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고대생 피습사건
18일 12시 50분경 “인촌(김성수의 호)동상 앞으로”라는 소리와 함께 집결한 학생들 앞에서 선언문과 5개항을 낭독한 후 1시 20분경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나섰다.1, 2차에 걸친 마산시위는 지금까지 사태의 진전을 바라보고 있었던 전국 각지의 시민들과 대학생들의 궐기를 재촉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은 신입생 환영회를 빙자해 교내에서 집회를 열고 난 뒤 일제히 가두로 진출했다.
고려대학교 선언문
친애하는 고대생 제군!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對)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고대생 동지 제군!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 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
우리들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구호
一.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一.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一.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一.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一.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4293년(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일동
고려대학교 건의안
1. 마산학생 석방을 요구한다.
2. 학원의 자유보장을 요구한다.
3. 기성세대를 불신하며 각성을 촉구 한다.
우리는 이 건의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18일 12시 50분경 “인촌(김성수의 호)동상 앞으로”라는 소리와 함께 집결한 학생들 앞에서 선언문과 5개항을 낭독한 후 1시 20분경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나섰다.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려다 실패한 뒤 끼리끼리 빠져나와 1천여명이 국회의사당앞에 집결했다. 이곳에서 농성을 벌이며 학생들은 연행학생을 석방하고 대통령이나 내무장관이 나와 부정선거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유진오총장이 달려와 해산을 종용했다. 학생들은 유총장과 내무장관의 약속대로 6시경 연행학생들이 석방되고 고려대 출신인 이철승의원이 “싸움은 아직도 남아있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은 학교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자 오후 6시 40분경 귀교 길에 올랐다(사월혁명청사편찬회, 1960, 482쪽).
4 ․ 19날 학생 ․ 시민들을 더 많이 쏟아져 나오게 한 사건은 그 직후에 발생했다. 학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면서 을지로에서 종로 4가 쪽으로 빠지기 위해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쇠갈고리와 곡괭이 및 쇠사슬 등으로 무장한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고려대생들을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선두에 섰던 학생과 그들을 따르던 기자 등 50여 명이 다쳤다. 따라오던 학생들이 대항하려 하자 깡패들은 골목으로 달아났다. 불과 10분밖에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괴한들은 반공청년단(단장 신도환) 종로구단(단장 임화수) 특별단부 소속(정치깡패로 유명한 화랑동지회소속이기도 했다. 회장 유지광) 깡패였다. 이들은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와 연결되어 있었다.
규모가 큰 최초의 대학생 시위였던 4․18 고려대생 시위와 정치깡패들의 고려대생 습격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혁명의 방향을 선회시켰다. 우선 시위의 목적이 독재정권 규탄으로 발전되었으며, 시위의 주역이 지방의 고등학생이 아닌 서울의 대학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시민들과 학생들이 이튿날 일제히 궐기하도록 촉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