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하야 성명
10시 20분경 계엄사의 선무용 스피커가 이승만의 사임을 알렸고, 10시 30분, 조금 전부터 중대 발표를 예고하던 라디오에서는 이승만의 성명을 발표했다.
새로 외무장관이 된 허정과 김정열 국방장관은 이승만과 하야문제를 숙의했다.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는 송요찬이 요구하는 학생면담을 이승만이 받아들이고 정부통령 재선거문제와 함께 이승만의 장래 역할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고했다. 이승만은 “그럼 내가 물러나지”라고 뜻을 밝혔다.
10시 20분경 계엄사의 선무용 스피커가 이승만의 사임을 알렸고, 10시 30분, 조금 전부터 중대 발표를 예고하던 라디오에서는 이승만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성명서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 3 ․ 15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합의를 한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1960년 4월 26일
대통령 리승만
이승만의 하야성명에 세종로 인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날 도심에 모여든 군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뛸듯이 기뻐했고, 환호성을 올렸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군중대회가 열렸고, 시위대가 탄 차량들은 연도의 시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렇지만 인명의 희생도 계속되었다. 11시 15분경 18일에 고려대 학생들을 습격했던 깡패들이 유치되어 있는 동대문경찰서에 군중들이 몰려들자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해 4명이 즉사하고 30여명이 부상당했다.
‘승리의 화요일’인 26일 부산 인천 대구 김천 대전 목포 포항 여수 임실 밀양 안동 상주 경주 울산 제천 묵호(지금의 동해) 원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부산에서도 수십만 인파가 부산시청 경남도청 일대를 가득 메웠다. 도청 자유당사무실 반공청년단건물 부산시장 배상갑집 등이 파손되었다.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부상자 중에서 후일 사망한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1960년 3,4월 항쟁 전 기간을 통해서 보면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만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 시기 항쟁은 주로 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하층노동자와 무직자들의 참여와 희생도 두드러졌다. 이들은 거의 도시빈민층인 실업자, 피구호 및 제3차 산업의 불완전한 취업자 등으로 일정한 계층으로서의 유대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존 그 자체의 극한적 상황과 존재의 부동성 등으로 인해 4월혁명 전 과정에서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했다(정기영, 1990, 127쪽).
2시부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2시간에 걸쳐 격론이 오고간 끝에 이승만의 즉시 하야 등 4개항으로 되어 있는 시국수습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① 이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 ② 3・15 정부통령 선거는 이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③ 과도내각 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④ 개헌안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즉시 실시한다”로 되어 있다. 이로써 이승만의 사임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27일 사임하는 것에 다시금 주저하였으나 허정 등의 만류로 굴복해 “나 이승만은 국회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이로써 제1공화국은 11년 8개월만에 막을 내렸다.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