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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시위

1960년 4월 19일 오전 8시 50분, 동숭동 대학가의 서울대 문리대 게시판에 격문이 나붙었다. 교정에 있던 학생들이 격문에 시선을 쏟고 있을 때 종로 5가 쪽에서 신설동의 대광고생 1천여 명이 함성을 지르며 동숭동 쪽으로 몰려왔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 시위대를 무차별 공격하고 있는 경찰

4월 19일 1면 머리기사로 고려대생 데모의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고, 깡패들의 데모대 습격 전말이 사회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미 여러 날 전부터 학교별로 은밀히 데모를 준비해 온 서울대, 연세대, 건국대 등 10여 개 대학생들은 물론, 데모 계획이 아직 없었던 학교의 학생들마저 깡패의 습격 보도를 접하고 분노하였다. 그리하여 19일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일제히 데모에 나섰다.

1960년 4월 19일 오전 8시 50분, 동숭동 대학가의 서울대 문리대 게시판에 격문이 나붙었다. 교정에 있던 학생들이 격문에 시선을 쏟고 있을 때 종로 5가 쪽에서 신설동의 대광고생 1천여 명이 함성을 지르며 동숭동 쪽으로 몰려왔다. 고등학생들의 함성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문리대생들은 마로니에 앞 광장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미리 준비된 선언문, 격문, 구호 등의 유인물이 배부되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薄土)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匡正)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宣明)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專制)로 민중 앞에 군림하는‘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설픈 것임을 교시(敎示)한다.

한국의 일천(日淺)한 대학사가 적색 전제(赤色專制)에의 과감한 투쟁에 거획(巨劃)을 장(掌)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간(基幹)은 자유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은 바야흐로 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단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 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慘屍)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威)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번을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학구(學究)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임을 자랑한 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死守派)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9시 20분경 법대, 미대, 약대, 수의대, 치대생과 나머지 문리대생까지 모두 3천여 명의 서울대 데모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태평로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오전 11시, 동국대생 2천여 명, 성균관대생 3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다. 이들이 세종로를 지나면서 “이승만 물러가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등 새로운 구호가 데모 대열 속에서 터져 나왔다. 당초 국회의사당 앞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려던 데모의 대열이 어느 새 경무대를 표적으로 하는 혁명의 대열로 바뀌었다.

오후 1시경 시내 대부분의 중․고교에서는 학생들이 집단으로 데모에 나설 것을 우려하여 오전 수업을 마치고는 서둘러 하교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강문고, 경기고, 경성전기공고 양정고 중앙고 흥국고 휘문고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교생이 데모에 뛰어들었다. 다른 고교생과 일부 중학생들도 떼를 지어 데모에 합류하였다. 이때쯤 서울 시내 데모 군중의 숫자는 10만 명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오후 1시 40분, 소방차를 앞세운 데모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 미터로 압축되었을 때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삽시간에 경무대 어귀는 수라장이 되고, 길에는 7,8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쫓기던 데모대 가운데 동성고 등 고등학생들은 교모의 가죽끈을 턱에 걸고는 경무대를 향해 다시 돌진하였다. 이처럼 경무대를 향한 죽음의 행렬은 오후 5시 경찰이 시내 일원에 걸쳐 소탕전을 개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위대 주력은 세종로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이미 데모대와 시민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있었다. 길가에서 박수를 보내는 정도로 소극적이었던 시민들은 희생자들을 보자 흥분하여 데모에 뛰어들었다. 어떤 여학생들은 물을 퍼날라 데모대원들의 목을 축이게 했고 부녀자들은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데모대에 갖다 주었다. 곳곳에서 총성이 요란한 가운데 20만 명으로 불어난 데모대는 도심 거리에 넘실거렸다.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시내를 빈틈 없이 가득 메운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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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이승만은 오후 3시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더욱 확산되고 격화되었다. 평화적 시위로 출발했던 항쟁은 경찰의 유혈적 탄압과 맞부딪히면서 급속히 혁명으로 전환되었다.

오후 5시, 정부는 서울 등 5개 도시의 경비계엄을 비상계엄으로 바꾸고, 통금시간 연장(오후 7시~익일 오전 5시) 등을 내용을 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오후 5시 경, 그동안 산발적으로 발포를 하던 경찰은 흩어진 병력을 경무대 앞에 집결시켰다. 뒤이어 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경찰관 3백여 명은 장갑차 2대를 앞세우고 일렬 횡대를 지어 중앙청 앞에서부터 일제 사격을 퍼부으며 데모대 소탕을 시작했다. 이날의 시위로 서울에서 사망한 사람은 부상자 사망을 포함해 21일까지의 집계에 따르면 104명(경찰 3명 포함)이었다.

밤 10시, 중랑교 앞에 집결해 있던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시내로 진주하였다. 계엄군은 서울 외곽에서부터 3개 코스로 진입하여 이튿날 새벽 무렵 데모를 진압하였다. 군대의 투입과 함께 대량 검거가 시작되었고, 20일 자정부터 시위는 차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4월 19일의 데모는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거의 전국에서 일어났다. 부산에서는 경남공고, 데레사여고 등의 학생들이 데모를 하였다. 이 학생들은 시민들과 합세하여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무장경찰이 사정없이 학생들을 구타해 부상자가 속출했다. 오후 5시경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방송이 나왔다.

광주에서는 19일 오전 10시 40분경 광주고생들이 “협잡선거 다시 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광주고생 데모에 호응해 광주여고생도 거리에 나왔다. 시민들은 물을 나르는 등 시위대를 성원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에도 시위는 계속되어 밤 8시 20분경 시위대는 1만명 정도가 되었다.

도청 광장을 떠나 시가행진을 하고 있는 경북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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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도 경북대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19일 경북대 각 단과대학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운동장에 집결하여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후 동교 로터리를 출발하여 데모에 돌입했다. 3,000여 명의 데모대원들은 최후의 목표인 도청 앞 광장으로 몰려가 결의문과 구호를 외치고, 6시 30분경 대한민국과 경북대학교 만세를 삼창한 후 해산하였다.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결의문

1. 마산사건으로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2. 부정선거 다시 하라
3. 합법적 데모에 간섭 말라

구호 一. 부정선거 다시 하자
一. 마산학생 사건 규명하라
一. 폭행경찰관 물러가라
一. 3인조·9인조 반대한다
一. 학생은 살아있다, 시민은 안심하라

전국적으로 4월 19일 이 날 쓰러진 피해자는 서울에서만 104명,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 등이었다. 역사는 이날을 ‘피의 화요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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