응(18, 아현동) ●원군성(19, 광희동2가) ●양재석(17, 광희동2가) ●이건작(17, 마장동 451) ●길희성(19, 신당동) ●성신일(18, 제기동2가) ●유몽열(17, 염리동) ●김덕길(30, 도동1가) ●김철운(20, 장충동2가) ●이상의(16, 흑석동) ●이기준(13, 서대문구) ●김견배(24, 만리동) ●전무근(18, 신설동 147) ●고해길(19, 신설동) ●이희경(19,대현동 39) ●정태운(20, 신당동) ●한기석(미상, 인천시) ●조영호(35, 필동3가) ●장문명(19, 배문고교) ●유상숙(32, 미아리) ●남욱철(18, 오장동) ●홍순범(18, 아현동) ●김종채(21, 중림동) ●김준식(23, 누상동 12) ●김상찬(42, 명동2가) ●이인만(32, 회기동 8) ●김금열(22, 미상) ●김윤화(47, 홍제동 33) ●이영만(45, 옥수동) ●박천기(26, 돈암동) ●신영식(36, 송천동) ●박남규(16, 숭인동) ●명노수(21, 신설동) ●문재열(창신동 산6) ●이병하(신설동 6통 8반)●조병서(19, 용두남동) ●오경서(17, 미상) ●김용나(26, 종로5가) ●조창석(31, 성북구 창리) ●박상훈(10, 미상) ●조명철(미상) ●방희덕(20, 미상) ●최유석(21, 낙원동) ●김태청(미상) ●황상열(19, 숭인동 58) ●이개호(18, 신설동 14) ●송일엽(23, 신문로) ●안경호(23, 중앙대학) ●이만재(30, 부산 동광동) ●유청현(17, 광희동1가) ●천수운(21) ●김구인(45, 회현동3가) ●박종엽(21, 종로 권농동) ●이운용(20, 아현동 산 7) ●이경우(18, 안암동) ●이흔신(17, 양섭리) ●김호성(22, 성동구 창동) ●동진일(18, 태○동) ●천봉균(32, 충북) ●진영식(19, 유락동 42) ●이기진(19, 화성군) ●장교운(28, 중구 태창동) ●김창출(29, 장사동)

      이화여대 부속병원 (57명)
      ●전명선(41) ●김용찬(20) ●이우백(19) ●박명북(16) ●송동주(19) ●김충옥(19) ●유일해(23) ●소병빈(23) ●이경재(23) ●이일건(23) ●이경복(23) ●신규남(23) ●백석회 ●황순덕(22, 여) ●이덕주(18) ●최병주(20) ●전명선(41) ●전명영(18) ●조병회(20) ●유종묵(26) ●김수봉(23) ●정기전(22) ●김명영(17) ●조길광(22) ●이상학(24) ●한영선(15) ●서안선(20) ●문승주(14) ●정영석(18) ●조성호(19) ●최종수(18) ●신봉구(17) ●이홍수 ●김광한(18) ●김종수(12) ●김희자(17) ●최지희(20) ●손재희(23) ●김억수(24) ●김상경 ●박성선(40) ●신종구(23) ●강현만(20) ●이두영(35) ●옥영석(20) ●백원춘(20) ●신성월 ●이수희(20) ●김양현(21) ●방은덕(19) ●김세태(20) ●나상용(21) ●허암우(27) ●신중철(18) ●오일문(22) ●최준철(18) ●홍도명(22)

      수도의대부속병원 (20명)
      ●김현기(남 17) ●이래조(남) ●이진각(남) ●박기철(남 18) ●오광식(미상) ●최일환(남) ●천병진(남 18) ●김제환(남 21) ●이원춘(남 41) ●박영애(여) ●정선영(여 18) ●서강혜(남 21) ●최장호(남) ●이영희(여 17) ●권무웅(남 17) ●배봉애(여 20) ●변영섭(남 20) ●정윤용(남 17)●육석원(남 17) ●박상옥(남 17)

      서울대학병원 (113명)
      ●장기성 ●고동채 ●유자용 ●정철연 ●박윤실 ●이상만 ●양재성 ●박순애 ●안병달 ●홍연표 ●김창연 ●곽종찬 ●이두선 ●이광국 ●김병진 ●김란진 ●김순자 ●조명달 ●이정일 ●조순선 ●오종원 ●박순애 ●신휴남 ●안진강 ●이기원 ●정재관 ●김영숙 ●김용철 ●이성석 ●김정자 ●유현식 ●박진관 ●김연진 ●한희종 ●김기현 ●김숙자 ●나덕운 ●김화균 ●김광남 ●나정환 ●조유숙 ●이옥자 ●연성환 ●석창섭 ●문성윤 ●신형용 ●유종현 ●김원묵 ●김태봉 ●우종현 ●이정일 ●서우선 ●윤명준 ●이성관 ●박동철 ●원명욱 ●박일권 ●김회자 ●정원영 ●오동원 ●조순선 ●최귀성 ●조병권 ●유지택 ●이경호 ●김동연 ●이성관 ●진금녀 ●신휘남 ●홍희표 ●박이환 ●김용호 ●김순길 ●김학중 ●강대기 ●조종응 ●이호섭 ●조찬세 ●김종배 ●박종환 ●강구용 ●이용모 ●전대길 ●김동섭 ●김진구 ●이 향 ●강상학 ●이기종 ●이회백 ●신인호 ●정철민 ●고홍우 ●오경순 ●김운경 ●박인원 ●동희표 ●백승애 ●김숙영 ●김용대 ●김현룡 ●노상옥 ●이성철 ●이철우 ●신유섭 ●정봉욱 ●김성철 ●김후생 ●신윤구 ●고영수 ●윤정삼 ●정영규 ●한광욱 ●이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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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부산 사망자 2명 추가판명]
      22일 오전 경상남도 당국의 발표로 부산에서 4·19시위사건으로 희생된 사망자 수는 이날 현재 2명이 추가되어 총 13명(남9, 여4)으로 밝혀졌다. 그 중 제5육군병원에 안치된 남녀 각 1명씩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 그 외는 전원 신원이 판명되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1960. 4. 23 조3면)

      부산 4·19시위 희생자 명단
      ●최경자(여 23, 범천동) ●최봉옥(여 49, 범일동) ●정환규(남 38, 범천동) ●박점도(남 11, 좌천동) ●백윤선(남 17, 전포동) ●신정주(남 21, 전포동) ●강명임(여 22, 거제동) ●강수영(남 19, 당감동) ●최종수(남 19, 당감동) ●김영계(남 22, 당감동) ●옥정중(남 18, 거제동) ● 22세가량의 남자 1명 ●50세가량의 여자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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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중·고등학생 시위에 초등생도 가세]
      22일 오전 9시 30분 경, 약 2,000명에 달하는 인천의 중·고등학생들이 시립도서관 근처에 집결하여 시위를 감행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3 조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57쪽. 일부 기록에는“3천여 명”으로 기록되어있다(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131쪽).)

      약 300명의 국민학교 어린이들까지 끼어있는 이 시위대가 오전 11시 반 경 경인일보 노상에 이르렀을 때 시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찰이 저지망을 펴고 공포를 마구쏘아댔다. 이에 학생들은 경찰관들에게 투석으로 응수하였는데, 이 때 경찰관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도 2발의 공포를 발사하면서 해산에 주력하였다. 시위대가 해산 하지 않자 경찰은 무장을 해제하고 시민들이 학생들과 합세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오히려 시위대에게 물을 떠다주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기호일보』1960. 4. 22 3면 ;『조선일보』1960. 4. 22 석3면 ; 『동아일보』1960. 4. 23 조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7쪽. 일부 기록에는 “(시위를 저지하는) 경찰관을 붙잡아내어 그 중 3명에게 혼을 내주었다”고 했는데, 이들이 투석에 맞은 경찰관과 동일인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조화영 편, 131쪽).)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계속된 인천 시내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는 오후에 이르러 그 수가 더 늘었다.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경찰들은 혹은 회유도 하고 혹은 경찰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구타도 하고 공포도 쏘았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3시 30분 경 경찰서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며 “경찰은 학생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마라”, “인천고등학교의 박근정 군을 죽인 경찰관을 체포하라”, “연행된 학생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시위대가 연행된 학생10여 명의 석방을 요구하자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연행했던 학생 10여 명을 석방하였다. 시위대는 “휴교조치를 해제하고 곧 학교 문을 열라”고 교육구청 앞에서 시위하고 만 6시간 만인 오후 4시 경 자진해산하였다. (『기호일보』1960. 4. 23 3면 ;『 조선일보』1960. 4. 23 조3면 ; 『동아일보』1960. 4. 23 석3면)

      한편 학생시위로 전 시내가 들끓고 있는 시내 경동 네거리에서 이병찬(38, 전 경인일보 체육부장)은 22일 정오 경부터 단독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동아일보』1960. 4. 23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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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경기도 경찰국장, “시위는 이적행위”경고]
      22일 인천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박사일 경기도 경찰국장은 서울에서의 참사를 상기시키면서 이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에서 박 국장은 일부 학생들의 이성을 잃은 흥분으로 세기적인 참극을 빚어낸 공산당에게 이익을 주어서야 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또 인천 시내에서도 일부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켜 부질없는 행동을 하는 자가 있었음은 유감된 일이라고 하였다. 이어 박 국장은 시국을 정시하고 냉정 침착함으로 인천시는 계엄선포를 면하고 있음을 크게 자랑하고 싶다고 말하고, 현명한 시민과 학부형 여러분은 귀한 자녀 보호단속으로 나라와 겨레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기호일보』1960. 4. 2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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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 [군산 남녀 중·고생 시위]
      군산 시내 사범학교를 제외한 10개 중·고등학교 학생 1,200여 명이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감행하였다. 군산중·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이 오후 4시 30분 월명산에 집결하였다가 시가행진에 돌입하자 산발적으로 가담한 군산상업고등학교·군산남중학교·군산고등학교·군산동중학교·군산북중학교와 군산여자중·고등학교·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중앙여자중학교 학생들이 이에 합세, 1,200여 명의 세력이 되었다. 시위대는두갈래로나뉘어 “학원에자유를달라”, “각지에서 무참히 쓰러진 학도들을 정부는 책임지라”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내요소를 행진하고, 오후 6시 40분 경 평온하게 해산하였다. (고광준, 「4월의 전북 학생데모사건을 증언한다 : 취재기자가 훑어본 밑바닥」, 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75쪽 ; 4·19혁명 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호남 4·19 30년사』, 삼화문화사, 1995, 191쪽 ; 『조선일보』1960. 4. 23 석3면 ; 『동아일보』1960. 4. 23 석4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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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진 [민주당 명주군당 주문진 시위]
      민주당 명주군당에서는 22일 오후 3시 경 민주당 주문진 읍당 개편식을 마친 다음 시위계를 제출하는 동시에 시위에 돌입하였다. 이날 읍당 개편식에 참석한 신현일 민주당 읍당위원장 외 10여 명은 선언문을 낭독한 후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면서 시내를 행진하였다. 경찰은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약 1시간 동안 시내를 행진하고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3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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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3
    • 시위 상황 개요
      4월 19일 시위의 여파는 23일에도 계속되었다. 인천과 군산에서는 여학생들이 앞장선 시위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도 교포와 유학생들이 국내 학생들을 지지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모임을 열고 시위했다. 일부 재미한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유엔 한국대표부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였고, 재일한인들은 국내 시위가 불순분자들에 의해 발생했다고 말한 주일대사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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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여학생 선두로 평화적 시위전개]
      23일, 인천에서는 연 3일째 또다시 시위가 계속되었다. 오전 11시 40분 경, 인천여자중학교 학생 약 200명은 경동 동일약방 뒷골목에 모여 있다가 “협잡선거 다시 하라”는 플래카드를 선두로 경동파출소 앞을 지나 인천시청으로 향하였다. 경찰관의 제지를 받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된 이들의 시위는 태극기를 흔들며 군가와 구호를 외쳤는데, CBS TV 방송국 기자들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였다.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는 이들은 연행된 학생의 석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기호일보』1960. 4. 23 1면)

      또한 정오 경부터 남녀중·고등학교 학생 3천여 명에 의하여 시작된 시위는 여학생들을 선두로 스크럼을 짜고 시내를 전진하였다. 오후 2시 경에는 남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 약 150명도 미리 준비하였던 플래카드를 들고 “살인경찰 물러나라”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부르며 이들과 합세하였다. 이들이 시청을 경유, 경찰국 앞을 돌아 시내를 다니는 동안 시위대원은 점점 늘어나 약 3,500명으로 증가했는데, 이 중에는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연도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시위대원들에게 마실 물을 떠다주며 박수를 보냈다. 시위대는 오후 3시 30분 경 해산하였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58쪽 ; 『조선일보』1960. 4. 23 석3면, 1960. 4. 24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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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중·고등학생 200여 명, 횃불시위 감행]
      오후 7시 경, 또다시 신흥동 네거리에 시내 중·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횃불을 들고 시위를 감행하였는데, “학원에 자유를 달라!”, “살인경찰 물러가라!”, “3·15선거는 무효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답동 네거리를 거쳐 경동파출소 앞을 지나갔다. 시위대는 창영동파출소에 투석하여 전면 유리 2장을 깨고, 실내에 있는 거울을 파손하였다. 동인천서 앞에서는 “구속학생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안영수 경찰서장이 나와 “구속한 일 없다”고 이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는 사이 약 100명의 학생들이 더 가세하였다. 이들은 오후 9시 40분 경 동인천역 광장에서 만세삼창을 부르고 해산하였다. (『기호일보』1960. 4. 23 ; 『동아일보』1960. 4. 24 석3면)

      한편 이날 인천시장실에서는 김문교 사회국장 참석 하에 시내 각 중·고등학교 교장이 모여 학생들의 시위를 저지하기 위한 방법을 토의하였다. (『기호일보』1960. 4. 23, 1960. 4. 24 ; 『동아일보』1960. 4. 24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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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 [여중·고생 200여 명 시위]
      23일 오전 8시 40분 경, 시내 신창동 김외과 병원 앞 노상에 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와 중앙여자중학교 학생 2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광복절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가 군산여상 후문에 이르렀을 때 강력한 경찰의 제지에 의하여 일단 전원이 학교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오후 9시 40분 경 100여 명이 또다시 경찰의 저지를 뚫고 나와 역전까지 시위를 감행하였다. 시위대는 시내 중앙국민학교 정문에서 강력한 경찰 제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경찰이 이들을 버스에 태워 귀가시키려고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여고생 2명이 부상을 입었다. (『동아일보』1960. 4. 24 석3면. 조선일보는“23일 오전 10시부터 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 100여 명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감행하였다. 시위는 이날 오후 1시 현재 계속되고 있다”고 하여『동아일보』기사와 다른 내용을 실었다『조선일보』1960. 4. 23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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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 [포항 민주당원 50여 명 시위]
      민주당 포항시 당원 약 50여 명은 23일 오후 2시 10분 경부터 “자유당정부는 물러 가라”, “3·15선거를 다시 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약 1시간 40분 동안에 걸쳐 시위를 감행하였다. 경찰은 시위대 앞뒤에서 대열을 감시하면서 일반 시민의 합세를 막았다. 시위대가 시내를 행진하는 동안 연도에는 약 2만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였으나 시위에 직접 가세하지는 않았다. (『동아일보』1960. 4. 24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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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 [유학생들, 희생자 추모하고 협잡선거 규탄]
      (뉴욕 23일발 통신) 23일 오후 1시 경 맨해튼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에서 한국의 반정부시위에 호응하는 한인유학생들이 시위를 하였다. 처음에는 20여 명에 지나지 않던 시위학생 수는 차츰 늘어 이내 100여 명에 달하였다. 4월 19일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검은 상장(喪章)을 착용한 이들은 “우리들은 피살되고 부상당한 한국학생들을 애도한다”, “민주주의는 경찰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60개 이상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검은색 보자기를 씌운 테이블 중심에 태극기를 놓고 수많은 백합화로 그 주변을 장식하여 조국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쓰러진 학생들의 명복을 빌었다. 시위대에는 여학생 약 20여 명과 베트남인 1명, 미국인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한국의 협잡선거를 성토하고 이를 비난하는 전단을 배부하였는데, 그 전단에는 “우리는 정부의 비행을 혐오한다. 그러나 한국에 뿌리박은 민주주의를 잠시라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 건국 12년 이래 이번같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국민의 강력한 의사와 용기가 표명된 일은 없었다”고 쓰여 있었다.

      이들은 시위를 해산하며 유엔 한국대표부로 임병직 대사를 찾아가 25피트 길이의 연판장을 제출하였다. 임 대사는 47명이 서명한 진정서를 접수하면서 이것을 한국정부에 보내겠다고 말하였다. 임 대사는 “한국경찰이 학생들에게 총을 쏜 것은 큰 과오”라고 말하면서 “나는 경찰이 자의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였다. 한인학생들의 시위는 뉴욕뿐 아니라 워싱턴과 보스턴에서도 동시에 발생하였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9-160쪽 ; 『조선일보』1960. 4. 24 조3면 ; 『동아일보』1960. 4. 25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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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스엔젤레스 [유학생들, 이승만 정부 사퇴 요구]
      (로스앤젤레스 23일발 AP통신) 23일 남부 캘리포니아주 각 대학으로부터 모인 교포와 유학생 약 50명이 로스앤젤레스시청 계단에서 한국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추도식을 거행하고 정부의 사퇴를 요구하였는데, “우리들은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학생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우리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부정과 협박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작성하여 보냈다. (『조선일보』1960. 4. 24 조3면 ;『동아일보』1960. 4. 25 조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60-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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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프란시스코 [한국영사관 앞에서 시위]
      (샌프란시스코 23일발 AP통신) 샌프란시스코 근방 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 20여 명은 23일 대한민국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경찰의 잔인한 행위를 중지하라”, “우리는 동료학생의 죽음을 슬퍼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수 시간 동안 시위를 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4 조3면 ;『동아일보』1960. 4. 25 조3면. 일부 기록에는 5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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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쿄 [망국오리(亡國汚吏) 유태하 물러가라]
      (도쿄 23일발 AP·동화통신) 본국에서 발생한 경찰의 테러행위에 격분한 재일한국인들은 약 2시간 동안 3·15선거의 무효와 선거의 재실시, 유태하 주일대사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유학생과 교포 60여 명은 23일 주일한국대표부 앞에서 태극기와 단기(團旗) 그리고 “물러가라, 망국오리 유태하”, “3·15 망국선거는 무효다”, “악질 경관을 극형에 처하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였다.

      주일대사관 사무실 내부로 진입한 시위대는 유태하 주일대사가 한국의 시위상황을 공산주의의 책동으로 언급한 데 격분하여 그를 거칠게 몰아붙이면서 사임을 강요하였다. 일부 일본 신문들은 일단의 민단계 교포들이 유대사가 서울로 보낸 사임전문을 그들에게 보일 때까지 그 옆에 서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전문은 서울의 외무부로 보낸 것으로, 유 대사가 일주일 내에 사직하고 귀국하겠다는 것을 통고하는 내용이었다.

      이날 시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민단간부들이 나와 있었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이 광경을 취재 촬영하려고 수많은 내외기자들이 모여들어 대표부 앞 길은 일대혼란을 이루었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61쪽 ; 『조선일보』1960. 4. 24 석1면『; 동아일보』1960. 4. 24 석1면)

      이날 개최된 재일교포의 궐기대회에서는 본국 동포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채택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4 석1면)

      [도쿄 재일교포들이 본국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 요지]

      동포 형제 및 학생제군의 영웅적 장거(壯擧)는 폭력정권의 범죄적인 행위와 공포 그리고 빈궁과 절망에 신음하는 전 동포 앞에 희망과 용기와 우리 민족의 진로를 명시한 봉화이다. 재일교포도 조국의 형제들이 장거에 상호 호응하여 조국의 형제를 지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알림과 동시에 형제의 위업을 계승하기를 맹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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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4
    • 시위 상황 개요
      4월 19일 시위의 희생자를 위한 합동위령제가 전국 곳곳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학생들은 관제 위령제를 거부하고 비난하였는데,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독자적인 위령제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마산에서는 애국노인회 회원들이 “노(老)대통령은 요번 기회에 민주정치를 바로 잡자”, “가라치울 때는 왔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여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재미한국인들도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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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관제 위령제에 항거한 학생들, 총퇴장 감행]
      24일 오후 2시 용산 야구장에서 4·19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서울시 주최로 열렸다. 그러나 시내 각 대학생 대표들은이날의 제주(祭主)가 임흥순 서울시장이고 위령제 집행부 측요원들이 관계(官界)인사들이라 영령들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며 개회식을전후해서 교기를 접고 총퇴장을 감행하였다. 또한 그 자리에 있던 고등학생들도 조장(弔章)이 달린 교기를 접어들고 위령제 참가를 거부하였다.

      시내 각 대학 대표들은 임흥순 서울시장이 23일 동장회의에서 “4·19사건 희생자 및 부상자들에게 지급하는 위로금을 어쩔 수 없이 지급하도록 조치했다”고 한 것에 대해 격분하였다.

      또한 위령제 집행관계 인사들이 과거의 행적으로 보아 민주대한 건설에 역행한 인사들이라고 지적하며, “그들이 오늘의 위령제의 주동인물이라면 망령들이 고이 눈을 감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은 이의 참가를 거부하고 학생단체 단독으로 후일 위령제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각 학교 당국자들은 주체가 누구이건 영령들을 위하는 것이니 참가하자고 종용하였지만, 학생대표들은 일단 운동장에 나갔다가 교기를 집어치우고 정식참가를 거부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4 석1면 ;『동아일보』1960. 4. 25 조3면)

      학생들이 불참한 가운데 불교식으로 행해진 위령제는 육군 군악대의 장엄한 주악에 이어 영령에 대한 묵념으로 이어졌다. 서울시장과 교육계를 대표한 조동식의 조사가 있었다. 학도를 대표하여 제단 앞에 나선 노만석(경성전기공고)군은 조사를 마치고 나서 “후일에 다시 학도장으로 그대들의 명복을 빌어주겠다”고 영령 앞에 다짐하였다.

      이윽고 분향이 시작되었는데, 희생학도의 어머니를 선두로 임흥순 서울시장, 장면 전부통령, 조용순 대법원장 등이 분향하자 일반석에서는 한때 “분향할 자격이 없는 사람은 물러서라”는 외침이 있었다. 분향이 계속되는 가운데 다시 주악이 울렸고, 위령제는 기도도 생략된 채 서둘러 폐식되었다. (『동아일보』1960. 4. 25 석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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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각 대학대표 90여 명, 독자적 위령제 갖기로 결정]
      24일 오후 2시부터 서울시 주최로 용산 육군야구장에서 집행된 4·19희생자 합동 위령제를 관제 위령제라 하여 거부한 시내 남녀대학 학생대표 90여 명은 오후 5시부터 시내 모처에 모여 독자적인 희생학생 위령제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회합에서 종합대학에서는 7명, 단과대학에서는 1명씩의 학생대표를 선출하여 ‘4·19학생의거 사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위령제의 일자와 장소, 주최자 등은 25일 오후에 다시 모여 결정하기로 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5 석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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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광주서도 4·19희생자 합동위령제]
      4월 24일 오후 3시, 광주 중앙국민학교 교정에서는 4월 19일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4·19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그러나 이 위령제는 자유당의 조직인 국민회가 주최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유가족과 학생들은 주최 측에 욕설을 퍼부었고 “지각없는 사람들이다. 데모가 일어나는 날 학생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자기네들의 보신책을 강구하느라 쥐구멍을 찾던 자들이 이제 와서 철면피하게 위령제를 지낸다는 것은 아직도 옛날 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위령제는 오후 4시에 끝났는데 국민회 전라남도 본부 회장 김철주가 제주를 맡아 제문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 전남일보』1960. 4. 25 1면, 1960. 4. 26 2면 ; 『조선일보』1960. 4. 24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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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부산시, 범어사에서 4·19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4·19사건으로 부산에서 희생된 13영령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24일 오후 2시부터 동래에 있는 범어사에서 부산시 주최로 엄수되었다. 이날 위령제에는 참가 초청범위를 주최자측에서 극히 제한하여, 민주당과 자유당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들이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날 식전은 군악대의 장엄한 주악으로 시작되어 부산시장 배상갑의 제문 낭독이 있었고, 이어 각계의 조사에 들어갔다. 특히 이번 사건에 희생된 강수영(19)의 모교 교장과 이번 희생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성남국민학교 4년생 박점도(10)의 모교 교장의 목메인 조사에 학우들과 유가족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그 후 계속된 식은 분향과 유가족대표의 답사로 오후 3시에 끝마쳤다. (『동아일보』1960. 4. 25 석2면 ;『조선일보』1960. 4. 24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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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 [희생학생 추모시위, 도지사 면담 요구]
      오전 9시 40분 경, 전북대학교를 비롯하여 전주공업고등학교와 영생고등학교 학생 등 약 100여 명이 남계동 소재 합동 버스정류장에 모여 궐기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시위를 시작하였다. (『전남일보』1960. 4. 25 2면. 일부 기록에서는‘오전 10시 경’으로 기록하였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호남 4·19 30년사』, 삼화문화사, 1995, 191쪽). 전남일보는 이 시위가“서울 모대학생 10여 명의 지휘로”이루어졌다고 기록하였다『( 전남일보』1960. 4. 25 2면).)

      이들은 오전 10시 20분 경 도지사 관사 앞에 도착하여 관사를 포위하고 박정근 도지사를 불러냈다. 그러나 박 지사가 공설운동장에서 만나주겠으니 그리로 가라는 말에 지사와 동행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시위대는 “계엄령이 실시되지 않는 이곳에 등교를 억제하는 일을 없애라”, “ 계엄령을 철회하라”, “ 마산사건을 조속 해결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11시 30분 경 다시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도청 담 위에서 전주고등학교 교장이 올라가 해산을 요구하자 시위대는 야유를 퍼부었다. 이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등의 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며 도지사를 나오라고 요구하며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고, 달려온 경찰백차에도 투석하여 유리창을 깼다. 그러나 무장경찰들은 이 시위대에 총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마침내 11시 50분 경 박 지사가 시위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대 대표들은 박 지사에게 “학교문을 열어라”, “사표를 내라”는 등등을 요구하였다. 시위대앞에 나선 박 지사는 학생대표들의 요구를 듣고 평화적인 시위를 해주도록 부탁하면서 “계엄령을 철폐하라”, “학원의 문을 열어라”, “지난 20일 전주의 데모대 연행학생에게 폭력을 가한 경찰관을 처벌하라”, “4·19사태 당시 희생된 본도 출신 학생의 동상을 세워 달라”, “지사는물러가라”는 등 수개 요구조항에 낱낱이 답변하고,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여러분의 의사를 중앙에 반영시킬 것을 약속하겠다”고 언약하였다. 또한 “학교의 문을 열어라”는 요구는 중앙과 절충하여 조속히 개교토록 힘쓸 것이며, 시위학생구타 경관은 조사해서 처벌하겠고, 4·19희생학생 동상은 건립 중에 있으니 서서히 다시 논의하자고 대답하였다.

      오후 1시 경까지 머물러 있던 시위대는 박 지사의 답변을 듣고 일부는 자진해산 귀가하고, 일부는 공설운동장의 장례식장으로 향하였다. 이들 시위학생들은 또한 4·19 본도(本道) 출신 희생학생의 동상을 도청 앞에 건립키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전북일보』4293. 4. 25)

      시위대는 4·19사건에 희생된 학생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2분간 하고 다시 오후 2시부터 있을 ‘4·19사건 희생학생 합동장례식’장소인 공설운동장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서울신문 전주지사를 습격하여 책상과 문짝 등을 파괴하였다. 이어 자유당 전북도당 당사 및 대한부인회관, YWCA 회관 등을 습격하여 돌을 던져서 간판을 모조리 떼어내고 행진하였다. 공설운동장에 집결한 이들은 4·19희생자를 위하여 명복을 빌고 오후 2시 10분 경 해산하였다. (『전북일보』4293. 4. 26 3면 ; 고광준, 275-276쪽 ;『전남일보』1960. 4. 25 2면 ; 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75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2-153쪽 ; 『조선일보』1960. 4. 24 석3면 ; 『동아일보』1960. 4. 25 석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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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순국학도 추도식 끝내고 시위]
      24일 오전 10시 10분 인천시 답동 광장에서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은 4·19사건으로 희생된 고귀한 학생들의 명복을 비는 추도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추도식이 끝나자 10시 30분부터 왼팔에 상장을 단 학생들은 조기와 태극기를 선두로 질서정연하게 열을 지어 겨레를 위해 생명을 바친 학생들에 보답하고자 백색 모금함을 들고 통행인들이 넣어주는 조의금을 받아가며 시내 전역에 걸쳐 침묵행진을 거듭하였다. 여학생들도 이를 따라 조의금을 모았다. (『조선일보』1960. 4. 24 석3면)

      한편 송도고등학교 학생 약 500명과 제물포고교 학생들은 추도식에 이어 시위에 들어갔다. “4·19 순국학생 위로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무책임한 사퇴로 사태수습 될 말인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향했는데, 그 수는 점차 증가하여 정오 경에는 약 1천 명에 달하였다. (『기호일보』1960. 4. 24 1·4면 ; 조화영 편, 131쪽 ; 『동아일보』1960. 4. 25 조3면)

      [제물포 고등학교 학생들의 선언문과 공약]

      먼저 피를 흘리고 쓰러져간 학도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700 제물포 고등학교 학도들은 현재 전국에서 야기된 불평과 슬픔과 과오를 시정하려고 평화적이요 무저항적인 데모를 감행하려고 합니다. 마산에서 두 차례에 걸친 민족의 의거가 발생하였으며, 주권을 가진 국민들은 경찰에 의하여 무참히도 죽어갔습니다.

      나와 같은 피를 타고난 혈족이 심지어는 심한 고문 끝에 쓰러진 나의 형제가 물곳에 던져졌습니다.

      아아! 정의감에 불타는 학도들이 이 이상 더 참을 수가 있겠습니까.

      서울에서의 평화적 데모로 일부 몰지각한 깡패들에 의하여 불상사를 빚었습니다. 국민권의의 회수를 요구하는 젊은 청년 학도들과 시민들이 경관들의 무차별한 기관총 난사에 고귀한 피를 흘렸습니다.

      아아! 이래도 우리는 더 참을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찾아야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의를 선언하며 다음을 공약하겠습니다.

      [공약 삼장]

      一. 우리의 데모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요 무저항적이어야 한다.
      一. 우리의 의사를 충분히 발표하고 관철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행동하여야 한다.
      一. 우리의 데모는 일시 감정적인 일이 아니요, 오직 정의의 옹호를 위하여 감행하는 것이다.

      제물포고등학교 700명 학도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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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학생들의 결의문 국내 각계 요로에 제출키로]
      24일 오전 대구대학에서는 학생 간부를 비롯한 남녀학생 50여 명이 회합을 갖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학생총회의 인준을 받는 대로 여·야·입법·사법부를 총망라한 국내 각계 요로에 이 결의문을 제출할 것을 결정하였다. (『대구매일』1960. 4. 26 조4면 ; 조화영 편, 246-247쪽)

      [대구대 학생들의 결의문]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운 우리 학도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항을 결의하여 건의한다.

      1. 3·15정·부통령 선거로 민주주의를 말살시킨 민주 역도를 엄단하고 재선하라.
      2. 이기붕·한희석·최인규 등은 현 정국의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서라.
      3. 공명선거를 해친 자유당 산하단체는 즉시 개편하라.
      4. 정치깡패를 일소시키고 엄중 처단하라.
      5. 경찰 중립화와 공무원 중립화를 확립하라.
      6. 현 민의원은 여·야를 막론하고 총사퇴하여 국민 앞에 사과하라.
      7. 사법권 독립을 수호치 못한 무능한 법관들은 물러가라.
      8. 24파동으로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지방자치법·보안법은 개폐하라.

      학생대표 박성대·김한수 외 4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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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마산 노인 시위, “책임지고 물러가라”, “가라치울 때는 왔다”고 주장]
      지난 24일 오전 11시 시내 신·구(新·舊)마산 경계지점에서는 갓 쓰고 흰 두루마기입고 지팡이를 든 애국노인회 회원70-80명이 시위를 시작하였다. (『마산일보』1960. 4. 25 3면. 동아일보는‘약 200여 명’으로『동아일보』1960. 4. 25 조3면), 국제신보는 ‘150여 명’으로 보도하였다『국제신보』1960. 4. 24 석1면).)

      이날 아침 노인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에서는 무장경관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지만 노인들에게 강압적 수단을 쓸 수도 없어 무장경찰을 철수시킨 다음 사복경관들을 배치, 시위중지를 간곡히 종용하는 수법을 썼다. 사복경찰관 중에는 현금 만환을 내놓고 “이걸로 약주나 사 잡수시고 데모는 그만 두십시오”하며 사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시위대는 시내를 한 바퀴 행진한 다음 오후 2시 반 경 부림동 청과시장 앞에서 자진 해산하였다. (『마산일보』1960. 4. 25 3면 ;『국제신보』1960. 4. 24 석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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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재미 한국인 국민회, 이승만 사퇴 지지 성명 발표]
      재미 한국인 국민회는 24일(미국날짜) 로스앤젤레스에서 총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총회 결의 내용을 알리는 전문을 동아일보사에 보냈다. (『동아일보』1960. 4. 27 석1면)

      [재미 한국인 국민회의 이승만 사퇴 지지 성명]

      4월 24일 재미 한국인 국민회는 총회를 개최하고, 다음 사항을 결의하였다.

      1. 우리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개와 데모를 지지한다.
      2. 우리는 3월 15일 선거를 무효로 하고 적절한 감시 하에 새 선거를 실시하며, 이승만씨는 모든 정치적 지위에서 물러날 것을 호소한다.
      3. 우리는 국민의 민주적 권리가 보호될 것을 호소하며, 구속된 모든 자들을 석방할 것과 의거 도중 죽음을 간신히 모면한 자들에게 보상할 것을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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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샌프란시스코 유학생 시위]
      샌프란시스코 24일발 로이터통신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한국 영사관 앞에서는 24일 이틀째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20명으로 구성된 이 학생시위대의 지도자인 한 학생은 “이것은 정치적인 시위가 아니고 추모회다”라고 말하였다. 이시위대는 “경찰의잔인행위를중지하라”, “우리는동료학생의죽음을슬퍼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동아일보』1960. 4. 26 조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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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5
    • 시위 상황 개요
      4월 19일의 대규모 유혈사태 이후 비상계엄이 선포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대도시에서는 큰 시위가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4월 25일 오후, 서울에서는 주저앉으려는 정국을 다시 깨우는 교수단의 시위가 있었고, 또다시 대규모 시위의 발생을 유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오후 3시, 동숭동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58명의 대학교수들은 “각 대학교수단 -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시위 시작 전 14개 항의 시국선언을 채택, 낭독하고 오후 5시 45분 교문을 나와 종로, 을지로 입구, 미국대사관 앞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였다. 교수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당도하여 시국선언문을 다시 낭독하는 것으로 시위를 마쳤다.

      이를 본 시민과 학생들은 이 대열에 합세하였고, 교수단이 해산한 후에도 세종로 로터리에 집결, 각종 구호를 외치며 또다시 궐기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로 커다란 자극을 받은시민들은 “부정선거의 원흉을 잡아내라!”, “형제들의 피의 대가를 찾자!”고 소리를 높였다. 4·19 이후 사회 안정을 위해 애쓰던 군에서는 처음으로 탱크 3대와 약 1개대대로 추측되는 무장병력을 국회의사당 앞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국군 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환영하였다. 군은 발포하지 않았으나 이기붕 집과 해무청 앞, 종로5가에서 발포가 있어 또다시 유혈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날 대학교수단의 시위는 자유당정권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새 역사를 여는 결정적인 모멘트가 되었다.

      지방에서는 춘천과 진주, 마산, 김해, 남원 등지에서 시위가 있었다. 춘천과 진주에서는 시장과 도지사로부터 사퇴약속을 받아냈다. 마산에서는 할머니들이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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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대학교수들의 시위 준비과정]
      4월 20일, 평소 자유당의 노골적인 불법, 부정, 횡포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려대학교의 이상은 대학원장과 조용만·이종우 교수 등은 4월 19일의 학생시위를 보고 “교수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공유하였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모임을 갖고 첫째,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이때에 우리 교수들이 가만히 좌시할 수 없지 않느냐 둘째,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궐기한 이 의거를 공산당의 조종이니, 야당의 사주니 하고 왜곡하고 탄압하는 것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모처럼 일으킨 의거의 정열이 계엄령 하의 질사회복과 사태의 평정으로 냉각되면 다시 재연되기 힘들므로 그 열기가 식기 전에 독재정권 타도의 목표까지 운동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하였다.

      21일, 정재각 교수(고려대)도 이들과 의견을 함께 하고 뜻 맞는 사람들을 좀 더 모으기로 합의하였다.

      22일 오전, 이상은 교수가 연세대학교의 정석해 문과대학장, 조의설 교수 등과 만나 의사를 타진하고, 정재각, 김경탁, 손명현(이상 고려대), 최재희(서울대) 교수들과도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오후 1시, 이상은, 정석해, 이종우(고려대), 조의설(연세대), 최재희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이 부정과 불의를 참다못해 일어서 싸웠는데 교수들이 이렇게 가만히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교수들이 각 대학별로 성명을 할 것인지 공동명의로 성명을 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계엄령 하에서의 집회가 불가능하고 언론이 통제되므로 좀 더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23일 오후, 이상은 교수는 오전에 있었던 각 대학 총장회의에서 ①데모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된 학생을 관대히 처벌할 것, ②계엄령을 해제하고 하루 빨리 개학하도록 관계요로에 건의할 것과, ③위문금 모집, 위문단 파견, 27일 개학을 결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국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에 실망하고 분개하였다. “중국의 5·4운동처럼 (중국의 5·4운동은 1919년 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이다. 학생운동이 혁명운동으로 발전한 정치운동이었으며, 교수와 학생이 합작한 지식계급의 운동이었다.)

      24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태 수습을 위해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며 이기붕을 의장직에서 사퇴시킬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오후 1시 쯤 이종우 교수 자택에서 이상은, 김경탁, 정재각, 김성식(이상 고려대), 최재희(서울대), 조윤제(성균관대) 교수 등 7인이 모였다. 같은 시각 이정규(전 청주대학장)교수 자택에서도 이항녕, 변희용, 박희성, 손명현(이상 고려대), 김영달(동국대) 교수들이 모여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논의하고 있었다. 늦은 시각, 이들 중 이항녕 교수가 대표로 이종우 교수 자택으로 와 8명이 모임을 계속하였는데, 이들은 거듭된 논의 끝에 다음날인 25일 오후 3시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대학교수들의 대회를 갖고 시국성명서를 발표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거사일을 바로 다음날인 25일로 잡은 것은 이 모임 자체가 시급을 요하는 성질의 것인데다 매달 25일은 국립대의 봉급일이므로 연락이 편하고 많은 인원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이상은, 214쪽).)

      교수단은 계엄령 하에서 대중집회를 열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신문기자를 통해 미리 계엄당국에 양해를 구해놓았다. 또한 다음날 있을 집회를 국내외 기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기로 하였다.

      이에따라 4월 24일 한 고려대 교수가 미국대사관 관리들과 접촉하여 교수들이 25일 시위를 할 예정이라고 알리기로 하였다. 이 교수는 교수단 시위가 대중적 저항에 리더쉽을 부여할 뿐만이 아니라, 3·15 선거에 대한 시정조치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이승만 사퇴를 요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 전문번호 967● 1960. 4. 25. 795B.00, Central Decimal Files, RG59. 이러한 사실을 전한 교수의 실명은 원자료인 대사관 전문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명서 내용은 “학생들의 참살(慘殺)에 대해 교육자로서의 동정적 태도를 표명하는 것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사태발생의 주요원인인 3·15부정선거를 부인하고 발본색원적인 정치문제에까지 태도표명을 할 것인가?”로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이에 그동안 토론된 사항을 정리하여 이상은 교수가 초안을 잡기로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우리는 4·19학생시위를 적극 지지한다.
      一. 누적된 부패와 부정의 총책임을 지고 현 집권세력은 즉시 물러가라.
      一. 3·15 부정선거를 조작한 자와 학생 살상자는 즉시 체포, 처단하라.
      一. 구금된 학생은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一. 관권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자는 적발, 처단하라.
      一. 학원의 절대 자유를 보장하라.
      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이비 학자를 배격한다.
      一. 정치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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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횃불 올린 교수단,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절규]
      다음날인 25일 아침 9시 반, 간밤에 혼자서 ‘시국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 초안을 작성한 이상은 교수는 정석해 교수를 만나러 연세대로 갔다. (이상은, 219쪽. 성명서에‘시국선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상은 교수가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면서 임의로 정한 것이라고 한다. 일부 기록에는 이와 다르게“시국선언문의 원본은 고려대의 이상은, 김경돈 양교수가 중심이 되어 명륜동 부근에 살고 있는 교수들이 수일 전부터 기초하기에 이른 것이라 한다”고 하였다(안동일·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77-278쪽).)

      오후 2시 반, 이종우, 이상은 교수는 이미 서울대 의대 구내 교수회관에 와 있었고, 정석해 교수도 연세대 백낙준 총장을 비롯하여 교수들 수 십 명이 선언문에 사인한 서명부를 가지고 왔다. (4월 25일 오전 10시 경 에는 민병기 교수가 외국기자들을 위해 선언문을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상은 교수가 초안을 다시 써주었으나 번역하지 못하였다. 이때까지도 교수들의 계획은 비밀에 붙여진 상태였다. 그러나 연세대의 정석해 교수가 이미 선언문을 고쳐 베껴서 서명부 앞에 붙이고 사인을 받았고, 회의 시작 전 회장 입구 접수처에서 어느 신문기자가 가지고 가 버려, 이미 발표되기 전에 누출이 된 상태였다(이상은, 224쪽). 이에 대해 다른 기록에 따르면“정석해 교수는 이날 아침 이미 연세대 교수회의에서 4·19 학생의거를 지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백낙준 총장을 비롯한 전 교수의 서명날인을 받아 둔 상태였다”고 한다(조화영 편, 144-145쪽).)

      오후 3시, 서울대 교수회관에는 300여 명의 교수들이 모여들었으며, 이중 258명의 참석자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국내신문사에서는 불과 2-3사의 기자만 왔을 뿐이나, 마침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외국 특파원들은 20여 명이 몰려들어 바쁘게 취재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모임을 주도한 입장에서는 50-60명만 모여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조화영 편, 146쪽).)

      오후 5시 35분, 통금시간이 1시간 반도 남지 않게 되자 김영달 교수는 긴급동의를 요청하고 “폐회하는 대로 데모를 합시다”하고 외쳤다. 시위 제의가 나오자 회장 내 공기는 별안간 긴장하였다. 즉시로 찬성론과 반대론이 대두되었다. 그러자 의장인 정석해 교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렬한 찬성발언을 한바탕 하고 교수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찬성하는 사람은 과반수 남짓 되었지만,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의장은 곧 가결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회장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몇 있었다. 의장이 이들에게 “전원일치의 행동을 하자”며 요구하였다.

      오후 5시 50분 경, 대학교수단은 거리에 나서기 전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소리 높여 낭독하였다. (조화영 편, 149-150쪽)

      대학교수단의 플래카드가 서울대 의대 교문을 나서자 국내외 사진기자 수 십 명이 매달린 각 신문사의 보도차가10여대나앞장서서달렸다. “ 이승만정권은물러가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4월 19일에는 들어보지 못한 색다른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동안 육군 특무부대의 지프차 한 대만이 이들을 지켜보았다. 구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종로5가에 나선 것이 오후 6시 5분 경, 양쪽 인도에 걸어가던 시민들은 대학교수단의 시위에 환성과 박수를 보내고, 특히 학생들은 스승들의 궐기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보냈다. 종로 5가에 있는 4·19 부상자가 입원해 있는 반도병원 2층 입원실에서는 부상자들이 얼굴에 붕대를 감은 모습 그대로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각 대학 교수단 시국선언문]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대학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서울·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는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적인 학생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집단의 사병이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써의 민족적 대 참극, 대 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들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선거이다. 공명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부정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결하라.
      8. 모든 구속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피살에 흥분된 비정상상태 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입지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자는 관·군·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도구화 하는 소위 문인·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너머 호시탐탐하는 공산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분자가 있음을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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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학생들의 피로 물든 종로거리에선 더 큰 울분이]
      대학교수단을 따르는 시민과 학생들로 종로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지나던 전차·버스·택시·승합차 등 모든 차량이 일제히 정지하면서 보내는 박수와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학생들의 피로 물들었던 문제의 종로4가를 지나칠 때와 종로2가를 통과할 때 대학교수단의 울분은 더욱 높아졌고, 따르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수도 수천명을 헤아렸다. “학생 죽인 살인귀를 처단하라”는 구호가 울렸을때는 버스속에서도 전차 속에서도 시민과 학생들이 환호하였다. 백발의 교수로부터 젊은 교수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요구하며 구호를 부르고 질서정연하게 종로거리를 지나칠 때 양쪽 빌딩 속에 있는 다방, 미장원, 병원에서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렀다. 시민들은 자꾸만 이 시위대열에 끼고자 하였고, 학생들은 이 행렬이 평화롭고 질서정연하게 끝마칠 수 있도록 대열의 양편에서 이들을 막았다. 시위에 나선 교수들은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도록 30분 이상 쉴 새 없이 구호를 외쳤다. 이들을 뒤따르는 군중은 어느덧 만 명에 가까웠다. 을지로 입구를 거쳐 미국대사관 근처에 다다를 무렵에는 걷잡을 수 없는 노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교수단은 대열을 깨뜨리지 않았으며, 오후 6시 40분 경 미국대사관 앞을 통과할 때엔 애국가를 불렀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 조화영 편, 151-152쪽 ; 김재희 편, 108-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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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각 대학교수단 시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마지막으로 선언문 낭독]
      혼잡한 시위대는 오후 6시 50분 경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국회의사당 앞에 당도하였다. 그 무렵, 이미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 앞에 나타나기 시작, 시위대를 위협하였다. 이항녕 교수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다시 한 번 시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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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계엄군 출격했으나 군중은 환호]
      오후 7시, 대학교수단이 격앙된 가운데 시위종결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부근엔 이미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몰려들어 교통이 완전 차단되었고, 흥분한 군중들은 좀 처럼 흩어질 기미가 없었다. 이즈음 중앙청 쪽에서 1개 대대로 추산되는 군대가 5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광화문 쪽으로 진격하여 왔다. 출동한 탱크는 해산을 주저하던 군중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의사당 앞으로 군중이 쏠리자 예민해진 군대는 일제히 착검을 하고 강제해산의 태세를 갖추었다.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어스름이 짙어가는 속에서 극도로 흥분한 군중은 누구랄 것 없이 “이승만 정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한 학생이 “불법선거를 규탄한다”는 학생들의 혈서로 된 플래카드를 양 손에 펼쳐들고 군대 대열을 기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군중은 “와”하는 함성과 함께 경비차가 진격해 온 군대 대열 속으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군인들은 드디어 방독 마스크를 쓰고 수없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대항도 하지 않고 총도 쏘지 않았다.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탱크가 엔진을 걸고 전진할 태세를 보이자 한 학생이 옷을 벗어 앞가슴을 내놓고 “쏘라!”고 고함을 질렀고, 군중들은 다시 박수를 치며 구호를 외치고 기세를 올렸다. 한 학생이 “아저씨여! 형님들이여! 다 같은 백성인데 총을 쏠 수 있습니까?”고 외쳤고, 일부에서는 최루탄으로 눈물이 고인 눈을 부비면서도 연상 “국군 만세!”하고 소리쳤다. “ 평화로운데모를하는우리들을제발막지마세요”하고애원하는소리도들렸다. 군중은 최루탄의 독소가 가라앉으면 전우가와 3·1절노래, 그리고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군인들은 소지한 총을 쏘지 않았고, 구호를 부르고 함성을 올리는 군중의 흥분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동아일보 기자, 256-266쪽 ; 조화영 편, 155쪽 ; 『동아일보』1960. 4. 26 석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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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군과 하나 된 시위대]
      밤 8시 경, 어둠은 짙어졌는데 시위군중은 더 많아졌다. 이즈음 시위대의 주력은 17-18세의 소년층이었다. 처음에는 2대만 동원되었던 탱크는 늘어가는 군중과 비례하여 6대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경비군들은 시위를 제지할 수 없었고, 경비대열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시민이나 학생들도 시위질서를 갖추지 못하였다. 조직 없는 시위군중 속엔 대표자가 없어 흥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킬만한 주인공도 없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군은 병력을 계속 증가하였다. 나중에는 사단장 조재미 준장까지 출동하였지만 군중은 급거 출동한 탱크와 다수군대에 오히려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사단장과 연대장은 최루탄 사용을 금지했다. 군인들이 멘 총대는 군중들에게는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하고, 그저 1개 대대 병력이 한 줄로 시위대를 막아 중앙청 쪽으로만 행진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뿐이다.

      시위군중 중 다수를 차지하는 10대의 소년들은 탱크에 뛰어올라 만세를 부르는가하면 헌병 지프차에 올라타고 소리 높여 구호를 부르기도 했다. 사단장이 군중들에게 “구속된 전 학생을 오후 7시에 무조건 석방하였다”며 해산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군중은 여전히 흥분상태에서 분산되지 않고 열광하였다. 이날 밤 종로 일대와 동대문 및 성북경찰서의 경찰들은 전부 철수해 경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군중의 열기는 더 높아져만 갔다. 일부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서대문 방면으로, 종로 방면으로, 시청 방면으로 움직였다. 밤하늘이 터져라 사방에서 외치는 함성은 서울 하늘을 진동시켰다. (『동아일보』1960. 4. 26 석1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15쪽 ; 동아일보 기자, 256-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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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내무부 앞 연좌시위]
      오후 8시 경, 300-400명의 시위대는 시청 앞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뛰어서 치안국 앞에 도착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최인규, 한희석을 때려 죽여라”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연좌시위를 하였다. 구경하던 시민들 사이에선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굳게 닫힌 치안국의 철문 속에서 사복경찰관 수 명이 이 상황을 바라다보고만 있을 뿐 정복경찰관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시위대는 계속 구호를 외쳤으나 폭력사태는 없었다. 약 30분 후인 8시 반 경 시위대 일부는 다시 을지로2가 쪽으로 달려 나갔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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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시경에도 쇄도]
      한편 이 날 300명가량의 시위대가 서울시 경찰국 앞에도 쇄도하여 청사 안으로 침입하려다가 경찰 측의 발포로 물러섰다. 시위대는 남대문파출소에 투석하여 많은 유리창을 깨뜨렸다. 그 사이 1개 대대 병력으로 추산되는 육군 보병들이 각기 M1총과 경기관총으로 무장하고 행진해 와 서대문 로터리에 원형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군중은 “국군은 우리들 편이다”, “나라위해 함께 싸우자” 고 부르짖으며 박수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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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이기붕 집서 발포]
      오후 8시 반 경, 의사당 앞에서 전우가와 애국가 등으로 기세를 올리던 시위대 중 일부가 서대문 쪽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렬로 늘어선 군인들의 경비망을 뚫고 이기붕 집을 향해 행진하였다. 1,500-2,000명가량의 시위대원들은 때마침 이기붕집 주변의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것을 보자 그대로 “우-”하며 정문 앞까지 밀려들었다. 시위대는 “이기붕도싫다! 공산당도싫다!”, “살인선거책임지라”, “이기붕은 우리 앞에 사과하라”고 고함치면서 대문을 뒤흔들고, 대문 바로 앞에 있는 경비실을 때려 부쉈다. 뜰 안에는 경비원들이 있었는데, 시위대는 “경관 물러가라”고 외쳤다. 그러자 사복경찰과 경비원 수 십 명이 곤봉으로 시위대원을 구타하였고, 시위대는 투석으로 맞섰다.

      이 무렵 세종로 쪽에서 트럭과 지프차에 실린 200명가량의 병사들이 동원되어왔다. 대대 이상의 병력은 시위대원들을 헤치고 ‘앞에 총’ 자세로 양 쪽 길을 막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이들을 맞이하여 병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시위대는 연이어 군가를 부르며 “국군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시위대원의 구호와 전우가 소리는 점차 소란해지고, 이기붕 집을 돌파할 듯 사태가 험악해질 무렵, 돌연 “탕! 탕!…”하는 총포 발사 소리가 났다. 최초에는 약간의 공포발사로 들렸으나 얼마동안의 간격을 둔 후 본격적인 실탄 사격이 일어났다.

      발사 장소는 이기붕 집 안이었다. 군중은 군복을 입은 경비경찰관이 발사한 것으로 인정하고 “살인경찰관을잡아라!”, “우리의 원수 경찰관을 죽여라!”고 고함쳤다. 이때 4명의 군중이 이기붕 집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대문은 굳게 닫히고, 집안에는 전등불마저 꺼져있었다. (25일 시위대가 들이닥치자 이기붕 일가는 4월 19일에 이어 또다시 6군단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단이 이미 부통령 당선과 공직을 사퇴한 그를 어떻게 대우하여야 할 지 몰라 난처해하였다. 결국 군은 참모회의 끝에 이들에게 부군단장 숙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이기붕 일가는 이튿날 경무대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이틀간 은신한 끝에 28일 새벽 일가가 모두 자결하였다(조화영 편, 340쪽).)

      약 20분 후 세 번째로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진동하였다. 군중들은 다시 땅에 엎드리고 3-4명이 쓰러졌다. 실탄 사격으로 뒤로 주춤 물러섰던 군중은 새로이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다시 모여들어 구호와 고함을 지르면서 “또 죽었다!”고 소리 지르며 차츰 험악하게 폭력화 하였다. 헤드라이트를 켰던 시발택시 1대와 전등불을 켰던 길가 민가 1동이 각기 약간 파괴되었다.

      이기붕 집과 서대문 로터리, 서울고등학교 주변에는 도합 3천 명 가량의 군중이 후퇴할 줄 모르고 “정·부통령선거 다시하자”,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구호를 불렀다.

      군대병력은 차츰 증가하여 약 600명의 사병들이 3각 지점에 포진하였으나 이들은 일절 발포하지 않았다. 서대문서 근처 파출소에서도 정복경찰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경찰서는 군대들이 경비하는 상태였다. 군중 틈에서는 곡성까지 터뜨리면서 “살인선거 물리치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서대문에서의 부상자는 약 12-13명으로 그 중 8명은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고, 나머지 4-5명의 중상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운반되었다. 적십자병원의 부상자들은 대부분 경상자들인데, 의사는 이들이 엽총 산발탄에 맞은 것 같다고 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6 석1·3면.일부 기록에서는 이를 헌병과 경찰관으로 혼성되어 있던 경호대가 공포를 발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16쪽), 이기붕 집 발포는 계엄사에 의해 이기붕의 차남 강욱의 친구 박인근 외 2명이 엽총 20발을 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사고로 최성림(22, 남, 상업, 논산)이 중상을 입었으며, 기타 7명은 타박상을 입었을 뿐 죽은 자는 없다고 한다『(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 조화영 편, 160쪽).)

      계엄사 발표로는 이날 이기붕의 집 앞에서 부상을 입은 시위대원은 다음 8명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가 응급치료를 받고 귀가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계엄사 발표 이기붕 집 앞 부상자 명단
      ●김세춘(남 24, 영등포 산290, 골절상) ●김승혜(남 13, 문리사대부중 1년, 졸도) ●김광일(남 19, 오산고, 우복부 파편상) ●은현배(남, 뇌좌상, 실신상태) ●최정우(남 19, 서대문구 행촌동45, 졸도) ●최성림(남 22, 논산읍 화지2동, 엽총상) ●윤주남(남 19, 중동고, 1년) ●김준호(남 21, 묵정동 8-35, 인후출혈)

      시위는 오후 11시 반 경부터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계엄령 하의 통행금지 시간을 염려한 군중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기붕 집 안에는 600명 가량의 시위대원들이 “이대로 나가면 도중에 경찰 놈한테 붙들려 죽고 만다. 농성하자”는 측과 “군인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집까지 보호해 달라고 하자”는 측의 양론으로 한참 옥신각신 하였다. 그러나 경비사병들의 지휘관인 장교 하나가 군중 앞에 나와 “여러분은 우리의 형제요, 동포입니다. 우리가 무전으로 시내 각 서에 연락했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시오”하고 이들을 안심시켰다. 마침 계엄사령부 측에서 스피커를 통해 “우리는 여러분의 형제요 동포입니다. 아무런 염려 말고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하며 누차 부탁하자 차츰 헤어지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 기자, 216-262쪽 ;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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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깡패 두목 임화수·이정재 집 무너지다]
      성난 시위대의 일부는 25일 밤 9시 경 낙원동에 있는 정치깡패 두목 임화수의 집과 그가 경영하는 종로5가의 평화극장으로 몰려갔다. (평화극장은 종로4가 5번지 현 보령약국 인근 한일빌딩 자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당시 한국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던 임화수가 사장으로 있던 곳이다.)

      시위대를 막기 위해 2중3중으로 방어선을 치고 있는 군인들에게 시위대가 닥치자 공포에 질린 농촌출신 군인들은 탱크로 시위대를 밀면서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이 일로 1명이 탱크에 깔려 머리가 파열되고, 최소한 5명이 관통상을 입었다. 부상자들은 인근병원으로 운반되고, 그곳에서 다시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시위대는 또 연지동에 있는 이정재의 집을 파괴하였다. 이정재는 동대문시장 안에 자신의 왕국을 세워놓고 10억대의 재산을 착취하여 호화스러운 집에 살고 있었다. 이 집에는 시가 100만 환 가량의 나무가 심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집은 26일 새벽 4시 경 전소되었다.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 조화영 편, 161쪽 ; 동아일보 기자,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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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대문 근처는 시위대가 완전 장악]
      밤 10시 이후 동대문 근처는 완전히 시위대가 장악하였다. 종로5가에서 신설동 로터리 사이에서 시위대는 지나가는 시발택시, 트럭 등 10여대를 탈취하여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종로4가에서 5가까지 사이에 탱크 10여 대로 장비한 무장군인들의 차단으로 돌입하지 못한 채 구경꾼들만 모퉁이에서 서성일 뿐이었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11시 경, 종로4가 동대문경찰서를 중심으로 경비하고 있던 국군부대와 수 십 명의 시위대들이 충돌하여 발포로 3명이 관통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조선일보가 발표한 동대문 앞 부상자 명단

      부상자(대학병원)
      ●박상헌(남 23, 강릉시 욱산동 657) ●박찬하(남 18, 대동상고 3년) ●이한수(남 20, ○산고 3년)

      경상자(대학병원)
      ●김진영(서울대 교수) ●홍진표(남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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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해무청 앞 발포]
      밤 11시가 좀 지난 시각, 종로 쪽으로 갔던 시위대가 군용 트럭과 지프차를 빼앗아 나눠 탄 후 세종로까지 와서 광화문우체국 앞에 군인들이 설치한 저지선을 통과하기 위해 약 10분가량 옥신각신하였다. 시위대는 차량은 빼앗겼으나 군인들의 방어선을 뚫고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갔다. 200-300명의 시위대가 스크럼을 짜고 계엄군의 저지망을 돌파하여 “경무대로 가자!”고 외치면서 경무대 쪽으로 달음박질하였다. 11시 35분 경에는 중앙청 앞을 거쳐 해무청 앞에 이르렀다. 해무청 앞에서부터는 계엄군이 발포지역으로 정하고 있어, 배치된 군인들이 거듭 발포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선거 다시 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사납게 내닫자 계엄군은 사격을 시작하였다. 3명이 하반신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고, 군인들은 이어서 공중에 대고 약 5분간 일제 발포를 하여 시위대를 후퇴시켰다. 시위대의 기세는 꺾이고 11시 40분 경에는 몇 무리로 흩어져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16쪽)

      26일 자정 넘어 새벽 1시 반이 지나도록 종로5가 일대와 신설동 방면에서는 여전히 수 천 명의 군중이 계속 시위를 감행하는가 하면, 세종로에 있는 중부소방서 앞에서는 약 30명의 남녀 시위대원들이 구호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 앞에 늘어선 100여 명의 사병들은 그저 묵묵히 시위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학생들은 새벽 2시까지 광화문 네거리에서 연좌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6 석1·3면 ; 조화영 편, 155-156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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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부상자 약 20명 추산]
      이날 저녁부터 발생한 시위의 부상자는 약 2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 적십자 병원에 입원 중인 8명은 서대문 이기붕 집 앞에서 총상을 입었으며, 여기서 발사된 총탄은 엽총의 산발탄과 같은 것으로 환자들은 모두 열상(裂傷)을 입었다. 심야의 서울대학병원 문 앞에는 의사들과 환자들을 실어 나르는 시위대원으로 웅성거렸고, 메디컬센터에서도 긴급 동원된 외국인 의사와 간호사 30여 명이 구급환자들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4월 25일 동아일보가 확인한 부상자 명단

      적십자 병원
      ●최종우(19, 배제고, 행촌동 4가 45) ●이강열(24, 공업, 냉천동 4-1) ●민광호(24, 회사원, 대현동) ●박근성(21, 직공, 냉천동 79-3) ●김승동(13, 정동 16) ●이혜춘(23, 영등포구 당산동29) ●김광길(19, 오산고 도원동 11) ●하석현(남대문시장 2층 내 고학생) 이상 8명

      메디칼센터
      ●조경환(17, 구두닦이, 서소문동 75) 이상 1명

      대학병원
      ●박찬화(18, 대동상고 2년, 중상)(주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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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천 [강원도 첫 시위 발생]
      25일, 3·15 이후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시위가 발생하였다. 춘천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은 3·15 불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감행하였다. 학생들은 이날이 개교기념일인데도 학교당국이 기념식을 무기연기하기로 결정하자 오전 10시 시위대열을 편성하여 거리로 뛰어나왔다.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구속된 애국청년 학생을 석방하라”, “악질 고문경관을 살인죄로 처단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 수업을 즉시 계속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같은 시간에 춘천여중·고등학생들도 “거짓과 구악(舊惡)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일시에 1천여 명의 학생시위가 노도와 같이 일어나자 거리는 완전히 시위대의 독무대로 변하였다. 시위대는 소양로4가를 거쳐 중앙시장, 시 교육구청을 지나 강원일보사를 거쳐 중앙로 로터리에서 농성하다가 오전 10시 20분 경 춘천경찰서 앞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도지사·시장·경찰국장·서장을불러오라”, “경찰은물러가라”고외쳤다. 그러나 경찰서 정문 앞을 경비하던 수많은 경찰관은 일절 이를 간섭하지 않고 묵묵히 서있기만 하였다. (『강원일보』1960. 4. 26 1면 ; 조화영 편, 298-303쪽 ;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조선일보』1960. 4. 25 석3면)

      이때 성수중·고등학교 학생 50여 명, 보인기술고등학교 학생 약간 명이 합세하였다. 다소 흥분한 학생들은 경찰 경비차에 투석하였으나 경찰들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않았다. 이어 시위대는 시청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춘천여자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이 이들과 합세하여 중앙로 로터리를 지나 시내로 들어갔다. 약 700명으로 증원된 시위대는 시민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시위를 계속하면서 시청 및 자유당 시당건물에 투석하여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강원일보』1960. 4. 26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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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천 [시위 학생들, 춘천시장과 일문일답]
      한편 정오 경, 춘천농과대학생 200여 명도 도지사 공관에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지사 나오라”고 요구하며 농성투쟁으로 들어갔다.(『강원일보』1960. 4. 26 1면)

      시위대는 심 시장을 대열에 놓고 함께 도 공관으로 가 두 차례나 구내에 돌입하면서 심 시장에게 지사를 불러오라고 요구하였다. (정병호·설정일, 「춘천고등학교」, 사월혁명청사편찬회,『 민주한국 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530쪽 ; 조화영 편, 298-303쪽 ;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 『조선일보』1960. 4. 25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6-157쪽)

      1. 구속학생을 석방하라.
      2. 학교 문을 즉시 열어라.
      3. 학원에 자유를 달라.
      4. 대학 입학률을 재고(再考)시켜라.
      5. 학원에 정치적으로 개재 말라.

      이에 대하여 홍 지사는

      1. 구속학생 석방은 이 대통령께서 방화 살인만 범인으로 취급하고 기타는 전부 석방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었다. 그리고 4·19 시위시 방화, 살인 등은 학생이 한 것이 아니었다.
      2. 학교의 문을 즉시 열게 하는 문제에 언급하여 문교부장관에게 전화로 문의한 즉 조속한 해결에 노력할 것이라는 답변이 있었다.
      3. 학원에 자유는 기왕에도 보장한 줄 알았다. 앞으로도 학원의 자유는 보장될 것이다.
      4. 대학입시에서 합격률이 불량하다는 것에 대하여 본도(강원도)의 실정은 재정이 빈곤하여 ○○○○도 ○○ 못하는 형편이다. 도서관을 개설하는 등 선처하겠다.
      5. 학원에 정치적 개재가 없게 하는 점에 대하여 이번 시위에 대한 사후 책임추궁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라.
      (『강원일보』1960. 4. 26 3면. (○는 판독불능 ; 편집자))

      고 답변하였다. 그는 또 3·15선거는 부정으로 보며, 이미 사표를 냈다고 말하였다.

      시위대는 이번에는 경찰서로 향하여 서장의 지프차를 부수고 강원일보사로 향하였다. 강원일보사에서는 신옥철 사장에게 “공정한 도민의 눈과 귀가 되어 달라”는 보장을 받고 돌아섰다. 그러나 몇몇 학생들은 돌팔매로 2층 사장실의 유리를 깼다. 오후 3시 경 시위대는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정병호·설정일, 530쪽 ; 『한국일보』1960. 4. 25 석1면 ; 조화영 편, 298-303쪽 ;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 『조선일보』1960. 4. 25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6-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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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천 [밤까지 번진 시위, 봉화 들고 질서 있게]
      밤 7시 45분, 성수중·고등학교 학생 150여 명은 2시간에 걸쳐 야간 횃불시위를 감행하면서 “경찰국가 타도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를 행진하였다. 오후 7시 경부터 시내 봉의국민학교 교정에 모이기 시작한 이들은 선생님들로부터 시위는 해도 파괴 폭행 등 불법행위는 절대 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인 후 12개의 횃불을 든 학생들을 대오의 전후와 중간에 배치하고 행진하였다. 경찰서 앞에서 일부 학생들이 강제침입하려는 것을 간부급 학생들이 제지하며 “평화적인 데모는 우리의 자유이다”등 10여 가지 구호를 외치다가 8시 20분, 다시 춘천경찰서 앞에 이르러 대열을 정렬하였다. 경찰들은 경내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자체경비만 하여 시위는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경찰서 앞에서 구호를 외친 시위대는 계속하여 낙원동, 미 제4유도탄기지 사령부 앞을 거쳐 소양로2가를 지나 사창고개를 넘어 춘천방송국 앞까지 시위를 감행하고, 오후 9시 10분 경 평온하게 해산하였다. (『강원일보』1960. 4. 26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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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경찰서장과 시장도 부정선거 시인]
      25일 오전 9시 30분, 진주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은 “탄압 민주주의는 멸망한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와 법원 앞 로터리·중앙로터리·철교 앞·시공관 앞·경찰서 옆길·진주군청 앞으로 해서 다시 법원 앞으로 돌아 행진하였다.

      오전 11시 20분 경 진주농과대학과 농업고등학교 학생시위대 2천여 명도 진주 경찰서 앞에 집결하여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농성하였다. (조선일보는 1천 명으로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25 석3면).)

      진주서장 유사원 총경은 이들 시위대원들에게 “천하공당인 자유당도 해체의 운명에 놓여있고, 전 국무위원들도 사표를 내고 부통령에 당선된 이 의장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나는 듣고 있다. 오늘날까지 역사 깊은 진주에서 학생데모가 없기를 바라고 막아온 것은 이 진주가 평온하기를 바란 것뿐이며, 오늘 여러 학생들이 평화리에 데모를 한데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는 연설을 하여 시위대의 박수를 받았다. 시위대 앞에 나타난 진주시장은 “3·15선거는 부정선거였다”고 시인하고 또한 “사표를 내겠다”고 말하였다. 이동안에 학생 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였고, 진주사범학교 학생들도 교정에 집결하였다.

      한편 이날 문해술 자유당 진주시당위원장도 역시 “3·15선거는 부정선거였다”고 말하고 신문지상이나 기타 방법으로 시민들에게 사과하겠다고 약속하여 시위대는 오후 1시 30분 경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6 조3면·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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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할머니시위에 마산시민 3만 명 합류]
      24일의 마산 노인의 시위에 이어 25일 오후 1시 15분 경, 시내 부림동 시장 강남극장 앞에 모인 할머니 200-300명이 대오를 갖추고 부림시장을 출발하여 시위를 하였다. 흥분한 시위대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 “총 맞아 죽은 학생 원한이나 풀어주소”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애국가와 전우가를 손뼉 쳐가며 부르면서 북(北)마산파출소를 거쳐 구(舊)마산 시가를 한 바퀴 돌고, 신(新)마산 쪽으로 향하여 다시 시청 앞을 통과하였다. 오후 3시 30분 현재 약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마산경찰서 안으로밀려들어가 “고문 경찰 잡아내라”, “살인 경관 잡아내라”고 외치면서 대혼잡을 이루었다. (『마산일보』1960. 4. 26 2면『; 동아일보』1960. 4. 26 조3면 ;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마산일보에는“25일 이채로웠던 마산 노인의 데모에 이어 26일에는 … 할머니들의 데모가 시내에서 일어났다”고 하였으나, 중앙일간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모두 이 기사가 4월 26일 조간에 실린 것으로 보아 할머니시위가 26일에 발생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조선일보는 이날 할머니시위대의 숫자를 약 400명으로 추산하였고, 시민들의 호응으로 1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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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해 [중·고생들, 폭우에도 불구하고 시위]
      폭우가 내리던 24일 밤 7시 경 김해읍에서 김해농업고등학교 학생을 비롯해 김해여자중학교와 김해중학교 학생 약200명이 시위를 감행했다. 이들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약 40분간 3차례에 걸쳐 시가를 행진했다. 이 학생들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 “경찰은 각성하라”, “읍민은 궐기하라”등의 구호를 외쳤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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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 [민주당원 수 백 명 시위]
      민주당 영주군당에서는 “학도들의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말자”, “정부는 계엄령을 철폐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3월선거는 불법이다 취소하라”등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당원과 수 백 명이 합세하여 질서정연하게 시위하였다. 이들은 대구 무진 앞에서 출발, 역전을 거쳐 중앙시장을 지나 당사무실 앞에 돌아와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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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 [중·고생 500여 명 횃불시위]
      남원에서는 24일 용성중학교, 남원농업고등학교, 남원중·고등학교, 남원여자중·고등학교 학생 약 500여 명의 횃불시위가 있었다. (조화영 편,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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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6
    • 시위 상황 개요
      26일 오전,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언명하였다. 또한 3·15선거가 부정하게 실시되었다는 여론에 따라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고 밝혔다. 12년간의 독재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학생과 시민들의 독재에 대한 끈질긴 항거는 끝내 주권의 승리를 얻어냈다.

      서울에서는 4월 25일 야간시위에 이어 26일에도 오전 5시 반 경부터 세종로·종로·을지로 일대에 수 만 군중이 또다시 모여들어 시위에 돌입하였다. 서울 시내를 뒤덮은 수 십 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1,000여 병사들의 경비를 뚫고 중앙청 쪽으로 밀어닥쳤다. 군대는 최루탄과 공포탄 등 위협발사를 하였지만 시위군중은 오히려 “국군만세!”를 외쳤고, 군 또한 시민들을 무력으로 저지하지 않았다. 성난 시위대는 탑골공원에 있는 이승만의 동상을 무너뜨려 끌고 다니기도 하였다.

      오전10시반경,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이 나왔다. 이소식을 전해들은 부산·대전·대구·목포·천안·마산·포항 등 전국 각 지방의 시민들은 환호하며 거리로 몰려나왔다. 거대한 시위의 파도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한 기자는 이날을 “8·15 해방 후 겨레가 맞이한 제2의 해방의 날”로 보도하였다. 극도로흥분한 시민들은 곳곳에서 경찰관서에 불을 지르고 마구 부수는가 하면, 이기붕의 집을 비롯해 부정선거에 연루된 인물들의 집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등 큰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서울과 인천에서는 의외로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은 곧바로 질서유지와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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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이른 아침부터 서울 뒤덮은 시위 군중, 공포 불구하고 수십 만 돌진]
      25일 밤에 이어 26일 새벽까지 단행된 시위는 오전 5시 반 이미 재기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새벽 2시가 넘도록시위를 계속했던 30-40명의 주력 학생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세종로 주변에서도 700-800명, 종로4가 주변에도 1,000여 명, 미아리 방면에도, 을지로2가와 4가에도 700-800명의 군중이 길가에 늘어선 사병들의 경비태세에도 아랑곳없이 웅성대고 있었다. 이 무렵 어느 틈에 탈취했는지 60여 명의 학생들이 버스 1대와 시발택시, 합승택시 등에 각기 분승하여 거리를 질주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는데, 보는 군중마다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경비사병들은 그저 묵묵히 바라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전 7시 가까이 되자 군중은 시위태세를 갖추어 “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을지로와 종로, 세종로 등에서 집단적으로 행진하며 거리를 이동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조간신문을 손에 들은 일부 군중들은 “우리 학생들이 또 죽었다”, “경무대로 가자”, “이기붕을 죽여라”, “이승만 타도 하자”고 흥분된 구호를 우렁차게 불렀고,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차츰 증가하여 도합 3만 명가량이 도처에서 들고 일어났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 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162쪽 ; 동아일보 기자, 「4·19에서 4·26까지의 서울 : 일선취재기자 편」,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263쪽)

      한편 주한미군의 정보기관원들은 4월 26일 오전 7시 45분 1만 5천 명이나 되는 군중이 동대문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한 시간여만인 오전 8시 30분에는 군중의 숫자가 7만 5천여 명으로 증가하면서 동대문과 세종로 사이의 종로 길을 메웠다고 했다. 주한미군 정보 보고에 의하면 시위대는 1) 3·15 부정선거의 재선거, 2) 이승만 사퇴, 3) 경찰의 정치적 통제 철폐 등을 요구하는 구호를 계속해서 외쳤다고 한다. (「주한미군사령부가 합동참모부에 보낸 전문」1960. 4. 26, 19 April 2/2, Box 75, Central Decimal Files 1960, RG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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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군의 동향]
      이날 아침 군대는 시내 요소요소의 배치를 더욱 다져놓았다. 중부소방서 부근에 군인 바리케이드를 펼치고 탱크 3대를 출동시켰고, 시경무기고와 경기도청 사이의 도로위에는 철조망으로 높이 1미터 50센티미터 가량의 바리케이드를 가로질러 일반인의 통행을 막았다. 덕수궁 앞과 시청 앞에도 군대가 출동하여 시청 일대를 경비하고 있었으며, 남대문 앞과 을지로 등에도 수 개 분대가 파견되어 일부는 트럭에 탄 채 대기하고, 일부는 기관총을 중심으로 뺑 둘러서서 경비를 하고 있었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25-126쪽)

      그러나 조재미 사단장과 연락장교 이석봉 준장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꽉 차버린 거리를 보며 병력을 파견하여도 별 소용이 없으리라 판단하고, 직접 나가서 해산을 종용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시위대를 저지할 목적으로 지프차 2대에 각각 분승하고 2개 중대를 옆에 따르게 하여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파고다공원 앞에 이를 즈음에는 완전히 시위대에 포위된 상태가 되어버렸고, 옆에 따라 오던 병사들도 시위대와 혼합되어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조재미 사단장은 그 당시를“그 소음은 마치 수돗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같았으며, 우리들은 이제 오도가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죽음에 직면하였던 것 같은 공포를 어찌할 수 없었다”, “종로3가 근처에 이르자 지프차를 향한 박수소리가 일어나고,‘ 군인 아저씨들 최고다!’는 외침이 들렸다“고 술회하였다(조화영 편,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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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중앙청으로]
      오전 9시 경, 삼엄한 바리케이드에도 불구하고 이미 1만여 명의 군중이 의사당 앞과 광화문 네거리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우리 국민은 군인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를 내세우고 있는 시위대도 있었다. 군인들은 이들을 일절 방임상태로 두었으며, 급기야 3대의 탱크에 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뛰어올라 군인들과 함께 타고 앞뒤로 밀고 당기기를 하였다. (조화영 편, 163쪽)

      9시 20분 경, 광화문 네거리는 들어설 데가 없을 정도로 메워졌다. 약 200명가량의 군인들은 횡렬 2열로 서서 중앙청에 이르는 길이 50미터의 차도와 보도를 완전히 봉쇄하고 시시각각으로 수가 불어가는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약 1개 중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군중 쪽으로 다가왔다. 이리저리 탱크를 피하면서 비켜서지 않던 군중은 갑자기 소복한 여인 하나가 탱크 위에 기어올라 만세를 부르는 것을 계기로 삽시간에 탱크에 기어올랐다. 처음에는 지휘장교와 기관총수가 기어오르는 학생들을 내려 보내려고 애를 썼으나 도저히 가망이 없자 시위대를 실은 채 행진하였고, 나중에는 시위대의 말을 좇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였다. 때때로 군중들의 열광은 도를 넘치는 일도 있었으나 군인들은 공포 1발도 쏘지 않았다.

      군중의 수가 점점 가중되면서 일부가 중앙청 쪽으로 꺾어 올라갔다. 시위대는 “경무대로 가자”고 환호를 올리며 제1바리케이드를 돌파, 국제전신전화국(현 KT 본사)앞까지 진출했다. 이에 따라 군중의 물결과 탱크에 개미떼 같이 달라붙은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뒤따랐다. 그러자 중앙청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강력한 제2바리케이드에서 최루탄 4개를 발사하여 네거리는 아우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시위대가 계속 밀려닥치자 계엄군은 약 3분 간 수 백 발의 공포를 발사하면서 뒷걸음쳐 중앙청 쪽으로 향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 조화영 편, 163쪽. 조선일보는“최루탄 10여 발을 쏘았으나 허사가 되자 약 3분간에 걸쳐 공포를 발사했다”고 보도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오전 10시 15분 경, 군중은 “3천만 동포 총궐기하라!”는 플래카드를 지프차 위에 내세우고, 반공회관 앞까지 진출했다. 제4경비선인 경기도청 앞까지 시위대의 물결이 진출하자 군대가 공포를 발사, 시위대는 반공회관까지 후퇴했다. 군대는 트럭 4대로 경비병을 증강하고 반공회관 앞에 다시 바리케이드를 쳤다. 군중의 물결은 또다시 제1경비선 사병들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곧 불타버린 반공회관 앞에서 중앙청 쪽으로 가는 탱크에도 시위대가 가득 올라타고 환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시위대는 “국민의 군인 환영”이라고 쓰인 플래카드와 함께 “국군 만세!”소리를 외쳐댔다. 시위대가 경기도청 앞에 철조망으로 가설되어있는 바리케이드와 군인의 저지선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동안 청소년들은 연도에 있는 가옥의 지붕과 담을 타고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이때, 일반인과 대학생, 고등학생 등 14명의 군중대표가 탄 차가 계엄사령부의 조재미·이석봉 준장의 안내로 경비망을 뚫고 경무대로 향하였다. 이들은 군중을 향하여 “이 대통령과 만나 요구조건을 말할 테니 기다리시오”하고 외쳤다. 광화문 네거리 외에도 전 시내는 이미 대통령 사퇴와 3·15부정선거 원흉처단을 부르짖는 군중들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26-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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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파고다공원에선 이승만의 동상이 쓰러지고]
      시위가 한창 무르익어가 점점 전 시가로 번져가고 있을 무렵인 오전 9시 45분,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안에 몰려든 수많은 시위군중은 구호를 외치다가 이 대통령의 동상을 보고는 “부셔버리자”는 소리와 함께 굵은 철사줄을 동상 목에 걸고 끌어 쓰러뜨렸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34쪽. 신문기사에는 이 대통령의 동상이 쓰러진 시각이 언제인지 나와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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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 군중 대표, 대통령 사퇴 성명 발표 전 이승만 면담]
      26일 아침 9시,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였다. 송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약 50분 동안 사태 수습책을 솔직히 말하였고, 시위대표자들과의 면담도 부탁하였다. 오랫동안 듣고 있던 대통령은 이를 수락하였다. 그래서 서울시내공설운동장 앞에서 시위를 하다 선출된 각계 대표 14명은 계엄사령관을 만나려고 육군부대에 갔다가 조재미, 이석봉 두 준장의 안내로 오전 10시 10분 경 경무대에서 송사령관과 만났다. 송 사령관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자세히 듣고 그중 5명만을 추려서 대통령과 만나게 했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200쪽. 시위군중 대표들이 이날 아침 이 대통령을 만난 사실은 분명한데, 모두 몇 명이며, 그들이 어떻게 선택되었고,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간인 대표로 경무대에 들어간 사람 중 하나로 알려진 유일라는 자신의 수기에서 군중 대표 14명 중 자신이 3명을 추려 민간인 3명과 학생 1명, 모두 4명이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 또한 대통령을 만나기 전 송 장군이“각하를 뵈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하고 물었을 때“그건 여기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각하와 직접 만나야 할 이야기들이니까요”했다고 한다(유일라, 「나는 대통령을 만나 하야를 권고했다」『, 실화』1960. 6월호, 84쪽). ●동아일보는“시내 공설운동장 앞에서 시위를 하던 군중대표 5명”이라 하였고, 이들 중 유일라(25, 노동)와 김기일(34, 독학생)의 증언을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조선일보는“시위학생 대표로 선발된 건국대 학생 한규철, 경희대 김효영 및 시민대표 구경석 등 3씨는 …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하고”라고 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6 석1면). ●몇 몇 기록에서는“계엄사령관을 만나려고 육군부대에 갔던 일반인· 대학생·고등학생 대표 14명인데 그 중 대통령을 만난 다섯 사람 중, 선용, 한규철, 유일라, 김기일 만이 알려졌을 뿐 나머지 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일보』1960. 4. 26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200쪽). ●반면 일부 기록은“이날 대통령을 만난 사람은 김선봉, 한규철, 유일라, 김기일, 이성화 등 다섯”이라고 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4쪽).)

      이들이 대통령과의 면담을 기다리는 동안 중앙청 앞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대표들은 울면서 “우리 학우가 죽어간다”고 송사령관에게 매달렸다. 송 사령관은 태연한 표정으로 “공포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2-144쪽)

      대표들은 이 대통령을 경무대 본관 남쪽정원에서 약 10분간 면담하였다. 허정과 호위 2명을 대동하고 대표를 기다리고 있던 대통령의 표정은 침울하고도 심각하였다. (유일라에 의하면 대표 4명은 처음에 경무대 응접실로 안내되었다가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안내로 정원에 가 이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는 허정과 곽영주가 있었다고 한다(유일라, 84쪽).)

      대표들은 경무대를 나오면서 “여·야 정객은 모두 믿을 수 없으니 군정을 포고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송 사령관은 “헌법을 존중하고 정치체제 밑에서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하면서 “군정은 절대로 안 될 말”이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일보』1960. 4. 26 석1면. ●당시 동아일보 기자 최원각의 글에서도“(대표들이) 경무대를 나오면서 송 중장을 잡고“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자유당도, 민주당도. 오직 계엄사령관 한사람만을 믿으니 현재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당분간 군정을 실시해 주십시요”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군정이라는 것은 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말살한다”고 잘라서 말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 하였다(최원각,「 송요찬론」,『 세계』제2권 6호, 국제문화연구소, 1960. 6, 176-178쪽). ●당시 발행된『육군연감』에도“송 사령관은 데모대와 정부, 다시 말하면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끼어 무척 고심했던 것 같으며, 또한 사태의 수습을 위해 그가 취한 액션이 하나의 국가 반란죄에 가까운 오해를 초래할까봐 세심한 주의를 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기술하였다. 또한“(송 사령관은) 이번 사태를 통하여 군대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또한 국민과 더불어 있다는 전통을 확립하였다는데 대해 보다 더 군인으로서의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육군연감』4293년판, 41쪽).)

      대통령에게 이와 같은 다짐을 받은 대표들은 바로 뛰어나와 육군본부에서 마련해준 선전차로 면담내용을 가두방송 하면서 시위의 진정을 호소하였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2-144쪽 ;『한국일보』1960. 4. 26 석3면. 유일라의 증언에 의하면 이 대통령은 미국대사를 5분간이나 기다리게 하고 대표들의 말을 들어주었으며, 대표들은 이 대통령이 참으로 애국자라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유일라,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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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조재미 사단장, 이승만 대통령 사임 소식 발표]
      오전 10시 30분 경, 매카나기 주한미대사와 유엔군 대표가 공포 발사 중에 군중을 뚫고 경무대로 달리는 것이 보였다. 이 광경을 본 시위대는 박수로 환호하였다. 곧 이어 공보실 보도차가 중앙청 앞에 출동하여 제15사단장 조재미 준장이 마이크를 붙잡고 이 대통령 사퇴담화의 요지를 발표했다. (사퇴 성명을 발표하면서 경무대는 시위군중을 의식하여 “가급적 빨리,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다하여 데모군중이 알도록 발표하라”고 하였다(김정렬, 『김정렬 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 264쪽).)

      오전 10시 50분, 이 대통령의 정식 발표를 기다리던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려고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이를 보고 조재미 사단장은 직접 경무대에 다녀와서 정식담화발표 여부를 다짐받아 오겠다며 20분의 시간을 달라고 호소하였다. 조 사단장이 간지 2-3분이 지났을까. 학생대표들이 “요구는 관철되었다”고 절규하면서 돌아왔다. 이에 뒤이어 학생대표들이 이 이상 피를 흘리지 말자고 호소하기 시작했으며, 약속은 틀림없으니 해산하자고 역설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 순간 시위대는 중앙청 정문을 돌파하고 광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11시 경, 이윽고 조재미 사단장이 돌아와 이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틀림없음을 확인했다고 마이크로 방송을 했다. 중앙청 담 안에서도 군 선무반의 “진정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울려나왔으나 억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시위대를 저지하지 못하였다. 계엄사령부 스피커에서 이 대통령 사퇴담화가 발표되자 흥분한 군중들은 이중삼중으로 겹친군대의 경비망을 뚫고 그대로 중앙청 정문으로 밀려들어갔다. 중앙청 앞에 대기 중이던 탱크 위에는 수많은 시위학생들이 새까맣게 뒤덮여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하고 통일행진곡을 부르며 경축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석3면 ; 동아일보 기자, 264쪽)

      11시 30분 경, 경무대를 다녀나온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를 실은 세단차가 해산하기 시작하는 중앙청 앞 군중 속에 파묻혀 들어왔다. 박수가 터져 나오고, 군중들은 “대한민국 만세!”, “ 미국 만세!”를 불렀다. 매카나기 대사가 탄 차는 환영의 뜻을 표하고자 몰려오는 군중에게 포위되어 길이 막혔으며, 이 때문에 경호 미군 MP 두 사람은 진땀을 빼면서 군중을 헤쳐 나가야 했다. 약 10명의 대학생들도 차 선두에 서서 사람의 물결을 헤치면서 매카나기 대사의 차가 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길을 터주었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29-131쪽 ; 동아일보 기자, 265쪽)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직도 많은 수의 무리들은 경무대 입구에 마련된 바리케이드 앞에 주저앉아 대통령이 직접 그들 앞에 나타나서 성명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군중의 수는 자꾸만 늘어 오후 2시 경 에는 1만 명을 헤아렸다. 경비장교와의 꾸준한 절충에도 그들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자 몇몇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오후 4시 15분 경 “이제 우리는 이겼으니 질서유지를 위해 다음 날 학생대표를 면담케 하자”는 대학생 수습반의 설득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3면 ;『조선일보』1960. 4. 27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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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이승만 대통령 사임성명 발표하자 거리는 감격과 환희로 충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 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성명이 전해지자 라디오는 임시 뉴스로 이 소식을 전했고, 각 신문들은 즉시 특보를 제작하여 벽에 붙이는 동시에 급히 가설된 마이크를 통해 이 사실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과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다. 신문사 차가 이르는 곳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사표를 낸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묻고 되물었다. 트럭·택시·지프차를 타고 거리를 휩쓸던 시위대는 이 중대뉴스를 듣자 갑자기 살기등등하던 기세가 감격적인 환희로 돌변하였으며, 태극기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가 하면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기도 하였다. 군중의 성난 물결이 폭풍우모양 스치고 밀쳐 자유만세를 외치는함성소리가지축을뒤흔들었다. “만세! 만세!”소리로거리를물끓듯하고, “와와와”하는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청에서 을지로에 이르는 가두에 집결한 군중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정국사태를 초조히 기다렸다. 신문사 지프차가 지나갈 때마다 호외를 찾고, “이승만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을지로 입구에서 7가에 이르는 거리엔 인파로 뒤덮였고, 태극기를 들고 나선 아낙네들, 어린 꼬마들로 지나간 8·15해방의 날을 방불케 하였다. 메디컬 센터엔 응급환자들을 대기하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밖에서 웅성대고 있었다. 만세 소리가 퍼져 나오고, 흥분한 군중들로 뒤덮인 미국대사관과 반도호텔 창구에선 외국인들이 연상 군중들의 궐기를 찬양하는 듯 연신 박수를 쳤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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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국회의사당 앞의 상황]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고 재선거를 실시하겠다는 담화발표 직후 국회의사당 앞에 운집해 있던 시민과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사람 수에 대해 동아일보는 ‘수천 명’으로『( 동아일보』1960. 4. 27 조1면), 조선일보는 “7만여 명”으로『( 조선일보』1960. 4. 27 조1면), 또 다른 기록에는“약 2만명”으로 보도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편, 209-210쪽).)

      이들은 ‘국민이 원하는’것을 분명히 알리자는 군중심리에 움직여 ‘긴급국민대회’를 의사당 앞에서 열고 다음과 같은 6개 항을 결의하였다. 26일 오후 국회는 본회의에서 이 6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보고사항으로 접수하였으며, 오후 4시, 이 내용과 거의 같은 4개 항목의 시국수습에 관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209-210쪽)

      [국민대회 결의문]

      (일부 기록에는 6개항의 내용은 동일하나 순서와 자구가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209-210쪽).국민대회 결의문一. 국민은 이 대통령의 즉시 하야를 원한다.一. 국민은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를 원한다.一. 국민은 내각책임제 개헌의 조속단행을 원한다.一. 국민은 3·15부정선거의 원흉을 즉시 체포 의법 처단할 것을 원한다.一. 국민은 내각책임제 개헌 후 민의원 의원이 총사퇴할 것을 원한다.一. 국민은 양유찬 주미대사와 유태하 주일대사의 파면을 원한다.출처 : 현역일선기자동인편, 『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209-210쪽)

      一. 일시 : 단기 4293년 4월 26일 하오 1시
      一. 장소 : 민의원 의사당 앞 광장
      一. 참석인원 : 약 7만 명

      [결의문]

      一. 국민은 이 대통령의 즉시하야를 원한다.
      一. 국민은 정·부통령의 재선거를 원한다.
      一. 국민은 내각책임제개헌을 원한다.
      一. 국민은 내각책임제 개헌 후 즉시 국회 해산을 원한다.
      一. 국민은 3·15부정선거의 원흉들을 즉시 체포 의법 처단할 것을 원한다.
      一. 국민은 양·유 대사의 즉시파면을 원한다.
      이상은 국민대회의 이름으로 엄숙히 결의한다

      단기 4293년 4월 26일
      국민대회대표 채영석
      민의원 의장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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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꼬마시위대]
      오전 11시 45분, 덕수궁 앞에 서있는 탱크 앞으로 4월 19일 동급생을 잃은 수송국민학교 어린이 1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달려왔다. (수송국민학교 6학년 1반 학생 한 명이 4월 19일 하교하는 도중 세종로 네거리에서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조선일보』1960. 4. 25 석3면). 일부 기록에는 덕수·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라고 하고(안동일·홍기범 공저, 286쪽), 또 다른 기록에는 200여 명으로 기록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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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서울시경찰국 앞의 상황]
      정오 경, 약 300여 명의 시위대들의 습격을 받은 시경은 위협발포로 일단 위기를 모면하였다. 경찰국 출입의 자유마저 잃은 경찰국 소속 경찰관은 군인들의 경비진 뒤에서 중무장을 한 채 서있었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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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대문 경찰서에서 무차별 사격]
      흥분한 400여 명의 군중은 종로4가에서 동대문경찰서를 향해 밀리고 또 밀렸다. 오전 11시 20분 경, 동대문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돌연 “탕, 탕탕탕!”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동시에 35명 정도 되는 시위대원이 일시에 쓰러졌다. 동대문경찰서 2층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관이 시위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한 것이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38-139쪽. 동대문 경찰서에서 총을 쏜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모두 다르다. ●조선일보는“경찰이 발포한 까닭에”라고 보도하였고『(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동아일보 기자는“경비 중이던 국군장교가 공포를 발사하여 군중들의 육박에 위협을 가한 후, 1개 분대로 추측되는 군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일제사격을”했다고 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 동아일보 기자, 266쪽). ●또 다른 기록은 이와는 또 다르게“시발택시를 타고 질주하던 소년 시위대는 동대문 경찰서에 이르러 고대학생 깡패 습격사건에 관련된 깡패를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이때 동대문서 2층에 있던 사복 입은 경관들이 발포”하였으며, “경비차 주둔하고 있던 군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화를 내고 철수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조화영 편, 167쪽).)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이날 11시 반 경 문제의 총탄이 튀어나온 동대문경찰서를 방화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 동아일보 기자, 266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38-139쪽)

      오후 1시 현재 서울시내의 법질서와 교통망은 완전 마비되고, 주요거리마다 꽉 차있는 약 30만 명의 군중은 그칠새없이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살인 경찰 잡아내라”고 드높이 외쳤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 『동아일보』1960. 4. 27 석3면)

      오후 1시 현재 동아일보가 확인한 동대문서 앞에서 발생한 사상자 명단

      사망자
      ●장이자(답십리동 399) ●이강섭(27, 돈암동 409) ●손흥구(31,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부상자
      ●김종철(22, 신당동 346) ●최재호(16, 서울사범학교 3년생) ●홍춘후(여, 24, 숙대3년)

      이밖에 수도의대부속병원에 20여 명의 부상자가 오후 1시 현재 입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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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title]
      26일 오후 2시 반, 4·19학생시위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각 대학생 및 대학출신 학생으로 구성된 ‘4·19청년학생동맹’대표 12명(재학생 4명, 전 운영위원장 8명)은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하고, 이 대통령에게 사태수습을 위해 다음 3개 항목의 조치를 취하기로 국민에게 공약할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또한 이 주장을 국회에도 반향 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 동아일보』1960. 4. 27 석1면. 당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는‘4·19청년학생동맹’회원들의 경무대 방문에 대한 인터뷰 내용은 홍영유가 쓴 책에 자세히 실려있다(홍영유, 『4월혁명통사』제9권, 182-196쪽). 그러나 내용은 차이가 있는데, 이들이 이른 아침에 이 대통령을 방문했으며, 모두 11명인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들이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건의문도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4·19청년학생동맹의 건의문4·19의거는 일제 하 광주학생운동과 3·1운동, 그리고 6·25전쟁에서 산화한 학도병과 똑같은 순수한 민족사랑과 불타는 조국사랑에 대한 충정에서부터 시작하였다.청순 남녀학생들의 정의를 위한 절규는 부정부패에 대한 항거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다.1. 평화적 학생데모를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 할 대한민국의 군경이 총칼로 제압해서는 안된다.2. 사상자를 보호조치하고 구금자를 조속히 석방해야 한다.3. 3·15부정선거의 원흉을 즉시 색출하여 엄단하여야 한다.4. 리 대통령은 하야하여야 한다.5. 국회의원, 정부각료, 대법관 등 삼부요인들은 총사퇴하여야 한다.6. 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중립적 인사로 과도선거 내각을 구성하여야 한다.1960년 4월 25일4·19청년학생동맹 일동출처 : 홍영유, 『4월혁명 통사』제9권,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 182쪽)

      [4·19청년학생동맹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한 3개 항목]

      1. 10여년간의 정치 및 모든 분야에서 잘못됨을 금일로서 청산할 것.
      2. ①정치적 공백기간을 막기 위해 국민으로부터의 수임기간 중(8월 15일전) 재선거실시의 의무를 수행할 것.
      ②국회의원 총사퇴론이 대두하고 세론이 내각책임제 개헌의 방향으로 움직이니 자유스러운 민의원선거가 필연적 과제이므로 선거를 시행하기 위하여 중립적인 선거관리 내각을 조직한다.
      3. 국가에 신기원을 획(劃)하던 1945년 11월 환국 당시의 이승만 박사로 돌아갈 것을 결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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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이른 아침부터 이기붕 집 앞에 모인 시민들, 집 안으로 돌입]
      오전 9시 경 부터 이기붕 집 앞에는 구경꾼들이 길이 메이도록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어느새 “선거를 다시 하라”, “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라는 플래카드를 준비한 학생들이 이기붕 집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서대문을 거쳐 출근하는 공무원과 일반시민들은 이 광경을 보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시위대와 시민을 합치면 그 수는 무려 5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 25일 밤까지 이곳을 경비 중이던 군대는 서대문 네거리로 철수한 채 원형으로 수비진을 치고 시위대와 시민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약 100미터 떨어져 있는 서대문 로터리에 군대가 약 2개 소대 가량 진을 치고 있을 뿐, 이기붕의 집에는 일가족은 물론 지키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9시 반 경, 시위대의 선두는 무방비상태이며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이씨 집으로 돌입, 문 앞에 세워진 지프차 한 대를 밀고나온 후 50-60명가량이 실내에 난입했다. 그들은 호화로운 가구와 장식품을 하나씩 들고 집 앞 전차 길까지 나와 성냥을 그었다. 집 안에서는 첫물 수박이 나오는가 하면 호피와 인삼·설탕·양탄자·침대 등 값진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모두가 사나운 불꽃을 올리면서 타올랐다. “백성의 피를 빨아먹은 놈”이라는 외침이 군중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격분한 군중은 사진 한 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었다. 시위대원들은 전날 밤 시위대에게 부상을 입혔던 엽총이 발견되자 곧 박살을 냈다. 방 안에서 1천 환권으로 된 100만 환 다발 두 뭉치와 2천만 환짜리 보증수표, 뇌물로 받은 물품을 수록한 ‘물품증여대장’도 발견되었다. 이 광경을 본 시민들의 노여움은 극도에 달했다. 100만 환 짜리 한 다발은 어느새 불길 안으로 들어가고, 한 다발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31-134쪽. 동아일보는 “데모대원들은 깊이 간직해둔 가구 속에서 수표 2천만 환 짜리(작년 10월 발행. 보수)를 발견하여 본사(동아일보사)에 일단 보관하였다가 다시 데모대원들이 비용으로 쓰겠다고 하여 이날 하오에 찾아갔다”고 한다. 또한“‘내방객 명단과 물품납입일지’ 도 있었는데, 경찰서 용지로 작성된 이 일지에는 수많은 자유당계·정객·장성·고관·실업가들의 명단이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매일처럼 계란 꾸러미와 과실, 그리고 쇠고기 등을 갖다 바친 사실이 역력히 나타났다”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3면).)

      오전 10시 경, 문산 방면에서 중무장을 한 군인들을 실은 20여 대의 트럭이 서대문 로터리에 다다랐다. 이를 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영하고, 군인들은 손을 흔들면서 환호성을 올렸다. 군인들은 200미터 쯤 떨어진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지난 날의 위세를 자랑하던 국회의장 관용차인 ‘서울 관 3호’승용차는 돌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 시위대원들에 의해 광화문 쪽으로 밀려 내려왔다. 그밖에 이기붕 집에서 나온 쌀 3가마와 밀가루 14가마 등은 시위대들이 상의한 끝에 부상자를 위해 쓰기로 결의하고 적십자병원으로 운반되었다. 이렇게 하여 백화점 못지않게 물건이 쌓여있던 호화스러운 자택은 오후에 이르러서는 처참한 형태만 남게 되었다. 저녁 때에는 방안의 도배지 한 장 성한 것이 없게 갈기갈기 찢어졌다. (동아일보 기자, 263-264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31-134쪽 ;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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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부정선거 원흉들의 집 파괴]
      대통령 사퇴 성명이 나온 후인 오전 11시 40분 경, 3대의 트럭을 타고 온 시위대는 “살인선거의 원흉 최인규를 죽여라!”고 부르짖으며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 있는 2층 벽돌 양옥집인 최인규 집에 불을 지르고, 가구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한국일보는 최인규의 집 주소를 중구 충현동 427-6으로 적고 있다. 당시 최인규와 그 가족은 이미 몸을 피하고 없었는데, 한국일보는 이에 대해“동래 모 처에 연금된 것으로 전한다”고 하였고『( 한국일보』1960. 4. 27 조3면), 부산일보는 이들이 홍콩 또는 부산에 잠복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보도하였다『( 부산일보』1960. 4. 27).)

      이 외에도 26일 새벽 4시 45분, 시위대의 방화로 말미암아 불붙기 시작한 시내 종로구 연지동의 이정재의 집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전소해 버렸다. 또한 같은 날 오후 2시와 4시 사이 수 십 명의 군중들은 후암동의 임철호 국회부의장 집을 습격, 닥치는 대로 가재도구를 파괴하였다. 시위대는 남산동 소재 장경근의 집도 습격하여 가옥과 가재도구를 파괴하였으나 방화는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한국일보』1960. 4. 27 조3면 ;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한국일보는 짤막한 기사로“원효로 한희석씨 집을 습격 파괴하였다”고 보도하였다『(한국일보』1960 4. 27 조3면). 그러나 동아일보는 흥분한 시위대들이 청파동에 있는 한희석의 집에 몰려갔으나 이미 보름 전에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리고 이 모씨가 새로 이사를 온 것으로 밝혀져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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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시위대, 맥아더장군 동상에 화환]
      흥분한 군중들로 뒤덮인 미국대사관과 반도호텔 창구에선 외국인들이 군중들의 궐기를 찬양해 주는 태도로 연상 박수를 치며 응원하였다. 시위대 역시 외국인 기자들을 환영을 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석3면)

      양유찬 주미대사가 시위대원들이 파괴했다고 공언한 반공회관 앞 맥아더 장군 동상에는 26일 오후 시위대들이 화환을 걸어주었다. 그 회관에는 “공산침략의 격퇴자 맥아더 장군”이란 글이 붙어있고, 그 화환은 맥아더 장군이 앞에 들고 있는 망원경 뒤에 걸려있었다. 시위대는 4·19 시위 당시 반공회관을 불살랐으나 그 옆에 있는 동상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조선일보』1960. 4. 27 조3면 ; 동아일보 기자,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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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학생들, 질서회복 위한 시위 전개]
      아침 10시 30분 경, 한양대학교에서는 시내 27개 학생대표들이 모여 이날 안으로 총궐기하여 결정적인 시위를 감행할 방안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시 30분 쯤 대통령의 사퇴 성명이 선포되었다는 소식과 시내의 혼란상황을 전해 듣고는 질서유지 시위를 하기로 계획을 전환하였다. 학생들은 곧 거리로 나와 마이크를 들고 시민들에게 질서를 호소하는 한편, 과격한 시위대원들이 타고 폭주하는 차량을 회수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경무대 앞에 주저앉은 시위대를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해산시켰다. (조화영 편, 169쪽)

      종로4가 시위군중 속에 끼어있던 대학생 약 200명도 급하게 혈서로 ‘수습’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스크럼을 짜 “질서를 유지하고 건설하자”고 외치며 정연한 시위를 시작하였는데, 점차 그 숫자가 늘기 시작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또한 이들은 소방차에 ‘대학생 소방대’라고 써 붙이고, 끄는 사람 없이 타고 있던 동대문경찰서의 불을 진화시켰다. 그런가 하면 경찰관들이 버리고 간 파출소에서 임시 질서유지반 집결소를 마련하고, 파괴와 방화, 약탈을 일삼는 일부 시위대의 난동을 막기 시작했다.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203-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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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학생 수습대’, 질서유지 호소 성명 발표]
      서울 시내 학생들이 주동되어 긴급 결성된 ‘학생수습대’라는 학생자치단체에서도 26일 오후 “열혈동지들은 총궐기하여 치안확보에 협력함으로써 공산오열(五列)을 물리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자”는 성명을 발표하고 혼란상태에 빠진 전국의 질서유지를 호소하였다. 이들은 또한 26일 밤 군과 협동하여 시내 변두리에서 시위대를 가장하여 폭력·절도 등 행패를 부리던 불량배 100여 명을 단속하여 관계당국에 인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3면)

      [학생 수습대 성명]

      우리 백만 학도는 부정 불의와 반민주를 타도하는데 맨주먹으로 선봉에 나서서 피로서 승리를 쟁취하였다. 그러나 이 혼란한 틈을 타서 공산 오열(五列) 등이 발호 아니한다 볼 수 없으며, 치안은 극도로 문란 되었음에 감안하여, 이를 수습함이 오로지 우리 대학생이 수행하여야 할 급선무이오니 열혈동지는 총궐기하여 치안확보에 협조함으로써 사회질서유지에 이바지하고자 성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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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4·19의거 학생대책위원회’, 피의 대가 실천 요구 성명 발표]
      26일 서울시내 26개 대학대표로 구성된 ‘4·19의거학생대책위원회’에서는 “조국강산에 뿌려진 젊은 피의 대가를 찾기 위하여 우리의 결의와 주장을 천명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우리의 주장과 외침은 어떠한 정당을 위함이 아니고 오로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살려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행정·입법·사법 등 3부에 대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1면 ‘4·19의거 학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대학교는 다음과 같다. 가톨릭의과대학, 건국대, 경기대, 경희대, 고려대, 국민대, 단국대, 국학대, 덕성여대, 동국대, 동양의학대, 서라벌예대, 서울농대, 서울대 문리대, 서울대 사대, 성균관대, 수도사대, 수도의대, 숙명여대, 숭실대, 연세대, 이화여대, 한국외국어대, 중앙대, 한양대, 홍익대)

      [4·19의거학생대책위의 3부에 대한 요구내용]

      행정부에 대하여
      ●3·15부정선거의 원흉인 한희석·최인규·임철호·장경근·이존화·전성천 등을 즉시 체포하여 엄중 처단할 것
      ●국제여론을 오도하는 양유찬과 유태하를 즉각 파면하라.

      입법부에 대하여
      ●반민주악법인 보안법·지자법(地自法)을 조속 개정할 것
      ●경찰 중립화를 법제화 할 것
      ●군정법령 제88호 등의 악법을 즉시 폐기할 것
      ●현 민의원 의원은 총사퇴할 것

      사법부에 대하여
      ●사법부는 그 독립을 자존하여 행정부에 아부하지 말 것
      ●부정선거의 관리자인 김두일 대법관은 즉시 사퇴하여 법의 심판을 받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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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4·26 희생자 각 병원에 수용]
      이 대통령의 사퇴성명으로 흥분했던 시민들은 가까스로 가라앉기 시작하고, 학생들이 거리마다 나서서 질서유지를 호소하고 있는 26일 오후, 시내 유수한 병원들은 4·26 희생자들을 치료하느라 매우 바쁜 상태였다. 각 병원마다 의사들 전원이 나서서 부상자들을 돌보았으며, 중앙의료원에서는 20여 명의 외국인 의사들이 현관 앞에 대기하여 환자들을 맞아들였다. 또한 각 의과대학생들도 전력을 다 해 환자운반, 응급처치 등을 도왔다. (『동아일보』1960. 4. 27 석3면)

      보건사회부는 25일과 26일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희생자는 19명이며, 부상자는 248명이라고 밝혔다. 부상자 중 현재 입원 치료 중인 환자는 238명이며, 이외에 50여 명이 경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1960. 4. 27 석3면)

      또한 전국 5개 도시의 희생자는 사망자가 164명, 부상자 1,781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희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화영 편, 120쪽)

      동아일보가 확인한 4·26 희생자 명단

      메디컬센터
      사망자 4명, 부상자 59명

      적십자병원
      사망자 : ●박창선(19세가량) 이상 1명
      부상자 : ●김세춘(남 24) ●김광일(남 19) ●단현배(남 21) ●최성님(남 21) ●윤추남(남 19) ●김준호(남 21) ●소순웅(남 19) ●김수완(남 20) ●조여종(남 21) ●김경임(남 20) ●유시정(남 28) ●이용호(남 70) ●윤영삼(남 18) ●최신환(남 21) ●이홍호(남 39) ●안경환(남 35) ●김창호(남 21) ●박점도(남 26) ●우지명(남 50) ●박문수(남 31) ●박준식(남) ●조규춘(남 27) ●정윤석(남 62) ●남상익(남 27) ●조만준(남) ●박은식(남 18) ●김상성(남 21) ●박광용(남 33) ●김동보(여 30) ●장준봉(남) ●김문식(남28) ●허종철(남 20) ●김종철(남 22) ●이대복(남 42) ●황수명(남 17) 이상 35명

      서울의대병원
      사망자 : ●이한수(남 21) 이상 1명
      부상자 : ●이우문(남 19) ●한준오(남 26) ●이운규(남 29) ●최길주(남 20) ●강종건(남 20) ●이치우(남 15) ●정호민(남 42) ●박수균(남 20) ●전승광(남 17) ●이사춘(여 46) ●김한석(남 23) ●강덕호(남 20) ●김대열(남 13) ●강황우(남 20) ●곽석훈(남 22) ●김진태(남 16) ●김길태(남 19) ●최한수(남 31) ●이창수(남 54) ●이석구(남 24) ●양기홍(남 54) ●김성식(남 8) ●이광석(남 23) ●김태준(남 20) ●김현철(남 20) ●장환오(남 16) ●방종전(남 20) ●오석보(남 21) ●박희숙(여 23) ●박찬화(남 18) ●한장호(남 19) ●곽상헌(남 22) ●성낙천(남 21) ●홍길걸(남 20) ●이무웅 ●박종순 ●이근수 ●홍진표 ●김진영 이상 39명

      수도의대병원
      사망자 : ●이광학(남 25) ●이강섭(남 27) ●김두호(남 27) ●손흥구(남 31) 미상 2명 이상 6명
      부상자 : ●배윤수(남 21) ●박한식(남 21) ●김윤균(남 45) ●김승하(남 17) ●황수영(남 17) ●권효순(여 11) ●배정술(남 21) ●송상섭(남 17) ●송장환(남 23) ●오영호(남 8) ●이천원(남 20) ●박수만(남 36) ●윤철호(남 17) ●김순자(여 17) ●김장호(남 21) 미상 8명 이상 24명

      세브란스병원
      사망자 : ●조건구(20) ●정덕산 ●임준택(24) ●김동진(18) ●김경휘(19) 이상 5명
      부상자 : ●박재문 ●정문모 ●김수웅 ●김명권 ●정병남 ●김경태 ●안창운 ●박용호 ●최승만 ●신정균 이상 10명

      이대 제2병원
      사망자 : ●장영옥(남 28) 이상 1명
      부상자 : ●이각희(남 29) ●김금대(남 20) ●정석철(남 21) ●이대섭(남 19) ●김훈택(남 17) ●임수길(남 24) 이상 6명

      백병원
      부상자 : ●정충식(남 20) ●홍수련(남 23) 이상 2명

      총 계 : 사망 18명, 부상 16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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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서울에서 원정시위]
      “민주반역자 이기붕을 때려죽이라”고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던 인천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전해 듣고 흩어졌다.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각 언론기관에서 내붙인 특보판에 모여들었다. 이날 경찰서에서는 직무를 철폐했으며, 각 관공서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집무하였다.

      오후 12시 55분 경, 서울에서 시위하던 학생 약 200명이 트럭 5대와 버스 2대, 택시 2대에 분승하여 인천시청에 몰려들었다. 학생대표로 알려진 서울대 문리대 학생 3명은 시장비서를 통해 인천의 시위상황을 들은 다음 인천은 평온하니 서울로 돌아가겠으니 점심을 달라고 요청하자 인천시장이 이를 승낙하여 직원들이 시위대원들을 부근 식당으로 인도했다. 점심을 먹고 난 시위대는 자신들이 몰고 온 경찰 백차를 선두로 “우리는 승리했다”, “이기붕과 최인규 일당 선거 살인범을 잡아 죽이라”고 외치며 인천 시내를 돌아 수많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오후 4시 30분 경 서울로 떠났다.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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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성난 시위대의 무기고 침입에 경찰 발포]
      26일 오후 7시 반, 수 백 명에 달하는 군중의 시위는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점점 악화되었다. 시위대는 시내 수 개 처의 관공서 및 4개 파출소를 대파하였으며, 계속해서 파출소의 비품과 서류를 소각한 다음 인천서를 습격하여 건물을 대파하였다. 시위대가 마침내 무기고에 침입하자 무저항으로 나가던 경찰은 오후 10시 10분 수 십 발을 발포하였고, 잠시 후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3면)

      『동아일보』가 확인한 4·26 인천 시위 희생자

      시위 측 사망자
      ●김영호(28) ●송공 ●이연하(18, 인천) 이상 3명

      경찰 측 부상자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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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90대 노인 선두로 경로회원들도 시위]
      26일 오전 9시 경, 초량동에서는 94세와 87세 된 노인을 선두로 한 경로회원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삽시간에 학생, 부녀자, 시민들이 이들의 시위에 호응하였고,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이들 시위대 앞에서 함성을 지르며 내달았다. 온 시내의 교통은 차단되고, 시내는 온통 시위의 도가니로 휩쓸려 들어 갔다. “이승만 대통령 물러 가라”,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자”, “살인 고문 경찰관을 체포 하라”고 외치며 전진한 노인 시위대는 염주동 파출소 앞에 이르러 “살인경찰 엄벌하라”고 외쳤다. 시위대가 서서히 중앙극장을 지나 중부산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는 뒤따르는 시민들의 수가 이미 수 십만을 헤아렸다. 역 앞에는 무장한 군인 50여 명이 4대의 탱크와 4대의 장갑차 앞에 2열로 서서 경비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외면하였고, 헌병들은 차량통행을 막았다. 군중들은 그들을 향하여 구호를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국제신보』1960. 4. 26 석3면, 1960. 4. 27 석3면 ; 조화영 편, 226-227쪽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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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사퇴 성명 접한 시민들, 환호성 지르며 이승만·이기붕 초상화 파기]
      오전 10시 30분 경,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 성명을 알리는 신문사의 보도 스피커 소리를 들은 시민들은 마치 해방을 맞은 듯한 기분에 수 만 군중이 모여 곳곳에서 환호성을 올렸다. 영도 앞과 서대신동에서 내려오던 시위대원들은 시청 앞에서 합류하여 우남공원 쪽으로 향하였다. 또 10시 40분 경 국제시장 근처에 모인 약 800여 명의 부녀자들이 우남공원 쪽으로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광복동에 있는 자유당 청사 내에 뛰어들어 커다란 자유당 간판을 내동댕이치는가 하면 당사를 완전 점령하였다. 이어 군중들은 당사 한복판에 걸어둔 이 대통령과 이기붕의 사진 및 초상화 등을 모조리 찢어버렸다. (『국제신보』1960. 4. 27 조3면, 석3면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조선일보는 부산시위 참가자 수를 5만명으로 추산하였다. 또한 이기붕의 초상화를 찢은 것이 아니라 떼어내 피칠을 한 다음 시위군중이 높이 들고 다녔다고 한다『( 조선일보』1960. 4. 26 석3면).)

      같은 시각, 도청 앞에서는 70-80명의 청소년들이 주류가 된 시위대가 인근 주민들과 학생들의 호응으로 삽시간에 도청 앞 도로를 메웠다. 이들은 도청 철문을 뛰어넘고 현관으로 들이닥쳐 돌팔매로 문짝들을 박살냈다. 군대는 증원부대까지 동원되어 겨우 청사 안에 난입한 군중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오전 11시 경 부산시청 앞에 모인 군중들도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출동한 탱크에 뛰어오른 학생들이 이 대통령이 사퇴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말을 전파하자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만세를 불렀다. 민주당 경남도당에서는 태극기를 달고 “이 대통령은 물러갔다”는 벽보를 써 붙였으며, 각 신문사에서 뿌리는 호외에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동아일보』1960. 4. 27 석3·4면 ;『국제신보』1960. 4. 27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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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흥분한 시위대, 마산까지 원정]
      오후 1시 경 소년 시위대는 몽둥이와 사이다 병으로 영도경찰서 유리창을 박살냈다. 부녀자들까지 가세된 군중들은 자유당 민의원 이영언의 집으로 몰려가 집을 산산이 부수었다. 그리고는 방향을 바꾸어 자유당 영도 갑·을구 당사무소, 영도구청, 소방서, 반공청년단, 염선1·2동 사무소 등을 몽둥이로 산산이 부수었다. (조화영 편, 229-230쪽)

      이 무렵 부산 지방법원 마당에 꽉 차게 모인 군중들은 검사장을 불러 마산사건의 용의자 전원을 석방하라고 기세를 올렸다.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기세에 견디다 못해 양 검사장은 용의자 8명을 전원 석방하였다. 이들이 형무소로부터 군중들 앞에 나타났을 때 군중들은 환호와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이들을 맞았다. 경남고교 학생 100여 명은 2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원정시위를 하러 마산으로 향하였다. (『국제신보』1960. 4. 27 석3면 ; 조화영 편, 230-231쪽)

      오후 3시 경, 중부산경찰서 청사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경관들은 모두 피신해 버렸고, 수감되어 있던 각종 피의자들은 빽빽한 군중들 틈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 경찰서의 간판은 떨어지고 서류는 눈처럼 창문 밖으로 던져졌다. 오후 5시 경, 시내 시위군중은 무방비상태에 놓인 부산 시내를 이리저리 몰리면서 외치고 또 외쳐 시내를 완전히 뒤덮었다. 교통망은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치안도 완전히 마비되었다. 오후 6시 10분 경부터 군당국은 시위대를 적극적으로 해산시킬 태세로 나섰다. 장갑차를 위시한 완전무장한 수많은 병력을 경남도청 주변에 배치하고 군중해산에 임하고 있으나 군중들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날 시위군중들은 경찰백차를 몰고 사이렌을 울리며 시위했으며, 택시 및 버스, 트럭 등에도 분승해 시가를 오고갔다. (『부산일보』1960. 4. 27 조3면)

      청년들은 경찰서 2층 창문에 비치된 확성기를 통해 “시민 여러분, 질서를 유지합시다”, “우리의 재산을 아끼자”고 소리쳤다. (조화영 편, 229쪽)

      부산거리는 오후 8시 반 경부터 평온한 거리로 회복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밤 10시 현재 계엄부산사무소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는 시위대와 통행금지 위반자 약 300여 명을 시내 6개 경찰서에 연행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이날 부산시내 각 관공서의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4월 26일 부산 각 관공서 파괴현황
      ●부산진 및 영도 경찰서 내부 완전파괴. 관내 지서 파출소 완전파괴
      ●동부산 경찰서 관내 대연동 파출소 외 4개 파출소 파괴
      ●배시장 사택 완전 전소
      ●이영언 자유당 의원 집 완전파괴
      ●자유당도당사무소
      ●서울신문사 부산지사
      ●도청 일부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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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 [경찰 실탄발사로 2명 사망]
      김천의 시위대는 26일 밤 9시 경 시내 4개 파출소와 세무서, 남전, 시의회의장 장용수의 집 및 경찰서 등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밤 10시 15분 경 경찰서 앞으로 몰려온 시위대에게 경관이 실탄사격을 하여 이연하(18)와 모암동에 거주하는 김영호(25)가 절명하였다. 또한 남전 이원범과 용두동에 사는 김선오는 부상을 입고 경찰관 6명도 시위대들이 던진 돌에 맞아 경상을 입었다. (『조선일보』1960. 4. 28 조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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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부산으로부터의 원정시위로 감격과 불안의 쌍곡선]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소식을 듣고 기쁜 표정을 짓고 있던 마산은 멀리 부산에서 2천여 명의 시위대들이 들이닥쳐 혼란 가운데 무방비사태에 빠지게 되었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들이 대부분“주먹을 쓰는 깡패, 건달, 양아치, 구두닦이, 행상인이 태반이었으며, 이밖에도 홍등가의 여인, 품팔이, 노동자도 더러 끼어있었다”고 한다(3·15의거 기념사업회, 『3·15의거사』, 2004, 425쪽).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원정시위대의 수를 1천 명으로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26일 부산일대를 휩쓸던 이들은 오후 3시 경 트럭, 버스, 택시, 지프차 등 50여대의 차량을 몰고 마산으로 향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들이 타고 온 차량의 수를 23대로, 이들이 마산에 도착한 시각을 오후 6시 경으로 기록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이들 중 일부 200명은 27일 아주 이른 새벽인 0시 30분 경, 트럭 3대에 분승하고 근처의 가야로 몰려갔다. 이들은 가야에 약 1시간 반 정도 머물면서 함안경찰서와 가야지서, 자유당 사무소 등을 파괴하고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다. (『조선일보』1960. 4. 28 조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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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학생시위대, 도지사와 경찰국장의 책임 문책]
      26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성명 방송이 있자 시민들은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노년층에서는 이승만이가엾게 되었다고 동정을 표하기도 하였으나 젊은 층에서는 이번 기회에 지금까지의 나쁜 요소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건설에 대한 새로운 결의를 표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대전에 소재지가 있는 충남대학교를 비롯하여 시내 남녀중·고교 운영위원장들은 연석회의를 갖고 시위를 결의하였다. 오후 4시 경, 대전의 학생 약 5천 명은 한밭중학교 교정에 모여 결의문과 구호를 낭독하였다.

      오후4시20분경, ‘민권의 승리’를 구가하는 충남대학교 학생 2천여 명을 선두로 각 학교 학생들은 학교별로 대열을 지어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연도를 헤치며 역전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목척교를 지나 시청 쪽으로 나아가면서 채택된 결의문과 구호를 절규하였다.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만세소리와 박수소리는 우레와 같았으며, 시민들의 합류로 시위대의 수는 계속 늘어만 갔다.

      대전지구 계엄사무소 당국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헌병과 경찰로 혼성된 무장경비 병력을 급파하여 시위대의 양편을 경비하면서 같이 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은 시청 앞 로터리에서 대흥동과 대전고등학교 앞을 지나 오후 5시 10분 경 도청 앞 광장으로 밀려들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①김학응 지사와 전장환 경찰국장, 정인권 시장은 즉각 사퇴하라, ②정부가 임명한 각 기관장들도 사퇴하라, ③유성온천에 와 있다는 이기붕을 충남에서 축출하라, ④계엄령을 즉시 해제하라, ⑤학교를 즉시 개교케하라 는 등의 결의를 하였다. 그리고는 지사의 답변을 듣기 위해 각 학교에서 학생대표 1명씩을 선출하여 대표단을 구성한 다음 이들을 지사실로 파견하고 남은 학생들은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조금 후 김 지사와 전 경찰국장은 지사실 베란다에 나타나 확성기를 통하여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사퇴할 것을 천명하고, ②④⑤항은 우리들의 소관사무가 아닌 것이며, ③항은 사실무근한 일이다”고 해명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시청광장으로 몰려와 정 시장으로 부터 “3·15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대전일보』1960. 4. 27 2면 ; 오천균, 「너무나 길었던 그 해 4월」,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대전충남 4·19혁명동지회, 『3·8민주의거』, 2005, 143-144쪽 ; 조화영 편, 286-289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4-155쪽 ;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대전 학생들의 4·26 결의문과 구호]

      1. 자유당과 같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2. 민주주의 기반 닦아 자주독립 이룩하자.
      3. 쓰러진 국민주권 정의로서 일으키자.
      4. 한희석을 처단하고 최인규를 체포하라.
      5. 발포자와 그 명령자를 처단하라.

      [구호]

      1. 현(現) 국회의원도 모두 사퇴하라.
      2. 학원에 자유를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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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일부 시위대, 이기붕 찾으러 유성온천까지]
      이때 일부의 시위대는 이기붕을 찾기 위해 대전에서 30리나 떨어진 유성온천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가는 도중 만나는 차량을 닥치는 대로 잡아타고 오후 7시경, 유성온천에 도착, 유성호텔과 만년장을 샅샅이 뒤졌으나 이기붕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뒤따라 온 시위대와 합류하여 호텔 앞 광장에서 “이기붕은 충남에서 추방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를 부르며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다. (『대전일보』1960. 4. 27 3면 ; 조화영 편, 289-290쪽 ; 오천균, 143-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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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학생선무(宣撫)공작대, 과격한 시위대에 질서유지 호소]
      오후 5시 30분 경, 시내에 남은 시위대는 질서를 잃고 정동 소재의 자유당 충남도당 당사를 습격하고 유리창과 기물 등을 파괴하는 한편, 비장되어있던 서류를 꺼내 거리에 살포하였다. 오후 8시 경에는 유성에서 온 시위대와 합류하여 구호와 통일행진곡을 부르며 시내를 휩쓸다가 시내 각 경찰서와 파출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자유당 시당 을구당 위원장인 최석환의 집을 습격하고 불살라 버렸다. 이들은 밤 10시경 대전경찰서와 서대전경찰서를 습격하고, 인동, 문창동, 신안동 등 각 파출소의 기물을 전부 파괴하였다.

      사태가 이처럼 험악해지자 학생 선무공작대가 등장하여 “우리 학생들은 이성을 잃지 말자! 이제는 다 각기 집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여 대부분의 학생들은 해산하였다. (『대전일보』1960. 4. 27 1면)

      그러나 도리어 곤봉과 투석으로 대항하자 위협공포를 발사하고 연행함으로써 27일 새벽이 되어서야 종료되었다. (『대전일보』1960. 4. 27 3면 ; 조화영 편,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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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대구의 교수들도 시위]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 성명이 있은 26일 오후 1시부터 경북대학교 교수단과 학생 200여 명은 “국민은 원한다. 이 대통령의 하야를…”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역전 광장에 모여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시위대는오후1시40분경역전에도착, “ 이승만정부는집권 12년에 갖은 민주반역 행위를 자행하여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등의 누적된 실정이 도를 가하더니 3·15부정선거를 하여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도살하였다. 4·19의거, 마산사건 등에 뿌린 3·1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학도들의 의혈을 좌시할 수 없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구호를 외친 다음 곧 질서정연한 시위에 들어갔다. 헌병들의 경호 아래 시위행진이 지나갈 때마다 연도에 늘어선 수 만 시민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불렀다. 경북대 교수들이 남문시장에 도달했을 때 약 50명의 대구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이 이에 합류하여 삽시간에 10여 만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몇 갈래로 나뉘어 거리를 휩쓸었다. (『경북대학보』1960. 4. 27 1면. 동아일보는“교수단의 시위에 합류한 군중은 약 3만 명에 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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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도지사와 시장이 시위대에 사과]
      이날 오후 2시 반부터 청구대학 교수단에서도 이와는 별도로 이승만 대통령 사퇴지지 시위를 시작하고 시가를 행진하였다. (『청구춘추』1960. 5. 5 1면)

      이어 시장을 앞세우고 도청 광장에 도착한 시위대는 “오 지사 나오라”고 외치고, 서무과장실에 피신 중인 오임근 지사를 포착하여 학생들 앞에 내세웠다. 오 지사는 학생들에게 “대통령 하야 성명 후 지사직 사퇴를 중앙에 전화로 상신했으며, 부정선거 등 모든 책임을 지고 전 도민에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하였다. 학생대표는 “부정선거를 사과한다는 뜻에서 오 지사와 이 시장은 학도들과 같이 시위를 하겠느냐”고 외치면서 오 지사를 앞장세워 경찰국으로 향하였다. 오후 5시 경 경북경찰국에 갔으나 손계천 국장은 없었고, 오 지사는 경찰국장실에서 사과문을 써서 낭독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들은 영남일보사, 대구일보사, 연합신문, 대한부인회 경북도분회, 반공청년단 대구 을구 사무소 등의 유리창을 부수고 경북 경찰국장 집에 투석했다. 그리고 자유당 도당부를 습격해서 모든 비품을 밖에 끌어내고 불태웠다. 또한 취재 중이던 대구일보사 지프차도 시위대에 의해 전부 파괴되었다. 시위대는 또한 달성동파출소, 남산동파출소, 동산동파출소, 삼덕동파출소, 대신동파출소 및 덕산동파출소의 기물 등을 모조리 파괴하고 내외방직에 방화하였으며, 영남일보사장 이순희 집의 가재도구도 끌어내 방화했다. 그리고 신도환 의원 집 가재도구도 끌어내 방화했으며, 시장 집 가구도 길가에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시청, 도지사관사의 유리창 등도 파괴한 후 10시반 경해상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부산 시내의 관사, 파출소, 여당계 기관 등 12개 처가 파괴되었다. (조화영 편, 248-250쪽 ;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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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이승만 대통령 사퇴 성명 촉진 시위]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를 요망하는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이 대통령은 정부의 모든 죄과를 총책임지고 즉각 물러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오전 9시 45분 인천고등학교 학생 약 500명이 시위에 들어갔다. 4·19시위의 참 목적이 관철되지 않고 이 대통령은 애매한 담화만을 발표한 것에 분개한 학생들은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고 외쳤다. “이기붕을 잡아 죽여라”,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즉각 사퇴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시위대는 오전 10시 45분 시청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인천시장의 면담을 요청하자 그는 학생들 앞에서 “선거 이후 내가 인천시민에게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선거에 있어서 잘못된 것도 나 자신이 잘 아는 바이며, 이에 시정을 위해 많은 피를 흘린 것도 잘 안다. 이번 나의 생각도 여러분과 같다”는 요지의 말이 있자 학생대표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기호일보』1960. 4. 26 1면)

      결의문 낭독에 뒤이어 “우리 대한민국은 귀하께서 가장 염려해주신 민주주의 실천을 위하여 세계 어느 겨레보다도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우리 민족이 거족적인 운동을 전개한 것은 오직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전진이 있음을 깊이 명심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학생일동의 이름으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어서 시위대는 “최인규·한희석을 잡아죽여라”고 다시 외쳤다. (『기호일보』1960. 4. 26 1면)

      [인천 학생의 결의문]

      첫째, 이승만 정부는 집권 12년간의 학정을 청산하고 물러나라.

      둘째, 우리 학도는 신성한 학원의 자유를 사수할 것을 결의한다

      셋째, 우리 학도는 민국의 발전수립을 위해 피 흘린 선배들의 뒤를 지킬 것을 이에 엄숙히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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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 [서울서 도착한 4·19 희생자 유해 안고 시위]
      4월 26일 오전 10시, 고등학생 500여 명이 목포 달성국민학교에 집결하였다가 목포 경찰서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학원에 간섭 하지말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등을 주장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대열은 경찰 기동대 소속 백차의 선도에 따라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계속 “민주주의 만세!”를 외쳐댔다. 시위대 일부는 민주당사에 들어가 조병옥의 사진을 가지고 나와 이를 시위대 앞에 세웠다.

      오후 1시 20분 호남선 열차로 김부련(19, 전남 무안군 흑산면 가거도 출신, 서울 서라벌예고 재학 중 서울에서 경찰의 발포에 의해 사망)의 시체가 도착하자 시민들은 목포역에 운집했다. 1천여 명의 학생들은 김부련의 유해를 안고 “이승만 물러가라”, “4·19를 상기한다”는 구호와 전우가를 부르면서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때 역 구내 광장 등 골목골목에서 약 3만여 명의 군중이 삽시간에 모여 시위대와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전 목포 시내를 돌아다니며 목포경찰서, 자유당 목포시당, 역전파출소, 자유당 목포시당 위원장 유정두의 집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목포경찰서 습격 때에는 목포경찰서장 최중옥과 면담해 “경찰은 모든 간섭과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았고, 경찰은 시위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호남4·19 30년사』, 삼화문화사, 1995, 187-188쪽 ;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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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안 [학생 시위대, 부정선거 원흉 처벌 요구]
      계엄지구가 아닌 천안에서는 26일 오후 4시, 천안역 광장에 모인 천안농업고등학교 와 천안여자고등학교 학생 약 300명은 “3·15부정선거의 원흉들을 사표수리로 일단락 짓는 것은 부당하다”고 외치며 평화적 시위를 감행했다. 시민들은 이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으며 현지경찰은 무저항으로 방관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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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 [학생 시위대,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실천하라”요구]
      26일 오후 1시 30분 경, 동지중·고등학교 학생 100여 명은 “전국 학도의 휴교를 곧 폐지하라”등을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이 대통령은 담화를 실천하라”, “ 경찰은 중립을 유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를 일주하였다.

      2시에는 시내 중심지인 한일은행 앞 광장에 삽시간에 모여든 수 천의 군중들 앞에서 또다시 결의문 낭독과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만세를 부르고 별 사고 없이 해산하였다. 한편 이날 시내 신흥동 소재 경북여객 2층에 있는 자유당 시당부의 간판을 한 간부가 스스로 떼어버렸다. (조화영 편, 250쪽 ;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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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 [시위대, 군수·서장에게 “선거 간섭 않겠다 답변하라”요구]
      26일 아침 정각 8시에 울산 신(新)시장에서 출발한 울산농업고등학교 학생 약 150여 명이 합세하여 “동포여 일어서라”, “협잡선거 물리치라”,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지어 시내를 행진하였는데, 뒤따르는 군중 3천여 명도 학생들과 같이 시내를 행진하였다. 군청과 경찰서 앞에 이른 시위대원들은 “앞으로 공무원이 선거에 간섭할 것인가? 군수·서장은 답변하라”면서 강력한 답변을 요구하여 군수와 서장으로부터 “앞으로 선거에는 공무원이 간섭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영주여자고등학교와 영주군민, 학생들이 합세하여 시내를 행진하면서 자유당 반공청년단과 서울신문 울산지국 등의 간판을 떼어버리고 정오 경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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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학생·시민시위대 시가행진]
      공주고등학교 학생들은 1교시를 마치고 3학년을 선두로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 “3·15부정선거 원흉 처단하라”, “김주열 열사 만세”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들은 공주고→중동 사거리→시장 사거리→시장관통→제세당 다리→공주극장 옆길→공주경찰서 앞에서 구호를 제창하였다.

      한편 백사장에 모인 시위대의 선두는 “학원자유 보장하라”, “ 사법부는 부정선거를 법적 처단하라”, “ 데모는 자유다”, “ 경찰은 간섭마라”, “ 피 흘려 싸운 형제 성의로써 구호하자”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뚝방길과 시장을 통과하여 공주경찰서 앞에서 공주고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시가지에 나온 시민들의 호응은 대단했고, 일부 시민들은 행진에 동참하여 경찰서 앞에 모였을 때는 700명 정도 되었다. 이들은 경찰서장의 사과성 발언을 듣고 오후 1시 경 해산하였다. (전인석,「백제의 고도 공주의 4·19 함성」,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대전·충남 4·19혁명 동지회, 『3·8민주의거』,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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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묵호 [민주당원들 평화적 시위진행]
      26일 오전 11시부터 12시 반까지 묵호읍 민주당원 20여 명이 “3·15부정선거 무효”, “재선거 실시”의 구호 아래 전 읍민의 환영을 받으며 평화적 시위를 끝냈다.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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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묵호 [학생들 야간시위 행진]
      26일 밤 8시 30분 경 묵호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주동으로 시작된 시위에 삼척고등학교와 부평고등학교 및 강릉상업고등학교 학생 일부가 가담하여 약 100명의 학생들이 야간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공산주의 타도하고 민주주의 사수하자”, “죽은학생 애도하고 모금운동 하자”는 등 구호를 외치면서 약 1시간 동안 질서정연하게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조선일보』1960. 4. 28 조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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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쓴 관 메고 시내 행진]
      26일 오전, 진주시내에서는 다시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25일의 시위에 이어 26일 아침 9시부터 진주사범학교 학생, 진주여자중·고등학교 학생, 재경 진주유학생 등 2천여 명이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쓴 관을 멘 4명의 학생을 선두로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들은 “국회는 해산하라”, “ 민주역적 최인규를 처단하라”, “자유당과 민주당은 정권획득에 학생을 이용치 말라”는 등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쳤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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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 [민주당원10여명, “우리의 자유는 왔다”목메어외쳐]
      26일 오후 2시부터 밀양의 민주당 당원 10여 명은 “살인경관 잡아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민주주의 살았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 이들은 북성가에서 중앙로를 거쳐시장통을 지나 경찰서 앞까지 이르러 “우리의 자유는 왔다”고 목메어 소리를 외쳤다. 이들에게 호응하는 군중 수 백 명이 동참하였는데, 한 시간 후에 평온하게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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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 [3·15불법선거 규탄시위대, 관계자 주택 파괴]
      26일 오전 9시, 시내 각 중·고등학교 남녀학생 2천여 명과 군중 2천여 명이 합세하여 3·15불법선거 규탄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들 시위대는 시내를 행진하는 도중 자유당의 김철안, 문종두 두 의원 집을 습격, 창문과 가구를 대파하고, 경찰서장 관사 일부도 파괴하고, 서장의 사과를 요구였다.

      또한 시내 3개 경찰서 관내 파출소가 전파 또는 반파되었고, 민의원 신도환의 집과 내외방직 이순희 사장 집 외 여러 자유당계 의원들의 집과 공장들이 대파되었으며, 가재도구들도 많이 불살라졌다. (조화영 편, 250-251쪽 ;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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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수 [민주당원들, “3·15선거 희생자 살해 공범 잡으라”시위]
      26일 정오 경, 민주당 여수시당 당원 60여 명이 “이승만 정권물러가라”, “김용호 동지 살해 공범을 잡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내를 행진하며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책임지고 즉시 물러나라”, “ 고 김용호(金容鎬) 동지의 살인 공범자와 사주자를 즉시 체포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여수시 중앙로터리에서 민주당 여수시당 부위원장의 만세 삼창으로 해산하였다. 이날 약 3천 명의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박수갈채를 보냈는데, 경찰은 방관상태에 있었다. (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88쪽 ;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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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 [서울서 시위대 원정]
      26일 오후 5시 경, 서울로부터 10여 대의 트럭, 버스 등에 분승해 내려온 700-800명의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등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수원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로 인해 삽시간에 수원시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 대대적인 시위가 결행되었다. 시위대는 시내 팔달로3가 자유당 시당부, 그리고 경찰서 소방서에 투석하여 동 건물의 유리창을 파손하였고, 역전 중동파출소는 대파되었다. 경찰은 모두 피신하였으며, 전 시민들은 가두에 나와 시위대에 성원을 보냈다. (『동아일보』1960. 4. 27 석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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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이제야 해방 되었다”시민들 환호]
      26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담화소식을 들은 광주시민들은 “이제야 해방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학생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번 찬양하였다. 각 신문, 통신사 벽보에 운집한 시민들은 이기붕과 최인규를 노골적으로 욕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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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 [대규모 학생시위 밤까지 이어져]
      순천시 중앙로에서 집결을 시작한 시위대는 오전 11시 경 대오를 갖추었다. 시위대는 중앙로를 오르내리며 구호를 외쳤는데, 일부는 경찰서 앞에서 연좌농성을 했고, 일부는 자유당원 집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시민들이 참여한 시위대는 1,500명 정도였는데, 밤에는 학생들이 마련한 횃불을 들고 행진하며 “민주주의 만세!”를 외쳐댔다. 경찰은 별다를 저지를 하지 않았다.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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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실 [민주당원 30여 명 시위]
      26일 오전 11시 경, 민주당 임실군 당 중진 30여 명이 시위를 하였다. “3·15선거 무효”, “의거학생 즉시 석방”, “독재물리쳐라”등 플래카드를 들고 구(舊)시장에서 신(新)시장으로 향하는 도중 동(東)중학교 정문에 이르러서는 일반인들도 다수 참석하였고 박수도보냈다. 경찰의 수수방관하는 태도에 시위는 무사히 오후 1시에 끝났다. (고광준, 「4월의 전북 학생데모사건을 증언한다 - 취재기자가 훑어본 밑바닥」, 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76쪽 ;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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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천 [학생시위에 시민도 합세]
      26일 오전 9시 경, 이곳 제천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은 “부정 선거 다시 하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고문 경찰관 처벌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였다. 이들은 시민과 합세하여 약 500여 명이 자유당 당부 앞을 지나 경찰서, 교육구청을 지나 오전 11시경 해산하였다. (『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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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정부 [서울서 시위대 원정]
      26일 오전 8시 30분 경, 서울에서 트럭과 시발택시 7대에학생 50여 명이 각각 분승하여 의정부에 와서 시위를 감행하였는데, 시민 약 2만여 명이 이들과 합세하여 기세를 올렸다.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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