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3·15 마산의거

3․15선거는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이 국가 권력을 총 동원하여 기획한 유래 없는 폭력과 부정선거였다. 국가 권력이 직접 선거운동 기간 내내 야당을 탄압하고, 후보자 및 유권자에 대한 백주 대낮의 테러를 공공연하게 묵인했다.

민주당사 앞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마산 시민들

3․15선거는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이 국가 권력을 총 동원하여 기획한 유래 없는 폭력과 부정선거였다. 국가 권력이 직접 선거운동 기간 내내 야당을 탄압하고, 후보자 및 유권자에 대한 백주 대낮의 테러를 공공연하게 묵인했다.

한편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명선거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운명의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 날이 다가왔다. 이날 투표는 최인규가 기획한 대로, 전국적으로 대리투표, 사전투표, 3인조 투표가 저질러졌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유효투표수의 88.7%에 해당하는 9,663,376표를 얻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선거결과를 액면 그대로 믿는 국민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되었다. 국무위원들은 일부 지역의 개표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선거폭력과 부정 선거의 결과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 때 선거 사상 최초의 유혈사태가 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발생했다.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합세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다. 시위는 자연발생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3월 15일 하오 3시경 민주당 당사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민중들이 민주당 경남도의원 정남규를 선두로 “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시위를 하다 마산시 남성동파출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이때는 경찰의 별다른 강제 진압은 없었고 단지 경찰의 제지가 강화되었을 뿐이다.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선언문

이승만 정부는 집정 12년간에 거듭한 악정의 결과 민심이 완전 이반되어 자유선거로서는 도저히 정권을 연장할 수 없게 되자 이번 3·15선거에 있어 최후 발악으로 모든 불법과 극악 수단을 무소불위로 구사하여 민주주의의 초석인 선거제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이번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바로 국민주권의 강탈행위이다. 그러므로 3·15선거는 전적으로 불법이고 무효임을 거듭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시청에서 개표가 진행된 하오 7시 30분경 시민과 학생 1만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다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사태의 긴박성을 예측했음인지 전원 실탄을 장전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시청 입구는 물론 파출소마다 엄중한 경계를 폈다. 이 때 정전이 되면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총격을 피한 시위대는 변절 의원 허윤수(5․2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되어 자유당으로 당적으로 옮김)의 집과 자유당 당사, 남성동파출소 등을 부수었다. 평화적 시위가 경찰의 폭력적 진압과 테러로 격화되었고, 시위는 민중봉기로 발전하였다.

이날의 발포로 사망자 8명(9명이라는 설도 있음), 80여 명의 중상자를 내고 밤 11시 30분경 완전히 진압되었다.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건국 이래 최대의 불상사였다. 경찰에 연행된 253명 모두 예외 없이 경찰로부터 무자비한 보복성 폭행을 당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는 이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승만은 마산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무장관과 현지 경찰 책임자를 교체하고 구속되었던 시민 일부를 석방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했다. 사망자의 가족에 대한 정부의 시책도 무성의하게 진행되었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3월 16일 오전 11시 30분, 안국동에 있는 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고등학생이 주축이 된 500여 명이 자연발생적인 시위를 벌였다. 청주에서는 12시 30분경 청주공고 학생 약 3백 명이 수업을 마치고 청주역으로 집결하여 데모를 거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모이기 전에 경찰에 발각되어 경찰 백차와 각 학교 교사들의 완강한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월 24일과 25일에는 부산에서 잇달아 데모가 일어났다. 부산고 1,2학년생 약 900명은 3월 24일 아침 9시경 조회시간을 이용하여 삐라를 뿌리고, 정문으로 또는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3월 25일에는 경남공고, 혜화여고 학생들의 시위도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고등학생의 시위가 중학생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구호나 전단은 24일의 부산고의 삐라나 구호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고교 사이에 상호연계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학생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등교중지령을 내렸다. 학교 교사들을 통해 학생들이 오후 5시 이후에는 거리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명령도 시달하였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는 3․15 부정선거가 끝나고 제2차 마산시위가 있기까지 간헐적이지만 끊임없이 이어져 갔다.

>
팝업창 닫기